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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이제 나도 고개를 넘었네

파란태양 | 2007/06/04 (월) 20:42

 

이제 나도 고개를 넘었네  

 

“40대 중년 아저씨가 되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까. 아이고, 40대 아줌마 데리고 살려면 퍽도 재미없겠군.”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마도 20여 년 전쯤일 것이다. 아마 10여 년 전에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내가 40대 중년이 된다는 건 “아이고 끔찍해라” 하고 상상하지도 않을 때니까.  

 

그 시절에는 하루 종일 일해도 힘들지 않았다. 해발 5백 미터 산쯤은 쉬지 않고 달려서 단숨에 오를 수 있었다. 밤을 새워도 거뜬했다. 마음에 맞는 친구라면 9박 10일을 떠들어도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부럽지 않고, 손에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부족한 줄을 몰랐으니까.  

 

대학을 졸업하면서 내내 글을 쓰는 직업을 가져왔으므로 힘든 육체 노동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누구도 세월은 이길 수 없는 것인가. 몇 년 전 갑자기 어깨가 쑤시기 시작했다. 어깨를 쓸 일도 없고, 쓴 일도 없었다. 일이라고 해 봐야 컴퓨터 입력기를 두드린 것밖에는 없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물거리 한 짐을 지고도 고갯마루를 넘어다녔는데, 내 어깨가 그쯤으로 상할 만큼 약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웬걸, 병원에서는 오십견이라고 진단했다. 오십견,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아니, 아버지나 작은아버지들이 가끔 하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그런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싶어 흘려듣던 말이다. 그야말로 나이 50이 되면 찾아오는 증상이라는 뜻으로 오십견이라고 한다고들 했다. 그렇지만 난 겨우 마흔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오십견이면 오십견이지 사십견도 있느냐고 볼멘 소리로 물었더니 의사는 나더러 무슨 일을 하느냐고 되물었다.  

 

딱히 하는 일이랄 것도 없고 컴퓨터로 뭘 좀 쓴다고 했더니, 의사 왈(曰), 그래서 오십견에 걸렸습니다 하고 설명했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10년 이상 컴퓨터를 써오고 있는데 왜 갑자기 오십견이냐고 따졌다. 거기서부터 의사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결국 컴퓨터가 범인으로 지목되고, 가깝게는 노트북이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진단되었다. 특히 노트북 자판기는 데스크탑보다 좁기 때문에 저절로 어깨가 구부러지고, 그런 자세로 일하다 보면 손목에 무리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전에도 노트북을 쓴 적이 많다고 항변했다. 그때 배실배실 웃으면서 날 측은하게 내려다보던 의사의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이 40이 넘으면 다 그렇습니다.

그 말에는 정말이지 쥐죽은 듯이 조용히 있어야 했다. 그 말 한 마디로 나는 승복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그뒤로는 컴퓨터 작업을 한 뒤 팔굽혀펴기를 꼭 해서 어깨결림을 풀어주고 있다.  

 

그런데 정말 나이를 자각한 것은, 아니 나도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책을 읽는데 자꾸만 눈이 어리어리해서 참 힘이 들었다. 먹는 게 소홀해서 그런가 해서 안먹던 고기도 일부러 먹어보고, 영양제도 먹어보았다. 나름대로 몸부림하는 가운데 어느덧 주말이 되어 훌라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 중에 내 동갑 여자가 있다. 이 여자가 카드를 쥔 손을 자꾸만 앞으로 내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옆사람이 패를 보면 안되니까 머리를 뒤로 쭉 빼고는 50센티미터쯤 거리를 두고 카드를 읽곤 했다. 참 웃기네 하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가까이 보면 눈이 침침해서 잘 안보인다고 그랬다. 그러자 다들 벌써 노안이 되었다면서 낄낄거렸다. 이 여자 역시 맞다고 했다. 안과에 갔더니 노안이 되었다고 판정하더란다.  

 

난 은근히 겁이 났다. 저하고 나하고 동갑이니 난들 뾰죽한 수가 있으랴 싶었다. 그래서 살그머니 카드를 내밀어보았다. 난 원래 근시이므로 가까이 보는 게 훨씬 잘 보이고, 늘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눈이 편해지는 게 아닌가. 난 깜짝 놀라서 얼른 카드를 가까이 당겨보았다. 다시 침침해졌다. 그래도 나는 카드를 쭉 내밀고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긍정하고 싶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긴 올해 칠순이신 우리 장모님도 이런 얘기를 하셨다. 작년엔가 고향에 갔는데, 어렸을 때 함께 놀던 남자 친구를 만났단다. 순간 어머니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 그 말투로 “너 참 많이 늙었구나.” 그랬다. 헤어진 게 스무 살 무렵이니 그뒤로 꼭 50년을 더 늙은 친구한테 애들처럼 말한 것이다. 그분 역시 칠순이 다 되었을 나이지만 말이다. 그랬더니 그 친구 말이 또 걸작이었다. “전 안늙은 줄 아나 보지?” 그러고 생각해 보니 이렇게 늙으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하신다.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늙었다면서 괜시리 창밖을 멀리 내다보셨다. 물론 창밖에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자연(自然)이 그대로 청청하다. 파란 하늘이며 흰 구름이며, 까치며 나무들까지. 이제 잘 늙는 걸 배워야 할 때가 된 것같다.  

 

- 본문을 보고 계산을 해보니 7년 전에 쓴 글같다. 아마도 2000년 무렵이었던 것같다. 지금은 달라진 것도 있지만 그때 그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그대로 둔다.

- 51세인 지금 읽어보니, 그나마 행복한 고민하고 앉아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