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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전원 이야기

9월말에 오이를 심다

2008/09/29 (월) 18:08

 

올여름에는 날이 너무 뜨거워 오이농사를 망쳤다. 오이는 수분을 좋아해서 물을 많이 줘야 하는데, 날이 너무 뜨거워 웬만큼 줘가지고는 금방 증발해버리고, 내가 일이 바빠 물을 더 많이 주는 걸 게을리했더니 몇 개 열리지도 않다가 줄기가 노랗게 말라버렸다.

 
하도 속상해서 8월말에 오이 씨앗을 다시 뿌려 다섯 포기를 수돗가에 심었다. 그런데 오이는 수분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햇빛도 좋아해서 9월 햇빛 가지고는 양이 안차는지 열리는 게 시원치 않다. 손가락만한 걸 대여섯 개 땄는데, 시원치 않다. 그나마 눈이 어두워 한 개를 미쳐 못따냈더니 이놈이 노각이 되어 영양분이 그리 다 흘러가버린 모양이다.
이파리는 싱싱하고 줄기도 시원스레 뻗어나가는데 날이 웬수다. 요즘 밤 온도가 10도씨 아래까지 떨어지는데 이래가지고는 오이가 잘 열릴 수가 없다. 하루하루 목숨 내놓고 사는 사형수처럼 우리집 오이는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이어간다. 그래도 서리가 내리는 한 꽃은 계속 피고 있고, 어디선가 꿀벌도 찾아와 열심히 수분을 해준다. 서리 내릴 때까지는 이럴 것이다. 우리네도 죽는 날까지는 죽는 줄 모르고 그럴 것이고.
 
원래 가을이 되면 모든 식물이 알아서 이파리를 떨구고 알아서 죽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 고추, 토마토, 고구마, 가지 등 대부분의 작물이 서리만 안내리면 열심히 꿋꿋이 살아갈 수 있다. 서리가 내리는 날 일제히 처형당하는 숙살(肅殺)이 일어나는 것이지 스스로 죽는 건 아니다. 이런 걸 보면 이차대전 때 인간이 수천 만명 죽고, 육이오 때 수백만 명이 죽는 것 등도 숙살에 속한다. 숙살이라는 게 이처럼 무섭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 수가 많으면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다고 믿지만 세상의 이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이 많이 탄 타이타닉도 가라앉고, 페스트 한 번 돌면 수천만 명이 죽는 법이니까.
 
어쨌든 올해는 내가 좋아하는 흰민들레와 부추 따위를 화분에 옮겨 놓고 이파리를 뜯어먹으며 겨울을 날까 생각중이다. 그런데 집안으로 들어와야 할 화분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이놈들을 거실에 들여놓으면 분명히 개미도 따라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이놈들하고 겨우내 싸워야 한다. 봄에 화분을 내보내도 잔당이 남아 여름까지 괴롭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