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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遷都)의 역사 - 수도이전을 반대한다

파란태양 | 2007/05/19 (토) 19:55

 

 

 

 

천도(遷都)의 역사

- 수도이전을 반대한다

 

 

수도는 한 국가 권력의 중심지이다. 옛날 같으면 왕성(王城)이 있는 곳이고, 현대에는 대통령 관저와 국회, 대법원 등 국가 중추 기관들이 자리잡는 곳이다. 최고 권력에 부수되는 수많은 조직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땅값이 비싸지고, 문화와 금융, 교육, 인재 등이 집중된다. 그래서 수도는 그 자체로 국가 이미지를 표현한다. 도쿄는 일본이란 나라를 상징하고, 워싱턴DC는 미국을, 파리는 프랑스를, 런던은 영국을, 베를린은 독일을, 북경은 중국을 상징한다. 국가 경쟁력이 약하면 수도 이미지도 저절로 낮아진다.

그러므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적 규모의 엄청난 대역사이다. 한 개인이 멀리 지방으로 이사를 하는 것도 큰일인데, 하물며 국가의 수도를 옮기는 일은 그에 따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천도를 하는 이유로 가장 좋은 것이야 국세(國勢)가 너무 커져 기존의 수도로는 유동 인구며 물류 등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더 넓고 대외 진출이 유리한 터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천도 배경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가장 흔한 천도 이유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 세력이 지나치게 성장했다고 판단될 때 수도를 옮겨버림으로써 귀족 세력의 자산 가치를 폭락시키고, 근거지를 없애버리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천도는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2002년에 당시 민주당의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당내 합의나 여야 합의 또는 국민적 합의도 없이 선거 캠프에서 선거 전략으로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막연한 ‘충청도 천도론’이었고, 시기와 대상이 빠진 이 공약만으로도 충청도 표를 흡수하는 데 충분히 성공했다. 천도 대상지가 명확히 거론되는 것도 아닌 충청남북도 전체를 아우르는 ‘충청도’라는 그물 같은 말로 제시됨으로써 이 천도안이 결국 정략적 산물임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패인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수도 서울론으로 맞서다 잃은 충청도 표를 계산하고 나면 당선자가 더 가져간 57만표를 거뜬히 넘어선다. 그런만큼 충청도 수도 이전론은 이미 우리 역사의 한 줄기를 바꾸어놓았다. 또 앞으로 무엇을 바꾸어놓을지 알 수 없는 매우 민감한 정치 난제로 부상한 것이다.

이처럼 대선 득표를 위한 아이디어로 시작된 수도이전론은 국민적 합의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추진되었고, 이제는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역시 충청도 유권자를 의식한 여야가 두말없이 수도이전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제법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후보지도 없이 무작정 옮긴다는 데도 이상하리만큼 야당의 반발이 없다. 여소야대 정국이 다시 이루어진 다음에 반발하려고 그러는지, 일단 충청도 표가 무서워 그런지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어도 국회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국운이 걸린 수도이전을 표를 더 얻기 위한 특정인이나 특정 정당의 득표전략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그 타당성이야 전문가들이 짚어줄 일이고, 여기서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줄곧 있어온 천도의 역사와 이유를 되돌아봄으로써 역사를 현실의 거울로 삼아보기로 한다. 현실 정치 과제의 대부분은 반드시 역사 속에 그 답이 있다.

 

 

- 북방 민족의 기상을 버린 고구려의 천도

 

 

고구려의 경우 맨먼저 도읍했던 졸본성은 북방 기마 민족의 터전이다. 여름철 기온은 한반도와 다름없고, 일조 시간은 오히려 더 길다. 겨울이 길기는 하나 농사 짓는데 별 지장이 없고, 특히 목축을 하는 데는 아주 좋은 지역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동몽골, 러시아 연해주 일대, 남만주 등을 장악할 수 있고, 요동벌까지 진출이 가능하다. 이곳은 원래 수많은 대륙 국가를 탄생시킨 명당이기도 하다. 여기서 금나라가 일어나고, 선비족이 일어나 한 시대를 풍미했다. 칭기즈칸이 세계 정복자가 된 배경에도 북부여의 동몽골 땅이 큰 힘이 되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회령부가 금나라가 처음 일어나 수도를 정했던 곳인만큼 농업보다는 수렵이나 유목이 더 중시되던 땅이다. 기마군이 양성되기에는 정말 알맞은 땅이다.

