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태양 | 2007/05/26 (토) 23:25
개성(開城) - 고려․몽골 애증의 현장
1. 한국 역사상 최대의 국제 도시
개성(開城)은 신라 말기 풍수지리설의 원조(元祖)라는 도선 스님이 자리를 정하면서부터 고려 왕도 송도(松都)로 받돋움했다. 고려 국왕은 중국의 황제와 똑같은 궁중 용어를 사용했다. 개성 즉 개경은 모든 면에서 천자(天子)의 국가로서 위의를 갖춘 황도(皇都)였다.
고려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의 외침을 받기는 했으나 조선에 비해서는 드높은 자주국가로서 그 이름이 세계에 알려진 나라이다.
또한 개성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이 한 국가로 통합되어 처음으로 정한 수도이다. 신라는 형식적으로는 삼국을 통일했다지만 실상 고구려를 통째로 잃어버렸으니 삼국통일이라고 말하기에는 쓸쓸한 점이 너무 많다. 나당(羅唐) 연합의 목적은 신라는 백제를, 당은 고구려를 나눠 갖는 데 있었고, 또 그렇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건이 처음 도읍한 개성은 과거 신라와 백제 지역을 아우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북쪽으로 옛 고구려 땅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는 근거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높다. 이후 압록, 두만 두 강을 넘어가지는 못해 고구려 강토의 많은 부분을 아직 수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때 일시적이긴 했어도 전체를 다 수복한 경우도 있었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된 이후 몽골은 심양에 심양왕이라는 고려인 제후를 두어 만주 전역을 통치하게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심양왕은 고려 왕족이었다. 그때 역사와 민족에 대한 인식이 조금만 더 깊었더라도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직하거나 통합하는 외교를 벌였다면 어렵지 않게 고구려 땅을 수복할 수 있었는데, 그게 아쉽다.
적어도 고려 후기의 수도 개성은 요즘의 서울 못지 않은 국제도시였다. 세계의 다양한 인종이 드나들고 무역상인들이 들락거리는 활발한 도시였다. 결코 조선의 한양처럼 폐쇄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조선 역사에 가려 개성 시대의 고려 풍속을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문화적으로도 세계 최첨단을 달렸다.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 들어가 출세한 사람이 많아서 그들이 들여오는 재화(財貨)도 적지 않았다.
이제 고려와 몽골에 대해 기본적인 정의부터 내리고 개성을 다시 보자.
고려는 삼국시대를 마감한 신라를 뒤이어 출현한 나라다. 태조 왕건이 얼마나 깊은 뜻으로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분명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다. 그래서 고구려 후예를 자처하는 발해 유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또 고구려의 백성이었다는 여진족 부족장들로부터 철마다 조공을 받고 선물도 주었다.
시각을 조금만 달리 해 고구려의 관점에서 보자면 몽골도 사실 역사적 예외가 될 수 없다.
오늘날 칭기즈칸이 태어난 동몽골 지역이나 칭기즈칸을 낳은 어머니 호엘룬과 칭기즈칸의 부인 볼테가 태어난 옹기라트부 인근에서는 고구려 초기 성터가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석상이 서 있는 곳도 그곳이다. 물론 칭기즈칸이나 옹기라트부 사람들이 모두 고구려 후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그곳 어디선가 발흥한 고구려, 혹은 부여의 역사하고 뭔가 닿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고려, 거란, 몽골, 여진족 등은 비록 나라는 갈려 서로 다른 왕조를 세우고 있지만 그 근본으로 가면 고구려라는 같은 연원(淵源), 어쩌면 옛 조선(朝鮮)이라는 같은 줄기에 닿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와 몽골의 만남이란 오늘날 남한과 북한이 한 오백년 가량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는 것과 같다고 볼 수도 있다.
