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태양 | 2007/05/26 (토) 23:20
내 작품에 불교 소재가 자주 보이는 까닭은
내 작품 연보를 본 적이 있는 독자들은 나와 불교의 관계를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극대의 상상 세계를 논하는 화엄경 입법계품을 한번 더 상징적으로 그려낸 “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별을 사랑해야 한다”는 순수한 감성과 젊은 열정을 가지고 있던 대학 2학년 때 쓴 장편소설이고, 그뒤 1993년에는 극미의 세계를 징그러울 정도로 깨부수는 금강경을 “소설 금강경”을 그려보았다.
비소설이지만 “목불(木佛)을 태워 사리나 얻어 볼까?”(요즘에는 깨달음의 노래, 해탈의 노래란 제목으로 경기신문에 연재중이다)라는 선사(禪師) 140여명을 깨닫게 한 공안(公案)과 오도송 임종게를 오일팔 광주항쟁으로 쉰 대학 3학년 시절에 쓰기도 했다.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소설 黨聚”는 휴정, 유정을 비롯한 승장(僧將)들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평양성에서 왜적을 물리친 휴정․유정의 승군 1500여명, 행주산성에서 대첩의 주축이 되었던 처영의 호남 승군 약 2500여 명, 청주성을 수복하고 금산벌 전투에서 전원 전사한 영규의 충청 승군 약 800여명, 진주대첩을 지원한 가야산 신열의 승군 수백 여명, 이순신 휘하의 수군으로 참여한 흥국사 승군 약 1500여 명 등의 빛나는 전과를 처음으로 밝혀내기도 했다.
불교라는 이름을 드러내놓고 쓴 소설은 이 정도지만 실상 내 소설은 모든 작품이 다 불교적 소재가 많이 들어간다. 나를 아는 일반인들이 내 대표작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소설 토정비결”의 경우 나레이터가 승려이며, 그밖에 여러 스님이 등장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6년에 발표한 “갑부”의 경우 불교적 사유 체계를 일반화시킨 소설로 불법을 부도(富道)라는 개념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것을 2003년에는 재벌 2세가 돈 문제로 고민하다 출가 수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는 스토리로 “富子”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독자들께서는 어쩌면 내가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뭔가 불교와 관련있는 집에서 태어났으리라고 믿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불교 신자는 아니다. 1년에 딱 한 번 부처님오신날에 어머니가 동네 무당절을 다니긴 하지만, 그건 무속이지 불교가 아니다. 더러 시골에 있는 작은 절에 가서 자식들 사주도 보고 신수도 보는 모양이지만 역시 불교와는 관련 없는 점집들이다. 딸아이는 외갓집 영향을 받아 절에도 잘 가고 교회에도 잘 가는데, 누가 밥 먹을 때 기도하고 먹자고 하면 “부처님한테 해요, 하느님한테 해요?” 하고 묻는 형편이다.
막상 이유를 찾자니 생지(生知)라는 말이 떠오른다. 태어나면서부터 다 알고 나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내 경우 불교적 정서면에서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것으로 몸에 배어 있었던 듯하다. 누가 시켜서 절에 가 본 적도 없고, 누가 권해서 불교 책을 읽은 적도 없다. 내 발로 절에 갔고, 내 손으로 책을 사서 읽었다. 그뿐 누구도 나한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죽자마자 가족들이 부르짖는 금강경이나 지장경을 들어야만 할 독실한 불교 신자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다 제쳐두고라도 우리나라나 동양권에서 소설가로 살려면 불교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불교를 몰라가지고는 건성건성 겉이나 훓어가며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님 한 분 안나오는 사극이 없는 것처럼 대부분의 역사소설에는 불교 설화나 절, 스님 등이 자주 나오게 된다.
동양 문화에 파고든 불교의 뿌리는 굵은뿌리, 잔뿌리할 것없이 어마어마하다. 봉건시대 작가들이 유교의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었듯이 오늘날 불교 상식 없이 소설, 그것도 나처럼 역사소설을 주로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따로 시간을 내어 불교 공부를 했고, 지금도 하는 편이지만 딱히 직업적인 이유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깨닫기 위한 수행법이 많기도 하겠지만, 내 수행법은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해탈을 추구하고, 그러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그러므로 내 글이란 내 사유의 흔적이요 그림자다.
불자 중의 작은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부처님께서 의지하라던 그 법(法)을 베고 싶고 거기에 눕고 싶다. 그러자니 그 법을 알기 위해 펜을 들이대고 살살 까보지 않을 수 없다. 지극한 정성으로 치곡(致曲)하다 보면 글도 되고, 법도 되리라고 믿는다.
- 언젠가 불교신문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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