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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아드반-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8. 불사족 아누루다

8. 불사족 아누루다

 

도담 동자는 바닷가에 이르는 동안 불사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여행자들한테서 여러 번 들었다.

특히 바닷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죽지 않는 종족인 불사족 사람들은 먼바다 어딘가에 떠 있는 작은 섬 불사도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불사도는 바닷가 사람들에게 지상 낙원으로 아스라한 꿈을 잔뜩 날개치며 소문이나 전설을 부채질하곤 했다. 그 바람에 꿈 많은 젊은 남녀나 죽음을 앞둔 불치 환자들이 쪽배에 몸을 싣고 정처없이 바다를 떠다니기도 했다. 불사도에 가면 돌아나오는 사람이 없으므로 막상 길을 아는 이가 없었다.

 

불사의 낙원이라는 말을 하거나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지 사람들은 아늑한 행복을 느꼈다. 불사도를 찾아가는 길 내내 동자 역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자는 마침내 불사도로 가는 배가 있다는 부두에 이르렀다.

불사도에 산다는 아누루다는 어떤 가르침을 줄까, 도담 동자는 아마도 불사도에 이르면 거기서 영영 살게 되지 않을까 상상했다.

부두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불사도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만 이런 게 아니라 날마다 사람들이 이처럼 줄을 잇는다고들 했다. 한번 떠난 배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므로 늘 새로운 사공이 새로운 배를 준비했다.

동자는 긴 줄을 따라가 한 어른 뒤에 섰다.

이따금 두셋씩 사람을 태운 작은 배들이 부두를 떠나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손님을 실은 배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큰 배는 이미 다 사라지고, 나무를 베어 만든 작은 목선(木船)이 대부분이었다.

줄은 여간해서 동자에게 차례를 주지 않을 듯이 구불구불 길게 늘어져 있었다. 동자는 지루함을 참지 못해 틈틈이 목을 길게 빼고 앞을 내다보곤 했다. 배가 워낙 모자라다 보니 어느 세월에 차례가 올는지 걱정이 되었다.

동자는 바로 앞에 서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는 어른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어른은 획 몸을 돌려 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니? 치려면 세게 쳐야지 그렇게 살살 건드리면 너무 간지러워.”

"난 그냥 심심해서... 아저씬 불사도에 왜 가려는 거야?”

"그야 오래오래 살고 싶어서이지.”

"오래 산다는 건 좋은 건가?”

"그렇구말구. 죽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그건 끝없이 좋은 거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잘 생겨도,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크다 해도 사람은 다 죽잖아. 그러니 안죽는 게 제일이지.”

"그럼 아저씨는 오래 산다는 것보다 죽지 않는다는 게 더 좋은 거구나. 행복 같은 건 필요가 없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사람은 결국 죽잖아. 행복이라? 일단 죽지 않게 되면 그때 생각해봐야지.”

"아저씬 불사도에 가지 않아도 한 이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텐데 굳이 그곳에 갈 거 없잖아? 아저씬 수천, 수만 년 동안 해야 할 일이 뭔가 있는 거야? 할 일이 그렇게 많으신가봐?”

"할 일이야 없을수록 좋지. 중요한 건 내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거다. 난 그것 하나만으로도 불사도를 찾는 데에 전 재산을 걸 각오가 돼 있다.”

그 어른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잊지 않고 줄을 살폈다. 그럴 때마다 동자도 고개를 뽑아 앞뒤를 둘러보았다.

동자는 이번에는 뒷줄에 서 있던 젊은 부부에게 말을 붙였다.

"둘이서 불사도에 가려고?”

남편이 아내의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반쯤은 몸을 기울여 남편에게 안겨 있었다.

"동자야. 우린 결혼한 지 한 달 된 신혼부부란다. 우린 서로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수명으론 그걸 풀어내기에 충분치 않단다. 우린 수백 년, 수천 년을 같이 살면서 사랑을 마음껏 나눌 거란다.”

