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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언제나 형이 될 수 있을까

 

 

파란태양 | 2007/05/19 (토) 18:53

 

 

난 언제나 형이 될 수 있을까

 

 

- 나더러 동생이냐, 동생더러 형이냐?

 

 

지난 추석날 막내동생과 함께 집앞에 서있는데 흙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던 승용차 한 대가 끼익 하는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우리 두 사람 앞에 섰다. 먼지가 확 몰려들었다.

창문이 스르르 내려지고, 낯선 놈 얼굴이 우리쪽을 향하더니 빙그레 웃었다.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그놈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난처한 일이 생겼다. 고향을 떠난 지 하도 오래 돼서 누가 누군지 얼굴이 아리송한데, 딱 걸렸구나 싶었다. 이런 일이 많다보니 나도 수가 있다. 시치미 떼고 마주 웃어주는 것이다.

참을성 없는 쪽이 입을 열게 돼 있고, 먼저 웃은 건 그쪽이니 그쪽이 알아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과연 그쪽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야, 재구야, 오래간만이다!”

“뭐? 재구?”

재구는 내 막내동생이다. 동생은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다.

동생은 제 이름이 튀어나오자 얼른 그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겸연쩍어서 “얘가 재구다.” 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자주 있다. 특히 막내동생하고는 역할이 바뀌어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 십년간은 이런 일로 시비가 많이 걸렸다. 내가 동창들을 보고도 아는 체를 안하고 다닌다는 거였다. 대학 다닌다고 거드름피우느냐는 볼멘소리(내 시골 동창 중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마 서너 명에 불과할 것이다)가 들려왔다. 제법 이름을 얻은 뒤에는 더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동생을 본 친구들이 그런 볼멘소리를 해댄 것이다.

이쯤하면 동생하고 내가 쌍둥이라도 될 듯싶지만 그건 아니다. 중간에 다른 동생이 하나 더 있으니 말이다.

어떤 때는 둘째형의 전화 목소리를 듣다가 내가 놀란 적도 있다. 내 목소리하고 똑같이 들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부모님의 유전자를 기본으로 생겨난 동기(同氣)이기 때문에 그런 것같다. 이런 일은 비단 나만 겪는 게 아니라 우리 세대, 즉 전후(戰後)에 형제자매를 대여섯씩 둔 사람들이라면 한두 번씩 경험해봤을성 싶은 일이다.

 

 

내 또래라면 오형제쯤 있는 걸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 오형제 중의 셋째다. 따라서 형이 둘이고 동생이 둘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위로 붙어싸우고 밑으로 내리뭉개면서 백전(百戰)을 치르며 자라났다. 집안에서 싸우지 않으면 동네 아이들과 붙어 싸우고, 그것도 아니면 이웃마을, 나아가 학교에서 힘과 기를 겨룬다. 아마도 놀잇감이 많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하루 종일 수수댕이를 밀고다닐 수도 없고, 둥글레를 굴릴 수도 없다. 그러니 형제가 다 모여 놀거나, 동네아이들이 떼를 지어다니며 노는 수밖에 달리 즐길 오락이 없었다. 컴퓨터, 전화, 텔레비전, 게임, 만화, 책, 신문, 잡지, 장남감 같은 게 하나도 없는 산간벽지에서 그 길고긴 하루를 버텨내려면 아이들 하나하나가 스스로 놀잇감이 돼야만 했다. 오죽하면 ‘지무시’(GMC 마크가 찍힌 트럭)란 덩치큰 트럭이라도 나타나면 천지개벽이라도 하는 줄 알고 기를 쓰고 따라달렸을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는 켁켁거리면서도 수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마라톤을 하듯이 달렸으니, 다같은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오형제가 오리쯤 되는 광산까지 차를 따라간 적도 있다.

 

 

- 형에게 붙어살던 시절

 

 

그런 중에도 나는 작은형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다. 네 살이 많은 형은 내가 위기에 빠지기라도 하면 바람같이 나타나 구원하는 수호천사였다.

초등하교 1학년 때 맞은 겨울날, 그러니까 1965년 12월, 십리길이 되는 학교를 다녀오는 길에 털모자를 썼는데도 너무 추워 “아이고 추워 죽겠어~!”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형은 쓰고 있던 토끼털 귀마개(진짜 산토끼를 잡아 만든 수제품)를 벗어 내 귀를 감싸주었다. 찬바람은 불어대고 눈이 쌓인 길은 발이 푹푹 빠졌다. 그러고는 형은 의젓하게 앞장서 걸었다. 형의 귀는 금세 빨갛에 달아올랐다.