2. 고려와 몽골의 만남
개성이 몽골군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몽골군에 쫓겨 고려 땅으로 도망쳐온 거란족 반란군 때문이었다. 몽골군은 그들을 뒤쫓아 고려 경내로 들어왔고, 이때 고려와 몽골 간에 국교가 처음 열리면서 여몽연합군이 이들 거란족을 섬멸하였다. 이것이 1219년의 일이다. 이 무렵 칭기즈칸의 기세는 날로 강하여져 금나라뿐만 아니라 서하, 위구르 등 인근 국가를 차례로 병합하였다. 고려에서 만일 몽골군의 기세를 충분히 이해했거나 처음부터 유화책을 썼다면 고려는 좀더 일찍 세계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특히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휘하의 여진족 병사 41명을 의주에 남겨두면서 고려말을 익히라고 한 데서 장차 몽골군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그러나 고려는 무신 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급박한 국제 정세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224년, 그러니까 몽골군이 고려에 들어와 거란 반군을 내몰아준 지 5년 뒤에 문제가 생겼다. 그 사이 칭기즈칸은 서정(西征)에 들어가 호라즘 등 아랍권을 정벌중이었다. 그때 몽골 고원을 지키고 있던 칭기즈칸의 막내동생 테무게가 저고여란 사자를 고려에 보내왔다. 이 사자가 돌아가던 길에 그만 피살되었다. 이후 고려와 몽골 간에는 지리한 외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금나라와 남송 정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칭기즈칸은 고려 정벌을 미루었다. 그러다가 칭기즈칸이 죽고, 이후 금나라와 남송이 차례로 멸망하면서 관심의 초점은 고려로 옮겨졌다.
1231년, 칭기즈칸을 이은 오고타이칸은 살리타이를 장수로 하여 고려 정벌군을 보냈다.
살리타이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지금의 義州)을 포위했다. 그러자 고려 장수 조숙창(趙叔昌)은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조숙창에겐 나름대로 다른 계산이 있었다. 그의 부친 조충(趙冲)은 지난 1219년, 야율유가의 후요(後遼)를 무너뜨리고 도망다니던 거란족들이 고려의 강동성에 쳐들어와 농성할 때 몽골군 장수 합진(哈眞)과 연합군을 편성해 함께 싸운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몽골-고려 두 나라는 국교를 맺고, 양측 장수 대표인 합진과 조충은 의형제를 맺었다. 몽골식으로 안다(義兄弟), 그러므로 조숙창에게는 합진이 곧 의부(義父)인 셈이었다.
살리타이는 조숙창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함신진은 내처 지나갔다. 살리타이군은 다음 목표인 철주(鐵州;지금의 鐵山)로 향했다. 철주성은 공성(攻城) 실력이 놀랍도록 향상된 몽골군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다. 판관(判官) 이희적(李希勣)은 몽골군에게 탈취당할 물건들을 모아놓고 불을 지르고는 본인도 자결하였다. 그때 부장 홍대순(洪大純)과 홍복원(洪福源)은 성문을 활짝 열어 몽골군을 맞아들였다.
그때 고려에서는 김경손(金慶孫) 장군이 여러 부장과 주변의 정주, 삭주, 위주, 태주의 수령들을 불러모아 항전을 결의했다.
그 무렵 북계(北界)의 분대 어사로 있던 민희(閔曦)가 최계년이라는 판관과 함께 살리타이를 찾아가 고려에 쳐들어온 이유를 따졌다.
살리타이는 젊은 관리 두 사람의 당돌한 방문을 받고 비공식 회담을 가졌다.
민희는 회담을 마치고 조정에 돌아가 실권자 최우에게 정황을 보고했다. 그래서 민희는 고려 군부가 시키는 대로 또 살리타이를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살리타이는 최우 정권의 강화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신 저고여 피살건은 이렇게 어물쩡 넘어갔는데, 문제는 살리타이측이 요구하는 공물이었다. 그가 보낸 목록은 입이 다 벌어질 만했다. 고려를 다 털어도 나오지 않을 만큼 종류도 가지가지에 양도 많았다. 말로는 공물을 보내면 마땅히 그에 상당한 희사 물품을 보낸다고는 하지만 고려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몽골측의 요구 목록은 이러했다.
- 금, 은, 의복을 말 2만 마리에 실어보낼 것.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 말 1만 마리에 실어보내도 됨.
- 진자라(眞紫羅;비단) 1만 필.
- 수달피 230 마리분.
- 큰 말 1만 필, 작은 말 1만 필.
- 공주,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귀국의 왕족과 대관의 자제들 중 남자 천 명, 여자 천 명을 보낼 것.
고려는 공물 목록을 대폭 줄여서 사신에게 건네고, 사신 당쿠에게는 뚜껑에 고려 국왕을 상징하는 봉(鳳)을 새긴 청자 주전자와 술잔 받침 한 벌, 세저포(細紵布) 두 필, 붉은 말 한 필, 은으로 장식한 말 안장을 선물로 주었다.
