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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내일이면 늦으리 1

파란태양 | 2007/05/19 (토) 19:39

   

내가 존경하는 분 중에 광덕(光德) 스님이 계셨다. 내가 대학 3학년 시절 쓴 처녀작 「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별을 사랑해야 한다(원제 아드반)」를 원고 뭉치째 읽어주신 분이고, 소설가도 구도자라는 덕담을 해 주신 분이다. 그 스님이 작년 봄 훌쩍 열반에 드셨다.

 

그뒤 그 분의 제자가 써놓은 글발을 정리해주다가 몇 번이나 눈물을 지었는데, 마침 마당에 서 있는 진달래 나뭇가지에 꽃봉오리가 숭숭 맺히는 걸 보니 그 생각이 절로 난다. 글발 중에 진달래를 화두로 구도 정신을 일깨워 준 신선한 일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막힌 법문을 널리 알리지 못해 안타깝다. 산길을 오르다가 힘이 들거든 바위자락에라도 앉아 읽어주기 바란다. 그리고 혹 그곳에 진달래가 피어 있거든 바로 독자에게 드리는 이 봄의 선물로 알고 뜻을 새겨 주기 바란다. 이야기는 광덕 스님 시자의 눈으로 시작된다. 

 

내일이면 늦으리 


스님은 한동안 갈매리 보현사에 머물렀다. 보현사는 명산대찰로 이름난 절은 아니지만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非山非野)의 아늑한 언덕에 있어서 스님은 그곳을 편안하게 여기셨다.

10년 전쯤 어느 해던가, 3월 말이나 4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일까 하고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 수좌들하고 산책을 하다가 진달래가 우거진 꽃밭을 보았어. 어떻게나 야단스럽게 피었는지 흔치 않은 광경이야. 지금 와서 한번 보렴.

- 스님, 오늘은 가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일이 많거든요. 내일이면 좋겠습니다.

- 내일이면 늦으리! 오늘이어야 해.


스님의 목소리엔 천진한 소년 같은 정감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리라 마음먹었다.

외출 옷을 챙겨 입으면서 얼핏 생각하니 진달래 꽃구경을 혼자만 가는 것이 미안했다.

그러고서 사무실로 내려가 스님이 진달래 꽃구경하라고 초청했다는 말을 전했다. 마침 합창단이 내려와 있다가 와 하고 달려들었다.


- 우리도 같이 가요.

그날은 합창 연습이 있는 날이고, 마침 연습이 끝난 무렵이었다. 덕분에 꽃구경 일행이 대폭 늘어나서 우리는 모두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다.

스님은 벌써 절 밖까지 나와 있었다. 

보현사 언덕에 서서 그 긴 목을 늘여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봄꽃이란 게 하루하루 빛깔이 다르거든. 그래서 굳이 오늘 오라고 한 거야.”

스님은 우리를 데리고 앞장서서 꽃구경을 나섰다.

나는 어느 때라도 스님 뒤를 따라가면서 길다란 스님의 목과 타원형의 머리를 보면 청순함이 느껴졌다. 그날따라 그 목이 순진무구한 소년처럼 더 청순해 보였다.

진달래꽃이 인정사정없이 마구 피어 있는 꽃언덕에 도달했을 때, 스님이 뒤돌아서서 따라오는 법우들에게 미리 다짐을 두었다.


- 여러분, 입을 크게 벌리지 말아요. 나중에 다물어지지 않아요. 그럼 나 책임 못져요.

그 말씀과 표정이 어찌나 재미있고 우스운지 다들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정말 지천으로 피어 있는 진달래는 토양이 비옥해서인지 꽃잎이 크고 두꺼웠다. 공기가 맑아서 색감도 좋고 한두 그루만 있어서 저 혼자 자태를 뽐내는 것도 아닌, 서로 어울려 온통 골짜기와 언덕에 가득해서 더욱 좋았다.


무척 드문 일이었다. 꽃이 좋다고 소임살이하는 상좌를 불러서 꽃구경을 시킨 일이 내 기억에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진달래꽃으로 보여준 스님의 법문.

지금도 봄이 되어 붉게 피어 있는 진달래만 보면 그때 스님의 소년같은 그 웃음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때 그 진달래 빛깔과 같은지 유심히 바라본다.

도피안사 주변 산야에 핀 진달래빛이 정말이지 하루하루 달라지는 걸 볼 때마다 어디선가 “내일이면 늦으리!” 하는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래서 지금도 “내일이면 늦으리!” 하는 스님의 말씀을 화두(話頭)처럼 받들고 있다.

  

여기까지가 시자가 적은 글발이다.

이 글을 읽은 뒤로는 진달래꽃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작년 봄 진달래가 흐드러질 무렵 이 글을 처음 읽었는데, 오늘 봉오리진 우리집 마당의 진달래를 바라보니 마음이 급해져서 얼른 이 글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녘에 사시는 독자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서울 경기 지역 분들은 아마도 이 신문을 받을 때쯤 활짝 핀 진달래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때’라는 것을, ‘철’이라는 것을 읽는 눈을 얻기 바란다. 선인들 말씀에 처처에 도 아닌 것이 없다더니 참말로 그런 것같다.

  

- 1999년쯤. 어느 신문에 쓴 글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삽화를 포함한 시자의 글발은 '내일이면 늦으리'(도서출판 도피안사)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봄꽃이 필 무렵이면 해마다 갈매리 보현사에 한번 가봐야겠다고 소원하지만 아직 가보지 못했다. 여기 나오는 시자는 지금 안성 도피안사 주지로 있다. 

살다보니 내일이면 늦을 일이 참말 한두 가지가 아니다. 광덕 큰스님의 이 큰 법문을 전해듣고도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끊임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