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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새 집을 지어 드리며

파란태양 | 2007/05/19 (토) 20:21

 

 

 

어머니께 새 집을 지어 드리며

 

 

엊그제 동네 어른 중에 혼자 살아온 아저씨가 죽은 지 하루만에 발견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늘 나오던 마을회관에 나오질 않아 늙은 친구들이 가보니 이미 숨진 뒤더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 어머니도 혼자 사시기 때문이다.

이러다 어머니에게 자그마한 발작이나 마비, 체증 같은 것만 와도 속수무책으로 변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은 이런 위험을 잘 느끼지 못한다. 내 자식 손톱에 가시라도 끼는 날이면 약국으로 병원으로 부지런히 다니지만, 어머니가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내셨는지 챙겨보는 것조차 잊기 일쑤다.

 

이 연배의 다른 노인들이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어머니는 골다공증이며 류머티스 따위를 앓고 있으며, 잇몸이 부실하여 틀니를 하고 있고, 혼자 밥을 해먹고 혼자 설거지해야 한다. 당신이 이부자리를 깔아야만 누울 수 있고, 물 한 잔 마시고 싶어도 무거운 몸 일으켜 기어이 냉장고를 열어야 한다.

자식들이 바람처럼 왔다가 훠이 떠나갈 때 쓰레기며 빈 그릇 따위로 집안을 어질러 놓으면 어머니는 밤길 늦겠다며 그냥 두고 가라고 하시지만, 그것도 모르고 자식들이 부웅붕 시동을 걸어놓고 걱정하면 “누가 하겠니, 내 손모가지로 해야지.” 하던 그 서글픈 표정이 속을 엔다.

 

돌아가신 아버지께는 더한 죄를 지었다. 운신을 못하던 그때 우리 형제들은 화장실을 지어주지도 못했다. 한겨울에도 방에서 나와 마당을 지나 재래식 화장실로 가야만 하셨다. 기껏 해본 것이 의자식 간이 용변기를 만들어 드린 것뿐이다.

부모님 나이를 계산하면서 큰돈 들여 집을 지어봤자 누가 살겠느냐는 짧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식 집에 얹혀살겠다는 분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혼자 남으셨을 때는 이제는 큰아들이 사는 대전으로 나가시겠지 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다 쓰러져가는 집을 붙들고 버티셨다.

 

자식들 입장에서야 도시로 나가 아파트 생활을 하시면 매일 안부 전화 할 필요 없고, 형제 중 누가 지켜줄 테니 안전하고 걱정없어 좋으리라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도시는 숨이 막혀서 못산다고 딱 거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회관이라는 것이 현대식으로 세워지면서 우리 어머니처럼 혼자 살거나 혹은 부부 둘만 사는 노인들이 모여 오순도순 사는 재미가 있으시단다. 농한기인 여름이나 겨울에는 회관에서 점심을 먹는 모양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모여 돌려가며 밥을 짓거나 나이가 비교적 젊은 ‘60대 아주머니’들이 잔심부름을 해주기 때문에 소화도 잘되고, 낯선 아들네 가서 사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형제들은 생각을 바꿨다. 낡은 집에 사는 어머니를 위해 김치냉장고를 사다 바치고, 휴대폰을 갖다 드리고, 스카이라이프를 달아드리고, 옥매트에 무슨 건강기구 따위를 들여놓는 것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는 수없이 형제들이 돈을 모아 새 집을 짓기로 했다. 어머니 연세를 감안하면 경제적인 결론은 아니다. 우리 형제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고향에 가 산다면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짓기로 했고, 아버지 기일을 디데이로 잡았다. 새 집에서 하루를 사시더라도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 어머니의 새집은 2004년 봄에 착공하여 2005년 설 무렵에 완공했고, 어머니는 매우 흡족하시단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는지(돈 문제라면 돈 많을 때조차), ‘쥐새끼가 내 동무다.’, ‘이러다 족제비 쳐 죽는다’(낡은 고택이 족제비를 잡는 덫 같다는 어머니의 비유. 우리 어머니는 무슨 표현이고 에둘러 말씀하시지 않고 직설하신다.)는 호소를 듣고서야 겨우 집을 지어드렸으니 지금도 그 말씀을 떠올리면 등골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