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태양 | 2007/05/19 (토) 19:22
내 인생의 좌표
- 저 아이는 왜 내 딸일까?
지난 해 여름 고구려 시조 주몽의 남진 루트를 답사하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의 몽골 초원을 여행했다. 호텔 시설이 훌륭한 선진국을 여행할 때는 모르겠는데, 중국의 시골, 인도의 남방, 몽골 초원 같은 곳에 며칠 있다 오면 정신이 다 멍멍해진다. 심한 경우 내 좌표를 까마득히 잊기도 한다. 내가 누구의 자식이며, 누구의 아버지이며, 누구의 남편이라는 기본적인 좌표가 마구 흔들려 그냥 그곳 어딘가에 주저앉아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꿈을 꾸어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바짝 긴장하고 써오던 신문 연재소설이니 출판 계약 따위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물며 집에 전화를 거는 일도 깜빡 잊는다.
고생이 심한 여행일수록 갑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김포공항에 내려 출구로 나설 때까지도 멍한 채 카트를 밀다가 저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는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면 나는 키 워드를 찾은 컴퓨터처럼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손을 번쩍 쳐든다. 한 박자 늦게.
마치 어린 시절 한참 꿈을 꾸다가 어머니의 매서운 목소리에 깨어나고 보면 갑자기 꿈세상은 사라지고, 낯이 익기는 하나 그다지 반갑지 않은 현실에 끌려나온 기분 같은 것이다. 날이 밝지도 않은 새벽, 어머니가 내미는 밥을 꾸역꾸역 삼키며 책가방을 챙기던 학창 시절 말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환생한 사람처럼 이것저것 원점부터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게 설정된 좌표를 다시금 점검한다.
나는 왜 저 사람의 남편인가? 저 사람은 왜 나 아닌 다른 남자하고 살지 않고 나를 만나 살고 있나. 왜 내 셔츠를 다림질하며, 지저분한 내 여행가방을 정리하고 있을까.
저 아이는 왜 내 딸일까? 하고많은 가정 중에 하필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을까. 무슨 자격으로 매일같이 울고불고 떼를 쓰며 거머리처럼 내게 붙어다닐까. 왜 내게 피카추 인형을 안사준다고 화를 낼까.
장모님은 또 누구인가. 결혼하기 전에는 함께 살리라곤 꿈에 꾸어보지도 않은 낯선 분이다. 그런데 함께 산 지 어언 십 몇 년이 되었다. 무슨 인연으로 남편이 아닌 사위의 눈치를 보며 저렇게 살아야 하나.
그리고 눈길을 돌려 방안에서 함께 사는 강아지 두 마리를 바라본다. 아직도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열한 살짜리들이다. 하나는 젖먹이 강아지 시절 내가 선택했고, 하나는 주인한테 버림받고 팔려나온 성견 시절에 불쌍해 보여서 거두었다.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니, 열한 살이나 되도록 누가 잘 건사하기나 했을까.
창밖에서는 나머지 여섯 마리가 어떤 놈은 누워 있고, 어떤 놈은 물을 마시고, 어떤 놈은 마당을 거닐고 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저하고 나 사이가 무지무지 중요한 관계임을 확인시켜 준다. 여섯 놈이 내게 온 사연도 가지가지, 어쨌든 지금은 내 좌표에 한 점씩 차지하고 의기양양하게 살아가고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따라다닐 좌표의 점들이다. 나머지 잔디며 은행나무며 대추나무 등이야 저희가 뿌리를 박고 있는 이상은 그 땅이 영원한 좌표이니 내게는 임시 좌표일 따름이다.
이 모든 환경이 재설정되어야만 나는 정상으로 돌아간다. 그러기 위해 일주일은 족히 헤맨다. 그래야만 내가 누굴 미워했고, 누굴 사랑했는가 온전히 기억을 회복할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자신의 좌표를 점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지금쯤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이렇게 말이다. 그러고 나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솟구칠 것이다. 딸이 더 예뻐 보이고, 아내가 더 사랑스러워 보이고, 강아지가 더 귀여워 보일 것이다.
- 1999년 여름. 지금 읽어보니 나는 이미 그때 오늘을 느꼈는가보다. 그때 내 좌표상에 나타났던 점들이 많이 사라지고, 다른 점들이 들어와 있으니 말이다. 그때는 멀리 여행이나 가야 좌표를 상실했지만, 지금은 매일매일 잃는다. 아내와 딸, 이런 좌표상 점이 있어야 내 길을 찾는데, 넓은 좌표상에 점 하나 달랑 찍혀 있다보니 여기가 위인지 아래인지, 동쪽인지 서쪽인지 참말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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