며칠 뒤 사신 당쿠는 살리타이의 재가를 받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몽골의 예물이라면서 황금 70근, 은 1천 3백근, 유의(襦依) 1천 벌, 말 170 필을 가져왔다. 고종 이하 고려 대신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것도 비록 오고타이칸의 이름을 빌기는 했지만 살리타이 개인이 보낸 것이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가 살리타이에게 보낸 공물은 황금 12근 8량, 무게 일곱 근 나가는 황금 주전자, 은 29근, 무게 437근 나가는 은주전자, 은병 116개, 사라금수의(紗羅錦繡衣) 16벌, 은으로 장식한 허리띠, 수달피 75매, 금장식 안장을 얹은 말 한 필, 보통말 150필이었다. 그런즉 주고받는 물건에 엄청난 차이가 났다.
이문을 단단히 본 고려 조정은 이번에는 먼길까지 온 살리타이의 처자와 휘하 장수들을 위한 것이라면서 좀 더 내놓았다. 그게 금 49근 5량이었고, 대충 그런 비율로 양을 맞추었다. 다 합치면 살리타이한테서 받은 물품과 대략 비슷했다. 이 협상 과정에 실은 맨 먼저 항복하여 살리타이군을 반겼던 조숙창이 애를 많이 썼다고 하여 고려는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살리타이군을 동행하여 배웅하라고 배려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살리타이군은 1232년 1월, 그러니까 전년도 8월에 왔으니 반 년만에 그다지 요란하지 않게 있다가 물러갔다.
3. 몽골군 사령관의 사망
그러나 이렇게 끝날 듯하던 살리타이군의 고려 정벌은 이상한 방향으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살리타이는 요동으로 가서 머물며 도단(都旦)이라는 거란인을 다루가치로 보내왔는데, 이 사람이 아주 걸물이었다. 도단은 처음 고려에 온 것도 아니고 일찍이 몽골에 쫒겨 강동성으로 기어들었던 동족 거란족을 토벌하라고 합진의 몽골군을 이끌고 참전했던 사람이었다. 그때에도 그는 강동성을 함락시키고 동족들을 무참히 죽였는데, 그 사실을 고려쪽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도단은 다루가치라는 명목으로 할 일없이 조정에 들어와 어전을 기웃거리면서 참견하는 등 하루 종일 궁궐을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해가 지면 관사로 돌아갔다. 그러는 과정에 도단은 고려 대신들한테 점점 미운 털이 박혔고, 낌새가 좋지 않고 대우가 점점 나빠진 걸 눈치 챈 도단은 살리타이를 긁어 무리한 요구를 해대기 시작했다. 고려에서는 갖은 변명으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갔지만 도단이 마음먹고 농간을 부리는 데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고려의 실권자 최우는 살리타이군이 떠난 뒤 한 달만에 다루가치 도단의 횡포를 용서할 수 없다면서 결단을 내렸다. 강화도 천도(遷都)를 결심한 것이다. 최우는 첩보를 통해 몽골군이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강화에 축성(築城)을 하여 그해 6월, 살리타이가 떠난 지 다섯 달만에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는 서북 지방에 와 있던 몽골인들을 잡아 죽이고 몽골과 국교를 단절하고 최후까지 싸우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러자 깜짝 놀란 살리타이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달려왔다. 그리고 군대의 상당수를 남쪽으로 내려보내 정벌을 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강화도에 사신을 보내 서로 좋게 지내자며 강화를 요청하였다. 고려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실권자 최우가 막무가내로 몽골 사신들의 강화 교섭을 거절하자 살리타이는 하는 수없이 군대를 몰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곳이 용인 처인성(處仁城;용인)이었다. 고려 군창이다.
이때 백현원(白峴院) 승려 김윤후는 마침 처인성 인근으로 피난와 있었다. 그러다 살리타이를 보고 활로 쏘아 죽였다. 그날이 12월 16일, 한겨울에 일어난 갑작스런 일이었다. * 이 상황의 팩트를 마지막에 정리함
(이걸 가리켜 처인대첩이라고까지 말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건 과장된 것이다. 살리타이가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하다 김윤후에게 죽었다면 김윤후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김윤후에게는 군대도 없었고, 단지 혼자 혹은 부곡민 몇몇과 의분(義憤)으로 살리타이를 죽였을 뿐이다. 김윤후가 나중 당쿠의 재침 때 충주성을 지킨 걸 보면 이때 살리타이를 죽이고도 무사했다는 것은, 곧 살리타이가 갑작스런 암전(暗箭)에 맞아 죽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여 몽골의 2차 침입도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고려로서는 적장이 죽어 침략자들이 물러간다 하여 좋아라 박수를 쳐댔지만 더 무서운 장수가 또 대군을 몰아 쳐들어올 줄은 알지 못했다. 그래도 살리타이는 연민을 가지고 고려를 대했고, 그런 만큼 살륙을 피하려 애쓰던 장수였다.
