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11 (토) 18:46
해마다 이때쯤이면 수많은 철부지들을 만나게 된다. 봉숭아, 냉이, 쑥, 민들레, 명아주... 등 가짓수도 많다.
이 녀석들을 볼 때마다 착잡한 생각이 든다.
머지 않아 서리가 내릴 텐데 이제 싹을 틔워 뭘 어쩌자는 건지 그 미련함에 안타깝고, 그 무모함에 더 안타깝고, 내가 갖지 못한 그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사람이 가꾸는 채소류는 봄배추, 여름배추, 가을배추가 있지만 자연상태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아욱 같은 게 봄 아욱과 달리 가을 아욱이 큰 대접을 받는데, 그것도 사람 손을 타서 그렇지 자연 상태에서는 때를 맞춰 자라기가 어렵다.
가을이 되면 마치 봄처럼 냉이, 씀바귀, 민들레, 취나물, 비름나물 등 대부분의 봄나물이 다시 나기 시작한다. 맛이 더 깊고 진한데, 농사 오래 지은 시골 어르신들이 이 맛을 특별히 즐기기도 한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재빨리 채취해 먹어야지 안그러면 서리를 맞고 다 죽어버린다.
그래서 해마다 텃밭에 소복하게 올라오는 철부지를 보면서, 사람이든 채소든 식물이든 철을 잘 알아야 산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생각을 바꿔 보기로 했다. 봉숭아 때문이다. 우리 봉숭아는 이미 지난 초여름에 활짝 피었는데, 요즘에는 거기서 떨어진 씨앗이 발아하여 제법 자랐다. 꽃도 피었다. 아주 드물지만 어떤 녀석은 씨를 맺고 있는데, 잘만 하면 서리가 내리기 전에 여물 것도 같다. 이렇게 되면 이 봉숭아는 한 해에 두 번 사는 기록을 내게 된다.
어제 지방에 가 친구를 만났는데, 무슨 얘기끝에 장점이란 게 단점이고, 단점이라는 게 장점이기도 하다는 대화를나누었다. 사람들은 흔히 장점만 장점인 줄 알고 단점은 어떻게든지 고쳐 없애려고 애쓰는데, 거기까진 다 좋은데 단점의 가치도 인정해주자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누군가 뛰어난 화가라면 그 사람은 다른 분야하고는 거리가 멀어진다. 전문 분야에서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다른 분야의 문외한이 되기 쉽다.
예를 들자면 고래는 포유류지만 바다에 들어가 바닷물고기를 마음껏 잡아먹으며 산다. 하지만 그 뛰어난 혹은 특출한 능력 때문에 그는 육지로 돌아오지 못한다. 선인장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이 선인장이 우리나라같은 온대지방에 와 살면 갑자기 바보가 된다. 비는 늘 충분히 내리건만 선인장은 자꾸만 물을 저장해둔다. 결국 선인장은 썩어버린다. 장점이 그만 단점이 돼버린다.
우리 철부지 봉숭아가 만일 씨앗을 맺는데 성공한다면, 또 서리가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씨앗을 맺는 능력을 갖춘다면 봉숭아는 추위에 훨씬 더 강한 종자로 바뀔지 모른다. 이런 철부지들이 앞장서서 그들의 미래를 개척해온 게 오늘날 자연의 역사다.
따지고 보면 먹을거리가 풍부한 밀림을 뛰쳐나온, 결코 평범하지 않은 침팬지 한 마리가 바로 인류의 조상이 된 것처럼, 개척자는 항상 이단자요, 분리주의자요, 아웃사이더요, 배신자나 낙오자다. 좀 삐딱하고 기울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인류나 그밖의 종을 유지시켜 온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수많은 철부지들이 재미난 사건을 많이 일으키고, 또 놀랄만한 진보를 이뤄냈다. 평균이나 안전, 관습, 법률, 제도, 이런 개념으로는 도저히 안되는 것이 있다. 그럴수록 사회의 이단자들을 여유를 갖고 바라보아야만 한다.
황우석이 계속 실험을 하겠다면 하는 것이고, 노무현이 계속 떠들겠다면 떠들도록 두는 것이다. 황우석이 실험을 계속한다고 해서 우리 개인이나 국가가 손해날 것도 아닌데 그이 뉴스만 뜨면 게거품 물고 덤빌 이유가 없고, 노무현이 정치 발언 한두 마디 한다고 벌떼같이 일어나 씹어대는데, 그이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그만두고라도 지방의회의원도 아니다. 아무 권력도 줘놓지 않고 무슨 겁이 난다고 그가 말하는 것까지 막을 필요는 없다.
따져보면, 우리 정부가 북한에게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도, 우리는 법과 제도, 국민의 의견을 받들어 그들을 대하지만 그들은 무슨 정해진 원칙이 없이 김정일 한 사람의 판단에 따라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집단이라서 그런 것이다. 그네들 뉴스를 들어보면 기가 막히지 않는가. 우리는 대통령 칭찬 한 마디 했다고 어용이니 뭐니 들고 일어나는데, 그쪽 방송 들어보면 어용이라는 어휘로도 설명이 안될만큼 징그럽고 간지럽다. 하지만 그들은 매사 빠르고, 강하다. 물론 지도자가 '아프시면' 전체 조직이 무력해지는 단점이 있다.
세상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법과 질서를 외쳐도 우리 상대가 반칙으로 나오면 꼼짝 없이 당할 수 있다. 우리 앞에 일어날 미래는 단순하지 않고 매우매우 복잡하다. 그래서 철부지들이 좀 있어야 한다. 많이는 말고 아주 조금만.
- 호박꽃봉오리가 맺혔다. 오늘 오전 온도가 섭씨 5도, 과연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울 수 있을까? 꽃이라도 피울 수 있으면 그나마 위로가 되련만.
- 같은 시각, 꽃을 피운 호박. 서리 내리기 전에 먹을만큼은 크겠지만 씨앗이 여물진 못할걸.
- 이미 먹기 좋을만큼 자란 호박. 오늘 저녁무렵 딸 예정. 저는 씨앗이 여물 때까지 살고싶겠지
- 철부지 봉숭아들. 벌써 씨앗을 맺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여명이 며칠 안남았다. 이 어린 것들을 어찌할꼬.
- 꽃도 못피운 철부지 봉숭아가 아직 많다. 노력하는 게 장하다. 한번 해봐!
- 작년 나 입원중에 수분 부족으로 거의 죽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나고, 올봄은 너무 힘들었는지 꽃을 못피웠다. 가을이 되어 겨우 꽃을 피워 살아났음을 알린다. 네 이름... 부겐베리아.
- 여름꽃 칸나는 아직도 씩씩하게 꽃을 피운다. 하늘이 높지 않으냐? 사는 갈까지 열심히 살자.
- 우리집 왕철부지이자 장애견이자 반려견 바니. 밥때 되면 소리 지르고, 운동할 때 되면 운동해야 한다고 소리지르는 아이. 집이 너무 커 거기 사료도 있고, 약도 있고, 영양제도 있고, 저 어디 데려갈 때 쓰는 담요도 들어 있다.
(이 아이, 증세가 날로 나빠져 결국 안아서 대소변 가려주고, 머리맡에 늘 두고 잤다. 열네살로 하늘 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