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02 (화) 10:17
시골 어디든 가보면 마을회관이란 곳이 있다. 무슨 면, 무슨 리하고는 곳에 리 단위로 꼭 있고, 도농복합시면 통 단위로 꼭 있다. 서울은 있는지 없는지, 있어도 누가 갈런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농촌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 생활하는 집이다.
전에 완력으로 정치하던 무시무시한 전두환 시절부터 시작하여, 농민들 표가 많으니까, 그러면서도 잘 낚이는 표니까 동네마다 약 3천만원씩 지원하여 양옥집을 지어주었다. 거금을 들였다. '파란태양' 어딘가에 그걸 비판하는 글이 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순전히 농민들 표 끌어모으기 위해 그짓을 했으니까.
그런데 세상일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 미국놈들이 세계 경제 망쳐놓았지만 우리 원화 가치만 마구 떨어지는 것처럼 마을회관도 엉뚱한 용도가 생겼다. 마치 일본술 만드는 도가집에서 근무하다가 어떤 놈이 도망가면서 술독에 재를 뿌려놓았는데, 이게 그만 기막힌 청주가 됐다든가 하는 아이러니처럼 전두환 씨가 표나 얻어볼까 한 일이 뜻밖에도 좋은 일에 쓰이게 됐다.
마을회관이 처음 생길 때만 해도 텅 비어 있었다. 가끔 마을회의나 여는 정도였는데,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농업이 기계화되고, 비닐 농법이 널리 보급되고, 농약이 발달하면서 마을사람들로 붐빈다. 잘 나지도 못하지만 풀이 좀 성가시면 제초제 확 뿌려버리면 그만이고, 벌레 생기면 살충제 쳐주면 그만이다. 그것도 지고 다니며 하는 농약이 아니라 항공방제나 무슨 기계로 한다. 어떤 이들은 잡초 웬만큼 생겨가지고는 꿈쩍도 안하고, 웬만큼 벌레생겨도 겁을 먹지 않은 채 내버려두기도 한다. 소출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떨어진 이삭까지 알뜰히 주워모았지만 지금은 기계수확으로 벼나락이 수없이 떨어져도 아무도 줍지 않아 참새며 까치만 자꾸 늘어난다.
옛날의 농한기는 사실 엄동설한 중으로 굉장히 짧았는데, 요즘은 날마다 농한기다. 웬만한 모내기도 하루이틀이면 끝나고, 대농이 돼야 며칠 걸릴 뿐이다. 상추 심고, 오이 심는 일은 식전에 잠깐 해도 된다. 가을에는 수확하느라고 바빠 부지깽이도 나선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요즘은 콤바인이 지나가버리면 타작까지 다 해 자루에 담아 주고, 볏단은 볏단대로 묶어 둘둘 말아주기 때문에 사람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부지깽이는커녕 학교다니는 애들은 그날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다. 옛날에 벼벤다고 초등학교 다니는 자식들까지 조퇴시켜 온가족이 일제히 나서던 시절하고는 비교가 안된다.
요즘같은 겨울이 되면 전같으면 어디 사랑방에 모여 떠들던 정도였는데, 이젠 근사한 마을회관에 여자방, 남자방, 청년방 이런 식으로 많다보니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여름이고 겨울이고 늘 붐빈다. 마을회관에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고, 운동기구도 여러 개 있다. 러닝머신 정도는 기본이다. 보일러는 씽씽 돌아가 창문 열어놓고 지낸다. 부엌 살림도 넉넉하여 쌀이고 김장이고 가득하다. 농민들이 서로서로 내는 것도 있지만, 약점 잡힌 인근 공장장이나 서울가 출세한 아드님들이 기부를 한다. 정치해보려는 분들이 몰래 기부를 하기도 한다.