어쨌든 백현원 스님 김윤후는 강화로 불려가 포상을 받고 섭랑장(攝郞將)이라는 벼슬도 받았다. 그는 그뒤 충주성을 지키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일단 몽골은 2년간은 잠잠하였다. 고려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금나라 정벌전이 치열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려 정벌은 잠시 뒤로 미루고 문제가 된 동진(東眞)으로 군대를 보내 고려를 꼬드겨 배반하자고 했던 포선만노를 잡아죽이고, 동진이라는 나라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 사이 고려는 몽골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군대를 서북 지방으로 보내 몽골의 다루가치로 만행을 일삼던 홍대순, 홍복원 일당을 급습하였다. 고려군은 홍대순과 일당을 잡아죽였는데 그만 홍복원은 몽골로 도망쳐 버려 훗날의 화근(禍根)이 되었다.
4. 오고타이칸의 입조(入朝) 요구
바투의 군대가 알타이산맥을 넘고 있을 즈음, 오고타이칸의 또다른 명령을 받은 장수 당쿠(唐古)는 고려 국경을 넘었다.
고려군의 공격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온 홍복원이 오고타이칸을 만나 고려 정벌을 누차 소원한 결과였다. 그러고도 고려는 적의 화살에 몽골군 최고 사령관이 맞아 죽은 유일한 나라라는 점 때문에 오고타이는 고려 정벌 역시 러시아 정벌 못지 않게 큰 관심을 두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나라를 세 번에 걸쳐 침입해 본 적이 없는 몽골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으므로 이번 3차 정벌전만은 고려를 뿌리째 뽑아 몽골제국의 땅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오고타이칸은 살리타이의 부장이었던 당쿠에게 무려 1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내주었다.
당쿠는 살리타이의 부장으로 고려를 드나든 바 있는 장수기 때문에 고려가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당쿠는 일단 국토를 유린하고 고려 조정을 궁지로 몰아넣은 다음 항복을 받아 내기로 했다. 말하자면 살리타이가 죽은 뒤 패퇴했다가 다시 들어오는 형식을 띤 만큼 더 잔인하게 다루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작전이라면 그 작전도 사실은 당쿠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건의한 사람은 충실한 그의 앞잡이 홍복원(洪福源)의 계략이었다. 홍복원, 그는 살리타이의 고려 정벌 당시 제일 먼저 항복(조숙창은 항복 의도가 달랐으므로 홍복원 부자가 첫 배신자인 셈이다)하여 몽골의 앞잡이가 된 홍대순의 아들이었다. 이들 부자는, 아니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까지 그들은 삼대를 이어가며 조국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에 충성하였다.
여하튼 몽골은 홍복원에게 만호장(萬戶長 ; 요동 지방에서 고려인 등 여진족을 다스리는 직위. 몽골인 만호장보다는 못하지만 막강한 자리이다. 나중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부자도 몽골에서 내려준 만호의 지위에 있었다)이라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주어 고려 정벌의 길 안내를 맡겼다.
당쿠는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홍복원을 고려 정벌의 제일선에 내세웠다. 홍복원은 당쿠의 요구에 기뻐하며 쾌히 승낙하여, 고려 출신 첩자부대를 이끌고 기꺼이 고려로 남진했다.
당쿠는 닥치는 대로 고려 땅을 유린하고 다녔다.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 심지어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고려는 몽골군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몽골의 병사들은 당쿠의 지시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불태웠고 약탈을 일삼았다. 당쿠는, 이번에는 강화도에 사신을 보내지도 않았다. 제 백성이 아까우면 고려에서 스스로 찾아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리타이가 그랬던 것처럼 당쿠도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짓밟고 도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조정의 명령을 받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겠지만, 고려 사람들은 곳곳에서 몽골에 저항하였다. 물론 고려인의 저항은 강화도의 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발적인 것이었다.