동자는 그 남편의 말에 입을 따악 벌리면서 놀랐다.

"그렇게나 오래? 몇 백 년, 몇 천 년의 사랑이라면 얼마나 깊은 것이람? 아저씬, 아주머니를 그렇게나 사랑한다는 거야?”

"그렇단다. 우린 한 생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영원토록 사랑할 것이다. 나는 아내를 백 년, 천 년, 만 년을 사랑할 테다.”

"아주머니의 무얼 좋아하는데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거야?”

"보아라. 요 앵두빛 입술이며, 수정같이 맑은 눈, 복사꽃 두 볼을. 나는 아내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난 아내의 아름다움이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 불사도를 찾아가서 그것들을 영원히 사랑할 거다. 영원히, 영원히 말이다.”

동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또 진짜로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인 줄 알았더니 겨우 십 년도 안되는 짧은 사랑이었구나. 십 년만 지나도 쭈그러지고 바랠 것을 다 말했잖아? . 이 세상에서 영원한 걸 사랑한다 해도 불사도에서는 그런 사랑을 천 년 만 년 지킨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러니? 사랑이란, 커봐야 아는 거야.”

동자는 핀잔을 받고는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러고는 온종일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차례를 받았다.

배를 파는 장사꾼이 배삯을 요구했다.

"금 열 냥에 쪽배 한 척이다.”

동자는 가진 거라곤 몸에 두르고 있는 물빛옷과 열매 주머니 뿐이었다. 장사꾼이 요구하는 배삯을 낼 수 없었다. 동자가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자 뒷줄에 선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법석을 피웠다. 장사꾼도 화를 버럭 내면서 동자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 녀석아! 돈도 없이 배를 타려 하다니 그 배짱은 도대체 도둑놈 심보냐, 사기꾼 심보냐? 배를 타려거든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오너라.”

"난 어려서 힘이 없어. 아저씨가 내게 일감을 줘.”

"빌어먹을 녀석. 내 옆에서 손님들이 내는 돈이라도 계산해라. 열흘만 일하면 작은 배 하나 주마.”

"난 글씨를 못 써.”

"글씬 나도 못 써. 배삯이 금 열 냥이니까 사람들이 네 앞을 지나 갈 때마다 이 장부에 작대기를 하나씩 그려라. 그렇게 하면 난 그걸 보고 내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으니까.”

동자는 줄에서 물러나 다리를 이어붙인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손님들이 내어 주는 돈은 세어볼 것도 없이 자루에 집어넣고, 그때마다 큰 장부에 여기저기 길고 짧은 작대기를 그려 놓았다.

아저씬, 왜 여기서 배를 팔고 있어? 불사도에 가서 영원히 살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넌 그 말을 믿니? 이 세상에 믿을 건 돈 밖에 없더라. 돈이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어. 난 여기서 행복하게 살다가 돈쓰기에 지치고 놀기에도 지치거들랑 그때나 불사도에 한번 가볼 생각이다. 넌 이마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그새 불사도를 찾니?”

난 만날 사람이 있어 가는 거야. 불사족 아누루다라고 들어봤어?”

불사도에는 왕이 따로 없다더라. 영원히 사는데 왜 남에게 충성하겠니?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데 굳이 누구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거기도 돈은 필요할걸, 아마? 그래야 좋은 애인 구하고, 좋은 집 구하고, 보석으로 온몸을 휘감지.”

그럴까? 아누루다는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을 하실까.”

 

열흘이 지나자 장사꾼은 약속대로 낡은 배 한 척을 동자에게 내 주었다. 동자는 기쁜 마음으로 곧 배를 저어 바다로 나아갔다.

동자가 바다에 나간 지 처음 며칠 동안은 파도가 없었으나 망망대해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폭풍우가 덤벼들어 배를 뒤집어 놓고 말았다. 동자는 정신을 잃은 채 나뭇조각에 실려 바다를 떠다니기 시작했다. 동자가 겨우 잡고 버티는 나뭇조각은 꼭 동자의 덩치만한 것으로, 두께는 좀 있었다.