그러다가 서기 3년 훨씬 남쪽 지방이자 압록강을 끼고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했고, 고구려는 여기서 425년간 머물렀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꽤 오랜 기간 수도로서 위용을 자랑했다. 압록강변의 풍부한 물산과 선비족 같은 북방기마민족의 공격선에서 멀찍이 떨어졌다는 점, 요하를 다스리기 유리하고, 한반도를 넘보기 좋은 자리라는 등이 장점으로 작용한 듯하다. 이 유역이 세력을 떨치기 좋은 지역이라는 것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등이 이곳을 발판으로 동북아시아와 중국 북방 지대를 주름잡았고, 또 같은 지역에서 누르하치와 홍타시의 청나라가 발흥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곳에서 서쪽인 심양이나 북경 등으로 진출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중심에 속하는 땅 평양을 바라보았다. 한강 유역이 탐나서 그랬던 모양이다.

서기 427년 장수왕은 남진 정책의 일환으로 국내성을 떠나 평양성으로 천도하는데, 귀족 세력 숙청 등 나름대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지만, 이것은 고구려가 북방 대륙 국가에서 반도 농경 국가로 스스로 체위(體位)를 낮추는 결과를 불러왔다.

 

 

역사적으로 강대한 나라들은 대부분 공격적으로 천도를 했다. 천도 자체가 국가 발전의 초석으로 작용한 사례는 상당히 많다.

북만주에서 세력을 기른 다음 북경으로 남진하여 수도를 정한 금나라는 거란을 불모의 유라시아로 내쫓고, 송나라를 남방으로 밀어내 약소국가로 전락시켜버렸다.

유럽을 공격하기 위해 서쪽 카라코롬으로 천도한 몽골의 오고타이칸은 이곳에서 대군을 발진시켜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으로 강역을 넓혔고, 수많은 나라의 왕과 사신들이 카라코롬으로 몰려들도록 만들었다.

후계 문제로 제국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에서 몽골의 쿠빌라이칸은 북경을 새 수도로 선언하면서 그때까지 몽골의 수도였던 카라코롬을 배경으로 항거하던 경쟁 세력을 뿌리치고, 중국 역사상 가장 세계적이며 강력한 왕조인 원나라 시대를 열었다.

농민 반란군으로 중국 남부를 장악하여 남경에 명나라 수도를 정했다가 몽골군 거점이자 거란, 금나라 등 정복자들의 수도였던 북경으로 천도한 태조 주원장은 몽골 기마군에 정면으로 맞서 한족의 나라를 부흥시켰다.

만주 일대를 장악한 뒤 수도 심양을 버리고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진출, 정복국가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와 홍타시는 금나라에 이어 또 한번 여진족의 힘을 과시했다.

막부가 무너지면서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한 일본 국왕 메이지는 왕권을 되찾고 국력을 크게 신장해내고, 일본을 근대국가로 변모시켰다.

 

 

이런 천도 사례에 비하면, 고구려의 평양성 천도는 스스로 국가의 미래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불러왔고, 결국 고구려의 최후도 평양성에서 맞이하였던 것이다.

역사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지만,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시절 심양 근처로 천도를 했더라면, 삼국시대 이후 수많은 왕조가 부침하던 중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고, 이 혼란을 종식시킨 송나라를 대신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고구려는 삼국지연의에도 나오는 황하 유역의 유주 땅을 점령하고 그곳에 자사를 파견하는 등 황하 유역을 지배했었지만, 수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중원까지는 들여다보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1977년 북한의 전쟁 위험 때문에 공주 천도를 결심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백지 계획’은 단견이었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위험에 노출되는 만큼 각성이 따르게 되고, 안전해지는 만큼 나태해지기 때문이다. 그때 천도를 하지 않았어도 서울은 비록 휴전선에서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고도 성장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더구나 일본이나 미국까지 미사일 공격 범위에 들어 있는 상황에서 코앞인 한반도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안전지대란 있을 수없다. 위기를 피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지만, 싸워이기든지 극복하느니만은 못하다.

 

 

- 고구려에 쫓겨다닌 백제의 천도

 

 

위기를 피해 도망다니는 천도의 예는 백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건국 시기부터 결국 고구려에 쫓겨 내려온 것인데, 그나마도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 또다시 공주의 웅진성으로 쫓기다시피 천도했다. 천도 직전,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은 고구려군에 점령당하고 심지어 개로왕까지 피살됐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지 50여년 만인 서기 475년의 일이다.

그뒤 백년도 안된 538년에 백제 성왕은 웅진성에서 다시 사비성으로 천도를 한다. 이때는 한강 유역을 일부 수복했을 무렵이고, 일본이나 중국 대륙의 나라들과 해상 교류를 하기 좋은 부여의 사비성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단견이었다.