결국 물밀 듯이 남하하던 몽골군은 마침내 충주성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한때는, 살리타이가 그랬던 것처럼 충주성을 우회하여 계속 남진을 시도하려 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충주는 교통의 요지로 남과 북을 연결하는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몽골 군사들은 매번 커다란 피해를 입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충주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쿠의 상관이었던 살라타이를 죽인 김윤후가 지키고 있었다.
결국 당쿠는 충주를 포위한 채 공격하지는 않고 나머지 군대를 계속 남진시켰다. 그는 충주를 포위한 병사들에게 가까이 접근하기보다는 기습 작전으로 적을 괴롭히라고 일렀다. 그리고 적장의 활을 조심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충주를 돌아 내려간 당쿠의 몽골 병사는 계속 남진하여 경주의 보물인 황룡사 탑을 불지르고 온갖 유물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럴수록 고려의 저항은 완강했다. 조정은 조정대로,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몽골의 침략을 곳곳에서 저지했다. 그러던 중에 이상한 소문이 몽골 진영내로 흘러들었다. 부처라는 귀신이 마법을 부려 몽골군을 도륙할 것이라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쳐부수기 위해 팔만대장경이라는 부적을 깎고 있는데 그게 완성되기만 하면 몽골군은 저절로 궤멸되리라는 소문이었다.
당쿠는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그도 그럴 것이 불교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유목민족인 그들이 석가모니라거나 팔만대장경을 알 리 없었다. 게다가 본토에서 도착한 오고타이칸의 사절이 전투 상황을 보고하라는 문서를 들고 왔으므로 당쿠는 난감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전쟁은 소강 상태로 빠졌다. 3차 정벌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지만 고려의 국토를 유린한 것 이외에는 살리타이 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그들은 황룡사를 불태우고 곳곳을 파괴했지만 얼마나 귀한 것을 파괴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글자도 모르고 지식도 없던 몽골군들은 다만 농경 문화의 잔재를 파괴한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던 중, 당쿠에게 반가운 소식이 한 가지 들려왔다. 고려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고려 조정은 당쿠에게 사신을 보내 강화를 맺을 것을 제의했다. 당쿠도 기다리던 바였다. 두 나라는 고려의 태자를 입조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고도 몽골의 정쟁으로 오고타이칸에서 구유크칸-몽케칸으로 이어지는 혼란을 빌미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고려는 1259년, 태자 왕전(王倎)을 몽케칸에게 보내기로 결심했다. 국왕 고종이나 태자 왕전은 실상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무신 정권의 노리개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무신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태자를 적지로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단이 결국 고려를 살리는 외교적 승부수가 되었다.
5. 고려 태자 왕전과 몽골 대장수 쿠빌라이의 극적인 만남
1259년 4월, 보낸다보낸다 하면서 차일피일 몽골 사신들의 애간장을 태우면서 버티던 무신 정권의 지도자 최항은 결국 태자 왕전 일행을 출발시켰다.
그러나 이날 태자 왕전(王倎)의 입조는 상황을 묘하게 이끌어 갔다. 정중부의 무신 난 이후 오래도록 고려 조정을 지배해 온 무인 정권이 바야흐로 왕권에 의해 대체되는 조짐을 안고 태자 왕전이 떠나고 있는 것이었다. 즉 몽골의 막강한 군사력이 왕권을 옹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또 왕실에서 이들을 내세워 왕권 회복을 꾀할 경우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고종이 태자 왕전을 입조시키는 여러 이유 가운데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고려 태자 왕전이 강화도를 떠난 것은 서기 1259년 4월 21일이었다.
태자 일행이 몽케칸이 주둔하고 있다는 육반산에 도착한 것은 9월초였다. 강도를 떠난 지 4개월 여가 지난 무렵이었다.
육반산에 들어간 지 닷새만에 태자는 그 먼길을 고생하여 만나려고 했던 바로 그 몽케칸이 태자가 육반산에 들어오던 바로 9월 16일에 병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몽케칸은 육반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합주 조어산에서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병명은 이질 같은 전염병이었지만 누구도 확인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태자 전은 한동안 육반산 밖에서 머물렀다. 몽케칸이 죽고 새로운 대칸이 선출되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몽케의 뒤를 이어 대칸에 도전하는 두 동생, 아리크 부게와 쿠빌라이의 싸움이 시작되었으므로 태자 전은 난감하기만 했다.