형이 몹시 추우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형의 귀마개를 벗어 돌려주지 못했다. 그 의연한 형은 겨우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다. 내 딸이 5학년 때 나는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노심초사하며 보물 다루듯이 조심했는데, 그 어린 5학년생이 동생을 위해 이토록 큰 희생을 한 것이다. 형의 귀는 끊어질듯 아팠으리라.

 

내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다 자란 뒤 그때 그 일을 형에게 얘기했는데, 형은 까마득히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기껏 그 당시 귀마개를 살 여유가 없어 산토끼를 잡아 직접 만들어 쓰고다녔다는 기억만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한데, 형은 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므로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서 기억에 남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일 뿐이다.  

 

그날도 1학년생이던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5학년 교실 뒤켠 빈 자리에 두어 시간 앉아 있다가 형을 따라 돌아오는 길이었다. 1학년 내내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5학년 교실로 옮겨가 옥수수죽을 얻어먹고, 두 시간 정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고학년 공부를 건성으로 듣고 청소까지 하는 걸 지켜본 뒤 형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안그러면 집으로 돌아가는 5리길에 장터, 새터를 지나야 하고, 다래울을 지나야 하고, 아랫말을 지나야 한다.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강호의 무림들처럼 꼭 험상궂게 생긴 악동들이 튀어나와 길을 막아서는데, 나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다닐 수가 없었다. 그때는 마을마다 지역방위군 같은 어린 전사들이 길목을 지켰다. 하지만 그 모든 아이들을 형은 쾌도난마처럼 물리치며 당당히 길을 열었다. 덕분에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적지를 유유히 다닐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형이 감기라도 걸려 학교에 안가면 나도 안가는 것이고, 형이 배탈이 나 조퇴를 하면 나도 덩달아 끌려가는 것이다.  

 

- 등하교 길은 전선을 통과하는 전사의 각오로  

 

이런 우리 형제들보다 더 먼 곳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 동네 중뜸이란 곳을 지나 윗말을 또 지나 거의 10리를 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 아이들은 여덟 살에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아홉 살은 돼야 학교에 들어간다. 여덟 살 다리로는 십리가 넘는 학교까지 걸어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악동들이 도사리고 있는 몇 군데 난관을 통과할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처럼 형이라도 있으면 제 나이에 학교에 들어가고, 없으면 좀더 키를 키우고 몸집을 불린 다음 아홉 살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고도 형제가 없어 난관을 통과하기 어려운 아이들은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리 시골에는 내 또래 아이들 중 초등학교 중퇴자도 제법 있다.

 

하여간 나는 형 덕분에 무사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또 내 동생들 역시 내 덕분에 제 나이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막내 같은 경우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데리고 다니기 위해서 일곱 살에 입학시키기도 했고, 또 사촌동생 하나 역시 같은 이유로 여섯 살에 입학시켜 내가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결국 이 사촌동생은 1학년을 재탕, 또 2학년 재탕해서 가까스로 제 나이에 학교를 다녔다.

 

 

- 한번 형이면 영원한 형이더라

 

 

큰형하고는 나이 차가 많아 사연이 그리 많지 않지만, 작은형하고는 네 살 차이이다 보니 덩치로나 머리로나 형은 늘 적당한 우위를 보였다. 지금도 형은 나보다 키가 크고 몸무게가 더 나가지만, 아무리 열심히 먹고 힘을 길러도 형을 따라잡을 길이 없었다. 형은 높은 산같고, 모르는 게 아무것도 없는 대학자만 같았다. 나뭇짐을 져도 내 짐의 두 배를 지고, 밭에서 김매기를 할 때나 거름을 낼 때나 손이 어찌나 빠른지 뒤처리가 깔끔했다. 내가 일을 하기 싫어 냇가에 숨어 가재를 잡을 때도 형은 묵묵히 할 일을 끝까지 해냈다. 그러고는 어딘가 숨어 있을 동생을 향해 “일 끝났다. 가자.” 그러면 그만이었다. 그래봐야 형 나이 열서너 살에 불과했을 텐데.