북방의 위험을 방치하거나 피한 채 남방을 아무리 많이 장악한들 그 말로는 뻔할 수밖에 없다. 백제는 이후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는다든지 외교적인 수단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지만,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가 일본에 담로를 설치하고, 중국 동부에 담로를 설치하고, 동남아시아에 담로를 설치했다는 주장을 다 받아들여도, 본국 백제의 누대의 근심인 고구려를 제압하지 못하고는 사상누각일 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던 신라가 오직 살아남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도리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부러 위기를 잊으려 하거나 피하는 것은, 적어도 국가를 경영하는 차원에서는 금기 사항이다.

 

 

- 한 자리에서 영광과 굴욕을 겪은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의 경우는 건국 이후 경주 한 자리에 수도를 정한,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나라다. 그것이 신라를 지방 국가로 축소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한 국가가 반드시 대국으로 발전할 필요는 없지만, 국력을 얻을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치우친 지방 정권에서 벗어나 좀더 발전적인 계획을 세운 적이 한 차례 있었다. 시기적으로 가장 좋은 삼국통일 후였다. 통일 전쟁에 앞장섰던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즉위 9년째인 689년 대구로 서울을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아마도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세력이나 그간의 진골 등 귀족 세력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강력한 왕조를 세우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도에 실패했다. 천년 왕도에 걸맞는 진골 등의 수구 세력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들은 신문왕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결과 통일신라는 935년 멸망할 때까지 수많은 내분에 휩싸여 대륙 진출은커녕 내부 안정조차 이루지 못했다. 통일 무렵 과감히 천도를 하고 왕조를 다시 세웠더라면 신라의 역사는 달라졌을 테지만, 그뒤의 신라는 사실상 경주 일대나 지배하는 토호 세력 집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 천도를 거듭한 발해의 서울

 

 

고구려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재건해낸 발해는 건국 초기 네 차례나 천도를 했다. 그만큼 정정(政情)이 불안했다는 뜻이다.

698년 고구려 부흥 세력들은 동모산에 처음 근거지를 틀었고, 약 40여년만인 740년에는 서고성으로 천도를 하는데, 이때는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에 수도다운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옮긴 듯하다.

그러다가 불과 15년만에 755년 흑룡강 유역의 상경성으로 북진(北進)해 서울을 삼았고, 그로부터 30년만인 785년에는 팔련성(혼춘)으로 가 8년여 머물다가 793년에 다시 상경성으로 돌아갔다. 926년 멸망할 때까지 그곳을 서울로 삼았으니 상경성이 수도로서는 가장 명이 길었던 셈이다.

하지만 발해는 동북 지방에 치우쳐 있어 중국의 급변하는 정세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그랬기 때문에 신흥세력으로 일어난 거란에게 어이없이 멸망당했던 것이다. 발해가 멸망한 배경으로 화산 폭발이나 대기근 등의 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어 개념으로만 수도를 정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요하 지방을 소홀히 다루었고, 그 결과 그 땅에서 같은 북방 민족인 소수민족 거란이 발흥하여 도리어 뒤통수를 맞았던 것이다. 거란족은 발해가 결심하기만 했다면 얼마든지 미리 제압할 수 있던 작은 민족이었다. 그러나 변방 국가를 자처한 발해로서는 중원의 흐름을 보지 못했고, 그 틈을 타 거란이 일어나는 국제 정세를 민감하게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는 심양이나, 그도 아니라면 국내성 정도의 위치로 천도를 했어야 고구려의 진정한 계승자로 자임할 수 있었으나 끝내 그러질 못했다. 오죽하면 고려에 쳐들어온 거란이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 서경 천도에 실패한 뒤 무너진 고려 왕조

 

 

발해와 함께 남쪽에서 일어난 궁예는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를 버리고, 고구려의 평양성과 백제의 한성(서울) 중간 지점인 철원에 수도를 정했다. 그러나 궁예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왕건은 여러 군데에 흩어진 호족 세력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근거지인 개경에 수도를 정해야 했다.

개경은 경주나 웅진, 사비에 비해 대륙 국가의 부침에 비교적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대륙으로 웅비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다보니 거란과 여진, 몽골의 연이은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묘청이 평양성으로 천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자겸의 난 등으로 왕권은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그대신 문신(文臣)들의 권력은 지나치게 강화되어 군대의 사령관조차 붓을 든 문신이 장악할 정도였다.