이들은 쿠릴타이를 열려면 수 년씩 기다리는 풍습이 있으므로 새 대칸을 만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누가 되었든 대칸이 될 사람을 어서 만나고 고려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자면 태자 왕전으로서는 앞뒤를 잴 필요가 있었다. 이미 육반산과 카라코롬을 점령하고 더 나은 조건에 있는 아리크 부게를 만날 것인가, 아니면 몽케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전쟁을 하다가 아리크 부게의 대칸 옹립 소식을 듣고 급거 북상 중이라는 쿠빌라이를 만날 것인가. 그것은 고려의 운명을 결정지을 매우 중요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만난 사람이 대칸에 등극하지 못한다면 그 뒤에 따를 대가는 각오해야 했다. 그 결과는 지금까지 몽케칸으로부터 받은 수모에 못지 않을 것임이 뻔했다.
결국 태자 왕전은 갖은 정보를 수집한 끝에 쿠빌라이를 차기 대칸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급거 귀환중이라는 쿠빌라이를 만나기 위해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궁벽한 시골땅에서 고려 태자와 몽골의 장수 쿠빌라이가 회담을 가졌다. 쿠빌라이와 태자 전은 대등한 입장에서 마주 앉아 예를 나누었다. 태자는 고려 국왕의 표문을 쿠빌라이에게 주었다.
이 당시 쿠빌라이는 대칸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동생 아리크 부게에게 몰려 변방으로 좌천되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고려국 태자는 자신을 대칸의 대리인으로, 나아가 차기 대칸의 유력한 후보자로 믿고 고려국의 정식 외교 문서를 건네준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태자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려 태자가 쿠빌라이를 대칸에 버금가는 지위로 대접한 것처럼 쿠빌라이 역시 태자를 고려 국왕에 걸맞는 예우로써 대했다. 이날의 극적인 만남이 있은 뒤 태자 역시 쿠빌라이군을 뒤따라 갔다.
얼마 뒤 쿠빌라이는 쿠데타에 가까운 무력으로 대칸에 즉위하고 나서도 몇 차례 더 고려 태자를 만나 우의를 다졌다. 그해 겨울, 고려 국왕 고종이 서거함으로써 태자 왕전은 국왕에 즉위하기 위해 귀국했다.
그뒤의 과정은 태자 왕전이 무신 정권을 물리치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태자 왕전이 쿠빌라이와 친교를 튼 뒤 몽골의 무리한 요구는 사라지고, 마치 형제 국가처럼 잘 지냈다. 그런 상황에서 태자 왕전 즉 원종은 대도에 가서 쿠빌라이칸을 만난 뒤 몽골군을 데리고 개경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수도를 이전하니 강화도의 신하들은 모두 개경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한다.
무신 정권 입장에서 보자면 그건 원종의 구데타였다. 그러나 원종의 배후에는 쿠빌라이칸이 있었고, 정예 몽골군이 있었다. 결국 삼별초의 자체 정부 수립으로 나라는 두 쪽이 나지만, 여몽 연합군은 끝내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세운 진도 정부를 함락시켰다.
이후 원종의 아들 충렬왕이 쿠빌라이칸의 친딸과 국제 결혼을 하면서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쿠빌라이칸의 사위가 된 충렬왕 대에 이르러서는 충렬왕 자신이 몽골 왕족 서열 7위(황제, 황후, 황제의 아들딸에 이은 권력 서열로 쿠릴타이 같은 국중대회의에서도 이 서열에 따라 자리가 정해진다)가 되는 등 세계제국 원나라 경영에 고려인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고려 국왕들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 반대로는 원나라 황제가 고려인을 후비로 맞이하기도 했다. 특히 쿠빌라이는 비파를 잘 타는 고려 여인 이씨를 후비로 맞았다. 그 뒤 인종은 김씨 여인을 후비로 맞았다가 사후에 황후로 책봉했다. 나중에 순제의 경우는 고려 공녀 출신의 한 여인을 정식 왕후로 책봉, 원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그런 만큼 고려와 몽골 간에는 경제 교류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몽골은 고려대장경 영인본을 수입해 간다거나 고려 종이, 인삼, 자기를 귀물(貴物)로 여겼다. 순제의 비인 기황후는 특히 대도(大都)에 고려양(高麗樣)을 퍼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려의 복식, 음식 등 갖가지 문화가 기황후와 기황후를 따르는 고려인들을 통해 몽골에 전해진 것이다.