이러다보니 아침은 집에서 간단히 먹고 여덟시면 모여든다. 그러면 여자들은 아침부터 연속극보며 저년 봐라, 저놈 봐라, 이혼해라, 붙어라 이러면서 떠들썩하고, 남자들은 백원짜리 고스톱판을 벌여 늦은 밤까지 계속한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10대들이 텔레비전을 많이 봐서 이네들이 광고소구층이 됐는데 이젠 노인들 대상 광고가 부쩍 늘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어쩌고 하는 광고가 다 이런 현실을 간파한 광고쟁이들이 만든 것이다. 덕분에 상조회 광고, 죽을 때 천만원은 남겨 자식들 고생시키지 말자, 이런 광고가 먹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고도 마을회관에 가득한 이 노인들은 장날이면 우르르 장으로 몰려간다. 왜냐하면 정부에서 8만 5천원씩 용돈을 주는데, 이것만 가지고도 한 달에 여섯 번 있는 장에 구경가기가 한결 좋아졌다. 게다가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한 달에 10만원쯤은 주니까 이 분들 구매력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 겨울철이면 벼라별 장사꾼들이 마을회관으로 들이닥친다. 어깨도 주물러주고, 파스도 붙여주면서 만병통치약을 팔아대는데, 수십 만원하는 것도 이 노인들이 척척 사들인다. 우리 어머니집에도 그런 쓰레기 많다.
지금까지 적은 것은 그냥 그런 현상을 말한 것뿐 다른 의도는 없다.
어쨌거나 전두환, 잘 했다. 난 전두환이 나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저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좋은 일 한 셈이다.
특히 전두환 노태우 또래 노인들이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아시다시피 농촌 자살율이 높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아 애지중지 길러 서울에 올려보내 혼자, 혹은 둘만 남아 사는데, 어쩌다 자식들이 망해(누군가는 망하니까 그 누군가의 부모도 있잖은가) 명절이 돼도 안찾아오면 울컥 하는 마음에 별 생각이 다 들 것이다. 돈줄 끊긴 거야 이웃 품을 팔아도 먹고는 사니까 문제가 아닌데, 다른 집 자식들은 빵빵거리며 좋은 차 타고나타나 무슨 선물꾸러미를 잔뜩 안고 들어가 저희집 식구들끼리 낄낄거리는 걸 담장너머로 보면 속이 뒤집히는 모양이다. 게다가 무거운 마음 접고 마을회관에 나가 앉아 한숨 쉬고 있으면 그런 사람한테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말칼이 엄청나다. 우리 아들은 이번에 과장돼서 월급이 백만원이나 더 올랐다네. 내 손녀딸 있잖어, 걔가 반 회장이 됐다네. 우리 사위가 장모님 드시라고 뭐 이상한 과일을 보내왔는데 어떻게 먹는지를 모르겠어. 오톨도톨 곰보처럼 생겨가지고 껍질 딱딱한 거, 그거 뭐여? 파인애플인 줄 알아도 그렇게 묻는다. 이것 좀 봐. 우리 며느리가 백화점에서 산 거래. 그러면서 팬티까지 까보인다.
그러면 깔깔, 껄껄 난리가 난다. 서로들 자식 자랑이다. 마을회관에서는 못난 자식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면서 점심 같이 해먹고 심지어 저녁까지 해먹으며 버틴다. 누구 하나 얼굴이 안보이면 전화를 해서 빨리 오라고 하고, 전화를 안받으면 누군가 가서 들여다본다. 그러다 농약 먹고 신음하는 사람도 발견하다. 체한 사람도 발견하고, 사위 실직했다는 딸 전화받고나서 여태 울고 있는 할머니도 발견한다. 죽은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살아 있기만 하면 동네사람들이 다 몰려들어 위로하고, 도와주고, 병원까지 후송시킨다. 그래서 119가 자주 가는게 마을회관이다. 그러다 상이 나면 마을회관이 곧 장례식장보조가 되어 음식 만들어 나르고, 수의 꿰매고, 먼데서 온 손님들 재워준다.
이러다보니 만일 마을회관이 없더라면 더 많이 생길 사고가 실은 줄어들었다. 노인자살이 심심찮게 일어나곤 있지만 마을회관이라도 없으면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겨울은 그러지 않아도 무드스윙이 일어나는, 누구나 다 우울해지는 계절이다. 햇빛이 너무 짧아서 그렇다. 우울한 상황이 생기면 더 우울해진다. 노인 우울증은 실제보다 더 심각하다. 자식들이 망하기라도 하면, 배우자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약장수가 와서 수십만원 어치 사기라도 치고가면 이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이런 것들도 서로서로 말하면서 위로하고, 넘어가고 그러니까 견디지 듣는 이 없고, 말할 데 없으면 더 힘들어진다.