왕의 묵인으로 묘청은 평양 천도를 추진했고, 이들 천도파는 고려 국왕은 황제이며 연호를 써야 하고, 금나라를 상국으로 모실 게 아니라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개경을 장악한 문신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천도를 막았고, 천도파는 평양에 궁성을 짓고 천도를 계속 추진하다가 1135년 김부식 등의 개경파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이 결과 고려는 문신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이후 문약(文弱)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더 나아가 무신의 난이 일어나는 배경을 만들어놓았다. 이때 고려 왕조는 실질적으로 무너진 것이다. 무신 정권의 실력자가 정하는 대로 왕이 되기도 하고 폐위되기도 했으며, 그뒤에는 몽골의 의지에 따라 즉위와 폐위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무신들이 장악한 고려 조정은 이후 몽골군의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강화도로 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을 해야 할 무신들이 조정에서 문신들의 업무까지 장악하다보니 문약(文弱)만큼이나 무약(武弱)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무인의 기상을 잃어버린 이 유사(類似) 무인 정권은 침략자와 싸워 이기는 길을 버리고 피해서 보신하는 길을 선택했다.

몽골군이 물을 싫어하고, 배 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군부 세력은 수전(水戰)으로 맞서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바다를 사이에 둔 강화도로 피신할 생각이나 한 것이다. 말이 좋아 천도지 강화 천도는 군부 세력들이 자신들만의 안녕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피난에 불과했다.

강화도 천도는 강화도만은 안전할지라도 그 나머지 국토는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고스란히 짓밟히도록 포기하는, 마치 부도를 낸 회사를 청산하듯이 사주가 손을 빼는 꼴이 되고 말았다. 몽골군은 주인없는 고려 전역을 마음껏 유린하고 다녔고, 수많은 문화유적이 파괴되고 불에 타고, 백성들은 죽거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 사이에도 강화도에서는 전쟁터에 나가 있어야 할 군부 귀족들이 사치스럽게, 여유있게 살았다.

고려는 몽골군을 전쟁으로 극복한 것이 아니라 군부가 조종하는 태자를 쿠빌라이에게 보내 가까스로 강화를 맺고, 이후 속국을 자처했기 때문에 겨우 불에 타버린 도읍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뒤 우왕과 공민왕대에 각각 한 차례씩 한양으로 천도를 시도했지만, 워낙 왕권이 미약할 때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 한양 시대를 연 태종 이방원

 

 

고려의 무능한 왕권을 바로잡은 사람이 이성계다. 이성계는 고려시대를 이어온 무인 정권의 마지막 실력자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경대승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임연으로 승계되다가 몽골군의 개입으로 무인 정권이 종식되고 왕권이 살아났다. 하지만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쇠약해질 무렵 재차 등장한 군부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무인 정권으로 등장했고, 이성계는 최씨 무인 정권처럼 따로 왕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는 귀족 및 수구 세력들을 제거하고, 친위세력을 새로 형성하기 위해 즉위 후 2년만인 1394년 과감히 개경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왕자의 난 등 불길한 사건이 연거푸 터지자 정종은 개경으로 환도했고,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은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했다. 고려 시절부터 따지자면 네 번째 천도시도였고, 비로소 한양은 국도(國都)로 자리잡았다.

아버지 이성계도 뜻을 이루지 못한 한양 천도를 힘으로 밀어부친 태종은 왕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종조의 화려한 문치를 이뤄낼 수 있었다.

다만 고구려계가 한국인의 주류라고 가정할 때, 국도(國都)가 만주대륙에서 압록강변으로, 평양으로, 개경으로, 한양으로 줄곧 남하하기만 한 것은 우리 역사가 대체적으로 세계적인 안목을 갖지 못한 지역사로 머무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충청도로 또 천도한다니,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밀려 서울에서 쫓기다시피 그 충청도로 떠밀려내려간 백제가 자꾸만 떠오른다. 표 계산하다 흐지부지될지라도 당장은 걱정이다.

 

 

- 2004년 초 <주간주선>

난 충청도를 고향으로 둔 사람이지만 국익을 위해 수도의 남천을 반대한다. 나는 우리 수도가 북한 미사일의 사정거리 내에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발전했다고 믿는다. 생각같아서는 휴전선 근방으로 더 올라가도 상관없다. 긴장하지 않는 나라는 반드시 망하는 걸 역사에서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피하고 숨고 도망치는 놈은 반드시 실패한다. 그나저나 표나 얻으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페인트모션(faint motion)에 우리 국민들 어지간히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