 

 

그러던 것이 형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형이 6학년에 오르던 해, 그만 고추농사를 망쳤다. 그러니 중학교에 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중학교 학비가 얼마나 된다고 고추농사 망쳤다고 못갔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만, 당시 사정은 그랬다. 점심 대신 고구마를 먹을 때고, 저녁으로 먹을 곡식이 없어 생호박죽을 쑤어 먹어야 하던 시절, 중학교 등록금이란 어마어마한 목돈이었다. 요즘도 하찮아 보이는 액수의 돈 때문에 한강다리며 아파트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투신하는 사람들이 있잖는가. 몇백만원조차 그들에게는 결코 하찮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형제 중에 가장 머리가 좋아 꼭 가르치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작은형을 중학교에 보내지 못한 이후 형이 쉰이 넘은 오늘날까지 미안해하고 아쉬워한다. 형들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죄인처럼 군다. 점심을 굶고 저녁을 죽으로 때우던 그 시절, 어머니가 겪었을 그 간난신고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어머니 역시 그건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여길 뿐 되새기질 않는다.

 

 

아무튼 형은 그렇게 해서 국졸 학력만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 나는 형이 진학하지 않은 덕분에 어머니가 해마다 조금씩 모은 돈과, 또 내가 6학년이 되던 해 뜻밖의 고추농사 대풍으로 비교적 여유있게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4년간 형은 농사일을 거들면서 10리쯤 되는 곳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소학, 통감, 이런 거라도 배워두면 써먹을 수 있다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이었다. 형이 그때 배운 한문 실력으로 써먹는 건 입춘 때마다 입춘방 하나는 멋들어지게 써서 돌린다는 것뿐이다. 그 한문 실력을 뒷받침할 일반 학문을 접하지 못했으니, 그러고도 기술자로 변신했으니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형이 밭을 일구어 열심히 농사를 지은 덕분에 나는 무사히 중학교를 다녔다. 비록 학교가 너무 멀어 1학년 때 신경쇠약증에 걸릴만큼 힘들었지만, 어쨌거나 난 형보다 더 많이 공부할 수 있었다. 왕복 차비 20원이든가 30원이든가만 달랑 들고 학교를 다니다보니 그 돈으로 빵을 사먹고 30리길을 걸어다닌 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차량 사정이 열악해 저절로 빠지는 차가 많아 그때마다 억지로 먼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덕분에 신경쇠약증에 걸려 귀신같은 헛것을 보고, 오줌을 쌌지만 어쨌거나 난 형이 배우지 못하는 영어, 수학 같은 걸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난 서당에 다니는 형이 부러웠다. 붓으로 힘차게 감아돌리는 그 현란한 서체 앞에서 우리 동생들은 늘 무한한 존경심을 표해야만 했다. 껍질을 벗긴 하얀 버드나무가지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한문책을 읽어내던 형 앞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여전히 주눅이 들었다.

   

그런 중에 나 때문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바로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이 동생은 나보다 두 살 밖에 적지 않다. 내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이라서 어머니는 또 고민에 빠졌다. 막내동생도 있는데, 이 네째를 중학교에 보내버리면 나 하나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고, 더구나 막내는 앞길이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때 넷째 동생이 빠져야 나를 고등학교에 진학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과감히 동생의 진학을 포기했다. 말 잘 듣고 매사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 동생(별명이 틀물래였다. 충청도 말로 말 않고 묵묵히 참는 아이란 뜻이다.)은 두 말없이 지게를 졌다. 결국 나는 형과 동생을 제쳐놓고, 삼형제의 희생을 바탕으로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했다.

 

 

다만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는 막내가 6학년이 되는 바람에 시골에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가야만 했다. 외지로 나간다는 건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막내의 앞길까지 막아버리면 모를까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수를 놓지 않았다. 나만 잘하면 농고에 들어가서도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며 여지를 두지 않았고, 막내는 운좋게 중학교에 들어가고, 대신 나는 농고에 들어갔다.

 

 

농고에 들어간 것만도 감지덕지이건만 나는 그만 1년도 안되어 싫증을 내고 학교를 그만두어버렸다. 오후 내내 농사일을 시키는 교과과정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또 땅없는 아버지가 농사꾼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일생을 보았기 때문에 절대로 시골에 살 마음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결석을 해버리자 어머니는 통곡하고, 이 소식을 들은 그때 이미 환갑이 된(1970년대 초의 환갑이란 지금의 70세보다 더 큰 나이다) 이모가 마침내 날 데려가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시험을 칠 수 있었고, 1년 늦게나마 당당히 다니고 싶은 학교에 들어갔다. 이모는 날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까지 주었다. 나에 대한 부담이 주는 바람에 막내동생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거뜬히 진학했다. 5형제 중에 둘이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 대학이 문제였다. 큰형과 작은형은 그때 무작정 상경하여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큰형은 설비공, 작은형은 막노동꾼이었다. 그런 형들이 아무 생각없이 날 맡겠다고 나섰다. 동생이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국졸’의 형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형들이 얼마나 희생해야 하는지 잘 계산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두 형은 날 가르쳤다. 그러다 큰형이 다른 데로 떠나 작은형이 날 전적으로 맡았다.