6. 고려가 얻은 것과 잃은 것
황성(荒城) 옛터란 노랫말처럼 개성은 흘러간 시절 고려의 수도이다. 고려의 마지막이 몽골에 관련되어 장식되었다는 것은 고구려를 생각할 때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특히나 조선시대 5백년의 역사에 친숙한 오늘날 현대인에게 고려의 수도 개경은 너무 먼 이름이다. 그것도 개성이란 이름으로 돌아가 조선의 한 지방이 된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나는 고려가 백여 년이 넘는 동안 몽골과 애증의 외교 관계를 겪은 것에 대해 색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리 역사상 식민 상태에 이를 정도로 큰 변란을 겪은 것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당나라에 함락된 것,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된 것, 조선이 일본에 강점된 것이다. 여기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정도는 하나의 국제전쟁에 포함되는 것으로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문제는 아니었으니 제외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당, 고려-몽골, 조선-일본의 세 관계를 비교해 보면 서로 상당히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고구려는 당에 병합된 뒤 나라 자체가 완전히 멸망했다. 언어, 풍속 등 모든 것이 중국화되었다. 역사 자료마저 철저히 없어졌다. 중국이 변방 국가를 정벌하면 지독하게 식민 사업을 벌이는데, 이 관례에 따라 고구려 백성들 역시 철저히 중국인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발해가 다시 서면서 겨우 국세를 회복했다. 그렇지만 고구려 지배층은 이미 중국화된 이후의 일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터에 살던 유민들이 함께 일어나 세운 나라이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는 볼 수 없을만큼 역사적으로 큰 상처를 딛고 일어난 나라이다.
그 다음 조선을 강제 점령한 일본 역시 당나라 못지 않게 조선을 일본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 35년간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일본의 지배는 끝이 나고, 우리나라는 도리어 부흥의 전기를 마련했다. 일본의 극렬한 충격을 받은 이후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는지 깨달았고, 이후 근대화 문명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외환(外患)에는 이렇게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굳게 결속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반면(反面)이 있다.
그렇다면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어떠한가.
고려 창업 시기, 고려는 사실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이었기 때문에 강역 역시 한반도 남부에 치우친 정권이었다. 함경도, 평안도는 수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곳을 결정적으로 수복하여 강역에 안정적으로 편입시킨 것은 이 시기의 결과다.
심양왕을 고려 왕족이 맡았던 이 시절의 인연으로 고려 우왕은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만약 이성계가 그대로 진군해 요동을 차지했더라면 고려는 고구려의 옛땅까지 모두 수복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주원장의 명군(明君)은 요동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원나라 역시 초원으로 밀려간 뒤라서 간섭할 이유가 없었고, 도리어 외교 여하에 따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이성계의 쿠데타로 실패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영토면에서 보자면 세 번째로 안타까운 것은 일본 문제다. 여몽 연합군이 두 차례 출정하는 과정에서 고려가 더 적극적으로 나갔다면 일본과 고려가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했더라면 어차피 일본은 고려가 관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몽골에는 점령지를 다스릴 인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그런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고, 외교적으로 문제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고려 백성의 고역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게 억지로 이루어졌고, 할 것은 다 했으면서도 얻은 건 경제적 손실과 인명 손실 뿐이었다. 이때 만약 일본이 고려의 관할로 들어왔더라면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오늘날의 규슈 일대가 전부였는데, 그들의 지배층은 어차피 백제-가야-신라-고구려의 유민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통합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영토면에서 본 아쉬운 점이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수많은 고려인이 대도로 건너가 살았다. 대도 인구의 네 명중 한명, 황궁 인구의 두 명중 한 명이 고려인이라는 기록까지 있다. 그런 만큼 고려 수도 개경과 원나라 수도 대도 간에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교류가 이루어졌을까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러한 덕택에 고려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특히 경제 감각이 뛰어났다. 북방 유목민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장사 개념이다. 뭐든지 팔 수 있고, 뭐든지 살 수 있다는 생각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일어나면서 증명되지 않았던가.
이후 개성 상인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그 지역 사람들의 경제 감각은 상업을 중시하던 몽골인들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개성 출신들의 경제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므로, 생각 하나가 얼마나 강한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실례다.
개성뿐 아니라 의주 역시 국제 무역 도시로 성장했다. 그래서 의주 같은 경우는 조선시대까지도 국제 상업 도시로 번창할 수 있었다. 심지어 홍경래난 때에는 막강한 경제력으로 국가 전복을 꾀하기도 했다.
