본문 바로가기

파란태양/전원 이야기

꿀벌들아, 우리 국화꽃 피었다고 소문내줄래?

2008/10/11 (토) 10:53

 

꿀벌들아,

가을꽃이 본디 꿀이 많은 게 별로 없어 얼마나 배가 고팠니?
고들빼기니 씀바귀니 이런 꽃들 보기만 좋지 꿀이 별맛도 없고 양도 적잖아. 국화 옆에 잔뜩 심어놓은 취나물도 그랬잖아. 무슨 소금
뿌려놓은 것처럼 꽃만 하얗게 피었지 꿀은 별로였어. 아직도 피는 여름꽃들도, 이젠 그리 달지 않을걸? 또 철만난 억새꽃 같은 건 꽃이라고 할 수도 없어. 그거 꿀 따려다간 지쳐서 집에 돌아가지도 못할걸? 부추꽃도 좀 서운했지? 그리고 손톱만한 구기자꽃, 꿀따려면 감질나지?
 
이젠 걱정 마. 국화철이 되었으니 한 바탕 신나게 잔치를 하는 거야. 물론 국화라고 다 꿀이 많은 건 아니지만 내게 아주 좋은 소식이 있어. 구절초나 쑥부쟁이 같은 걸 소개하려는 게 아니야.
잘 들어. 우리집 마당에 봄부터 씩씩하게 자란 감국 있잖아?
며칠 전부터 봉오리가 노랗게 오르더니 어제 오늘 마구 피어나기 시작한다. 감국이 왜 감국이냐면 꿀이 많아서야. 단 감(甘)이란 한자를 넣었잖아?
 
감이 와? 그럼 어서 날아와 맛있는 꿀을 따먹으렴. 급한 마음에 혼자 오지 말고 친구들 마음껏 데리고 오렴. 너희들이 실컷 먹고도 남을 만큼 내가 감국을 많이 길렀거든. 왜냐하면 나도 감국차를 만들 욕심이 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감국 노란꽃을 그늘에 말려 베갯속을 하면 잠이 잘 온다고 하여 이래저래 많이 가꾸었어. 그래도 넘치고 넘치니 놀랄 것없어. 정말 많아. 너희들이 매일같이 잔치를 해도 앞으로 보름은 신이 날걸?
 
우리 스승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도 울고, 천둥도 쳤다고 하셨는데, 그건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신 말씀이고, 난 그냥 값싼 거름 한 포대 뿌리고, 가문 날에 물 준 것밖에 없어. 그러니 미안해 하지 말고 열심히 꿀을 먹어주렴. 물론 너희들이 꿀을 다 빨아먹은 꽃은 차를 만들어도 맛이 덜해. 나도 눈치껏 막 핀 꽃송이를 골라 딸 테니 걱정할 것 없다구. 너무 많아. 숨이 막힐 지경이야. 그러니 너희들 미안해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꿀통이 넘치도록 따가도 좋아. 아마 국화꽃이 너희들이 보는 올해 마지막 꽃 아니겠니?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부르는 거야. 친구들 다 불러들여도 좋아. 특히 우리집 고추, 토마토, 가지, 호박, 오이 수분해준 아이들 있잖아, 꼭 오라고 해줘.
 
음, 배가 부르거든 세상은 이렇게 좋은 거야, 삶이라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야, 그렇게 여기렴. 세상은 볼수록 재미있고, 알수록 신비하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소오줌이나 말똥조차 고마워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져. 그렇다고 나한테 고마워하라는 뜻은 아니야. 꼭 집어 고마워해야 할 데가 있다면 우선 국화한테 하고, 그걸로 미안할 것같으면 국화에게 빛을 쬐어준 태양, 비를 내려준 하늘, 거름을 만들어 내게 판 용인축협 사람들, 거름을 살 수 있도록 내게 저작권료를 지불한 독자들, 용인축협에 분뇨를 공급한 돼지나 소나 닭? 심심하면 잘 생각해봐. 고마운 일 찾자면 오죽 많겠어. 고마워할 줄 모르니까 모르는 거지.
 
그럼 인사는 내년 가을에 다시 하기로 하고, 어깨동무해서 우리집 마당으로 날아오렴. 아무리 많이 와도 내가 너희들 쫓지는 않을게. 그냥 너희들하고 섞여 나도 좀 딸게. 아참, 국화는 너희들이 꿀을 따가는 건 아주 좋아해. 하지만 내가 꽃을 따는 건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하지만 내가 저희들 씨를 동네에 자꾸 뿌려주니 나도 노력은 하는 편이라구. 내가 애써서 우리동네에 감국이 엄청 퍼졌거든. 꽃이라는 게 씨앗 퍼뜨리려고 생겨나는 건데 그 일은 내가 좀 돕고 있는 편이라서 나도 크게 미안하지는 않아. 자, 그럼 우리 함께 국화꽃 잔치를 해볼까?

 

 

 
- 낮에는 꿀벌이 너무 많아 꽃을 채취하기가 어렵다.

녀석들이 다 돌아간 저녁 어스름에 따야겠다.

* 이 글을 쓴 이후 약 9일간 기다렸다가 어제, 오늘(10.19~20) 꽃을 땄다. 감국차를 만들기 위해서다.
채취하고 남은 꽃도 어지간하고, 또 새끼 꽃봉오리가 많이 있으니 벌꿀들의 잔치가 아주 끝난 건 아니다
씨가 여물면 따로 모았다가 다른 곳에도 전파할 생각이다.
그래야 향기를 주고, 아름다움을 준 우리 감국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란태양 > 전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양하는 게 제일 괴로워   (0) 2008.12.20
철부지들 다시 보며   (0) 2008.12.20
토마토, 고맙다   (0) 2008.12.20
9월말에 오이를 심다  (0) 2008.12.20
배추가 웃자란다  (0) 2008.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