비록 지금의 노년세대가 마을회관이라는 공동체 생활로 조금 더 건강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우리 젊은 세대가 신경쓸 일이 더 많다.
무엇보다 이분들에게 일을 줬으면 좋겠다. 예순다섯쯤 되면 마을회관에 드나들기 시작하는데 무려 20년은 출근을 해야 죽을 수 있다. 그만큼 의료와 영양 상태 등이 좋아진 것이다. 그런데 맨날 드라마만 보고, 화투나 치고, 남 흉보거나 자랑하는 일로 날을 보내서야 쓰겠는가. 이들이 일을 하면 우울증도 잊어버린다. 이 세상에 제일 나쁜 게 혼자 사는 게 아닌가 싶다. 혼자 살면 벼라별 생각이 다 들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일이 많다. 계룡산 10년, 지리산 10년 하는 도사들 정신상태가 오락가락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걸 극복하자면 일을 만들어 몸이 바빠져야 하는데, 농촌에는 일이 없다. 농사가 너무 쉬워져서 그렇다. 젊은 싱글맘이나 심글대디나(영어 쓰기 싫지만 기분 덜 나쁘라고) 애들 학원비 내랴, 급식비 내랴 너무 바빠 우울이 뭔지 잊고 산다. 그러다 애들이 자라 품을 떠나면 그때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독을 견뎌내기 쉽지 않다. 어디 싱글카페 들어갔더니 짝 만나지 못해 어지간히 흔들리는 듯하더라만.
지금의 농촌 노인은 옛날 우리들이 겪었던 그 노인들이 아니다. 체력이 우수하고, 지식이 풍부하고, 경험이 많은 분들이다. 이 분들이 마음만 먹으면 어린 여학생들 추행하는 것쯤 일도 아니다. 말하자면 나쁜 길로 나갈 수도 있다는 의미다.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냥 힘없는, 의욕없이 축 늘어진 분들이 아니란 뜻이다. 인터넷도 할 줄 알고, 이런 글도 읽어내는 분도 많을 것이다. 이런 분들 중에서는 좀 격하신 분은 욱하는 마음으로 알케에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공공근로 더 늘리고,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늘리는 연구를 좀 해야겠다. 농업은 젊은 농업전문가가 하게 유도해야 한다. 아무나 농사지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농업 문제가 안풀린다. 농민들을 알케에다 수준으로 만들어준 게 정부 잘못이다. 시골 지나가다 보면 대나무 막대기에 시뻘건 깃발을 꽂아 찍찍 갈겨댄 무시무시한 구호를 보는데, 이거 예삿일이 아니다. 농민은 이제 적당히 구슬려 표나 따먹는 대상이 아니다. 수십 조, 수백 조를 갖다 퍼부어도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 그러다간 진짜 알케에다 나온다.
하여튼 마을회관 얘기하다가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훑었는데, 마을회관은 말하자면 자생 양로원이 된 셈이다. 양로원이라면 간호사라도 있고 영양사라도 있지만, 이 마을회관은 환자들이 모여 서로 돕는 공동체다. 그래서 인구 5만 미만의 농촌 군은 정부에서 특별한 눈으로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 이 마을회관에 공무원을 보내 일거리가 없나 알아봐주고, 건강상태 체크하고, 심리상담도 해줬으면 좋겠다. 또 농촌에는 제초제 팔지 말고, 그걸 지정된 사람이 관리하거나 무슨 농약관리사 같은 제도를 만들어 농약을 대신 쳐주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그걸 먹고 죽는 것도 문제고, 용법을 몰라 필요이상 쳐대면 결국 도시민들이 먹는 셈이니 더욱 그러하다. 왜 마약은 그렇게 무섭게 관리하면서 혓바닥만 갖다대도 죽어버리는 이 맹독성 농약은 아무나 아무 때나 살 수 있게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맺힌 게 있다보니 말이 많아졌다.
하여튼 전두환 씨, 그나마 고맙습니다. 한강시민공원갈 때마다 고맙다는 생각도 했는데 시골 마을회관은 참말로 고맙습니다. 누구 돈 뜯어다가 지어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고맙습니다. 혹시 알아요. 죽으면 저승에서 지옥형받는다는데 500년쯤 받을 거 일년이라도 깎아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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