개성과 대도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질 때 들어온 문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천연기념물이라는 진돗개도 진도의 삼별초 정부를 정벌하러 들어온 몽골 군견의 후예다. 설렁탕은 몽골군 전투 식량 셜렁이 남겨 놓은 것이다. 결혼 문화, 궁중 문화의 상당 부분도 몽골풍이다.
이밖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고려는 전통적인 성전(城戰)에서 벗어나 기마전을 주로 하는 야전(野戰)에 익숙하게 되었다. 고구려 이후 줄곧 성문을 걸어닫고 지키는 성전만 고집해온 고려군은 강적에게는 쉽게 섬멸될 수 있는 단점을 안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려군은 몽골군이 펼치는 야전 기술을 배울 수 있었고, 그 선봉에 있던 이성계가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새로운 전술을 익힌 덕분에 조선의 전략도 달라지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야전에서 물리칠 수 있던 전략상의 중요한 변화였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이순신 제독이 일본 수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던 전략적 우위도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 두 차례에 걸친 정벌군을 편성하면서 고려는 전선(戰船)을 효율적으로 설계하고, 해전(海戰) 병법을 충분히 터득할 수 있었다. 이 군사 기술이 조선에 그대로 전수되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제독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개성을 생각하면, 우리는 역시 북방 민족의 정신으로 돌아갈 때 최강의 국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북방 민족 정신의 실체는 철저한 합리성이다. 실력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물리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방인들에게는 종교, 인종, 사상, 체면 따위는 아무 척도도 되지 않는다.
진시황이 열국(列國)을 통일한 힘 역시 북방 민족의 무한한 포용성에 있었다. 진시황 병마용 갱에 늘어선 토용에는 갖가지 인종이 뒤섞여 있다. 그는 오로지 힘과 실력으로 열국을 제압했다. 칭기즈칸 역시 그랬다. 그는 실력을 최우선으로 쳤다. 그래서 세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중국을 점령했던 북방 민족, 즉 타브가츠(北魏, 隨, 唐)와 거란(遼), 여진(金, 淸), 몽골(元)은 중국 역사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이 힘의 근원을 찾지 않고는 우리나라가 세계 대국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역시 강대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자신있게 문을 열고 정보를 주고받으며, 당당히 실력을 겨루던 때가 역시 국력이 강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처럼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정부는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연거푸 당해보았으면서도 끝까지 쇄국을 하려한 무모함이 결국 일제 강점을 부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성은 세계를 향해 열린 도시였고,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호흡하던 국제 도시였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개성은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를 실증해준 역사적 진실이자 우리 미래의 상징이다.
-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죽인 시기의 팩트
고려사 /
. 김윤후는 백현원(白峴院) 승려였다. 법명은 불상이다.
- 院은 寺, 庵보다 규모가 작은 절이다.
. 김윤후는 살리타이 사령관이 이끄는 몽골군이 내습하자 처인부곡으로 피신했다. 따라서 백현원은 처인성 내에 있는 절이 아니다.
. 처인성은 군량을 보관하는 곡창이었다.
- 12월이므로 군량 확보 차원에서 살리타이군이 처인성에 들렀을 수 있다. 적어도 몽골기마군 수천 기는 왔을 것이다.
- 12월은 전투하기에 부적절한 엄동설한이다.
- 문익점이 원나라에 들어간 것은 1362년이다. 이후 목화를 가져와 진주에서 길러 퍼뜨렸으니 고려인이 솜옷을 입으려면 적어도 130여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12월 전투는 불가능하다. 이에 비해 몽골군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 지방이 많고, 가죽털옷을 입으므로 추위를 잘 타지 않는다.
. 살리타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 고려 조정에는 김윤후가 쏘아 죽였다고 보고되었다. 당시 처인부곡은 수원 소속이었으므로 이 계통으로 강화도 조정에 보고되었을 것이다. 사실일 것이다.
. 이에 고려국왕 고종이 상장군을 제수했으나 김윤후가 "살리타이가 죽을 때 나는 활이나 화살도 갖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귀중한 상을 받겠느냐."며 거절했다. 사양한 내용을 볼 때 살리타이를 혼자 죽인 건 아니고 동료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은 낮은 직급이지만 얘기를 듣고나서 섭랑장을 제수했다.
. 이후 김윤후는 방호별감이 되었는데 몽골군 재침 때 또 충주산성을 지켜냈다. 이에 상장군이 되고, 이후 동북면병마사로 제수되었다. 동북지방이 몽골군에 함락되어 부임하지 못하고, 수사공우복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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