 

 

작은형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 기능사2급 시험에 도전했다. 막일을 해가지고는 날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보수가 좀더 나은 기술자가 되려 했다. 형은 주중에는 막일을 하고 주말에는 친구가 다니는 이삿짐센터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했다. 불과 스물다섯이던 형은 쉬지 않고 일을 하면서 밤에는 기능사 시험 준비를 했다.

 

그때 난 비로소 우리 형이 힘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형은 철인이었다. 내가 책 살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돈을 벌어오고, 옷이 필요하다고 하면 옷을 사다 주었다. 쌀이나 반찬이 떨어지면 한밤중에라도 나가 구해왔다. 보나마나 멀리 사는 고향 친구들한테 찾아가 꿔온 것이겠지만, 어쨌든 형은 해냈다.

 

 

그런데 형이 아주 쉬운 영어 문제를 들고 끙끙거리는 걸 보고 처음으로 눈이 시큰했다. 우리 형이 못하는 것도 있구나 싶었다. 형이 영어를 제대로 배웠을 리가 없다. 형은 하는 수없이 내게 영어를 묻고 배웠다. 키 큰 형이 갑자기 작아보였다. 언제나 당당하기만 하던 형이 그까짓 영어 문제 앞에서 주눅이 드는 걸 보고 난 우리 형의 시대가 다 끝났나보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난 그런 형을 돌본 적이 없다. 막일을 하러 나갈 때도 형은 먼저 일어나 밥을 지어놓고, 이렇게 형은 언제나 날 돌보고, 형은 마침내 기능사 시험에 너끈히 합격해 수입도 늘렸다.

두 형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막내동생까지 데려다 대학을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비록 셋이 ‘국졸’이지만 그래도 둘은 대학을 나올 수 있었다.

 

 

- 동생노릇에 익숙해져 늘 뒷전에 서고

 

 

나는 주제넘게도 대학원까지 마치고, 그런 다음에 군대를 갔는데, 그때 논산훈련소까지 나를 데려다준 것도 작은형이었다. 그 이후로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형의 사랑을 받을 기회가 많이 사라졌다. 형이 결혼하고, 내가 결혼하고, 동생들도 결혼하면서 ‘무조건’이던 형제의 정이 아내와 자식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나와 막내동생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한 두 형과 동생은 검정고시 등 갖은 노력을 다해 나름대로 학문에 대한 열정을 풀고, 또한 비교적 잘 살고 있다.

큰형이나 작은형이나 사업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고,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형들이 힘들 때 내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난 언제나 동생이라는 이 천부의 입장을 극복하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도 형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형들은 동생들에게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데, 동생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번 추석에 큰형이 어머니께 용돈을 드리지 못하고 돌아갔다. 어머니는 돈을 못받아서가 아니라 용돈을 주지 못하는 아들을 걱정하느라 잠을 못이룬다. 그러면 동생들이 나서서 무슨 일인가 알아보고, 서로 도울 수도 있겠지만, 그런가 보다, 그러고 만다. 동생이니까 이처럼 생각이 짧다.

 

지금은 어머니 홀로 계신 시골집에 자주 다니는 것도 형들이고, 비 새는 지붕을 고치고 무너진 토방을 고치는 것도 형들이다. 집안일이 생겨도 형들이 나서고, 난 뒷짐지고 있다가 시키는 일이나 맡아 쬐금 시늉을 낸다. 집안일에 돈이 얼마 든다고 하면, 다섯으로 나누어 똑같이 내자고나 할뿐 형들이 이미 치른 희생은 계산하자고 하지 않는다. 나도 이미 중년이라는 말을 듣는데, 형 앞에서는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여전히 ‘동생’으로 살 뿐이다. 염치없는 인간에게 동생이란 말은 얼마나 둘러대기 좋은 핑계던가. 도대체 몇 살이나 돼야 나는 ‘동생’을 극복하고 형이 될 수 있을까.

 

 

- 2002년 가을. 청탁을 받아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