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태양 | 2007/05/26 (토) 23:16
구업을 짓다
무슨 축제 뒤풀이에 갔는데 누군가 ‘하늘 앞에 부끄러워 해라, 하늘을 우러러 떳떳해야 한다’고 힘주어 주장했다. 그는 옛날 왕들이 하늘을 향해 초제(醮祭)를 지냈다는데 이제는 민중이 초제를 지내는 시대라고 하면서 그 설명 끝에 이런 말을 던진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하늘이다, 우리 모두 하늘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가 비약(飛躍)하는데 도무지 땅을 밟을 것같지 않아 내가 나섰다.
나도 어지간히 바보 같은 것이, 그네들은 대부분 술에 취해 무슨 말인가 열렬하게 늘어놓다가도 마무리가 되기 전에 갑자기 샛길로 빠져 금세 다른 얘기로 혼전을 벌이곤 했다. 대체 그런 분위기에서 나까지 왜 나섰는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그러나 난 진실이 아닌 말이 내 귀로 흘러들어오는 게 싫고, 그런 말을 듣고도 침묵하면 내가 수긍하는 것으로 오해될까 봐서(차라리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게 아닌데), 그러니 말한 사람이 그 거짓을 도로 담아가라는 뜻으로 입을 열었다.
난 내가 무슨 일을 하든 하늘에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가족에게 부끄럽고, 부모님께 부끄럽고, 날 아껴주는 어른들께 부끄러운 적은 있었다.
그랬더니 좌중 왈, 하늘을 모독했다는 투로 이런저런 격한 말이 내 말을 막고 비틀어 댔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없어 내 하늘이 다르고 네 하늘이 다르고, 저 하늘이 다른데 무슨 하늘 앞에 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최제우의 ‘한울’이 있고, 북방유목민의 ‘쿠쿠 텡게리(靑天)’가 있고, 도가와 중국 황제들이 섬기던 천(天 ; 上帝)이 있고, 불교의 수많은 천(天; 도솔천, 도리천 등등)도 있잖은가.
그러고나서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하는 그네들에게 늘 머릿속에 잠겨 있던 말 한 마디를 던졌다. 나는 진실이 두렵지 진실이 아닌 것은 두렵지 않다고.
- 진실만이 가장 빠른 길이다
이 말은 가슴 속에 말칼로 새겨놓은 나만의 좌우명이다.
하지만 좌중은 ‘진실만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내 말에 그야말로 0.1초도 머물지 못하고 금세 다른 주제로 몰려가서 열띤 토론을 벌여댔다. 허, 내게는 좌우명이 되는 이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잠시잠깐도 머물지 못하고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지다니.
나는 그들이 하늘이란 막연한(제멋대로 해설될 수 있는) 단어에 아름다운 꽃이며 미사려구를 걸어놓고 온갖 정의와 도덕을 갖다퍼붓는 게 정말 보기 싫었다. 그런 하늘은 우상(偶像)일 뿐이다. 기복(祈福) 신앙과는 비교조차 할 수없는 오만한 신념이 아닐 수 없다. 하늘 앞에 성스럽다,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함부로 붙이는 걸 보면 마치 눈먼 정치세력들이 저희들의 ‘주군(主君)’을 향해 갖가지 충성스런 찬사를 남발하는 게 연상되어 기분이 유쾌하질 않았다.
이 날의 토론은 ‘하늘’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느닷없이 불교 얘기로 옮겨붙었다. 누가 깨달았다느니 누가 사기꾼이라느니 저희들 마음대로 활을 쏘아대고 칼을 내리치고 상을 내렸다. 당대의 우리 대선사들이 그네들 세 치 혀끝에서 튀는 침처럼 마구 부서졌다.
그래서 내가 또 나섰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종교다. 그러니 부처님 한 분만 생각하자. 부처님의 말씀이 틀리면 그걸 틀렸다고 말하고, 그게 옳으면 옳다고 하면 된다. 부처님이 하지 않은 일을 갖고 불교를 모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즈음의 불교 의식에 부처님이 전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수행자들의 삶에 부처님이 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게 틀렸으면 스스로 ‘루터’가 되어 부처님의 근본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렇건만 나는 그들의 입을 혼자 다 막아내지 못했다. 그들의 말을 다스리지 못했으니 도리어 내가 구업(口業)을 지은 것이다. 그래도 외쳐볼란다. 진실만이 가장 빠른 길이다!
- 2004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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