얼마 후에 동자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으나 너무 지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다행히 바다는 다시 잔잔해졌다.

동자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잊기 위해 사막을 건널 때처럼 나뭇조각을 붙잡은 채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엔 해와 별이 번갈아 나타나서 동자의 친구가 되었다.

부두를 떠나온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앞에 섰던 사람, 뒤에 섰던 부부, 아우성치던 사람들. 불사도까지 무사히 건너갔는지, 아니면 폭풍우에 다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동자는 열흘이 넘도록 해와 별만 바라보면서 바다를 떠 다녔다.

바다는 어찌나 넓은지 동자는 작은 점으로 둥둥 떠다니기만 했다. 하늘과 바다 사이엔 동자와 별과 해만 있었다.

이윽고 동자는 새로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별과 해를 헤아리면서 시작되었다.

동자는 배삯을 계산할 때처럼 밤마다 별의 수효를 헤아리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그었다. 낮에는 작대기를 하나 밖에 그릴 수 없었다. 갈매기 같은 새조차 날아다니지 않았다. 그것이 작은 실마리가 되어 해와 달과 별은 저희들이 감추고 있던 비밀을 동자에게 조금씩 들키고 말았다.

"하나로 줄었다가 수없이 늘어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해는 혼자 나오는데 별은 어째서 수천 수만 개로 흩어져 나올까? 하나였다가 수없이 많았다가 또 하나? 그러나 해와 별은 조금도 다름없는 모두 내 친구, 친구일 뿐이야.

동자의 생각은 곧 한 개의 해와 무한개의 별이 친구 사이이며, 그래서 하나나 무한 같은 수효의 많고 적음은 둘 사이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동자는 또, 하나와 무한이 서로 다르나 다르지 않고, 같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벌써 순간과 영원의 문제로 더듬어 올라가 문제를 조금씩 키워나갔다. 불사도의 영원이 순간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뒤를 이어 생겨나고, 동자는 서서히 의심을 풀어나갔다.

순간 속에 영원이 숨어 있고, 영원 속에 순간이 깃들어 있다니.

동자는 마침내 바다를 떠돌면서 불사의 이치를 깨닫고, 그 순간 동자는 무엇엔가 이끌려가듯 어떤 섬의 해안으로 들어갔다. 동자는 문득 그 섬이 불사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과연 섬에는 불사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동자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먹기 시합을 하고 있었다. 동자는 구경을 하고 있던, 턱수염이 아주 긴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 여기가 무슨 섬이야?”

"불사도란다. 넌 이 섬에 처음 오는가 보구나?”

". 그런데 저 사람들은 지금 무얼 하는 거야?”

"우리 불사도에서는 매일 백 가지씩 시합이 벌어지는데, 오늘 여기서는 먹기 시합을 하는 중이란다. 저 사람이 바로 먹기 부문의 이백 오십 년 연속 우승자란다. 다른 사람들은 우승을 꿈꾸는 도전자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도전을 꿈꾸는 구경꾼이고.”

동자는 그 구경꾼이 가리키는 우승자의 모습을 보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입은 사자나 호랑이처럼 크고 돼지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또 배는 코끼리나 하마처럼 늘어져 거의 땅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세상에, 무슨 불사족이 저렇게 징그러워.”

"아름답지 않니?”

"아니 징그럽다니까. 그런데 불사도엔 이런 시합이 백 가지나 열린다고?”

"오늘 열리는 시합만 그렇고, 다 합치면 오천 가지다. 불사족이 모두 오천 명이니까 불사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부문에선가 우승자인 셈이지.”

"아저씬 무엇을 잘 해?”

"날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라. 턱수염이라고 불러라. 왜냐하면 난 어떤 불사족보다도 턱수염이 길고 멋지기 때문이다. 불사도에선 나보다 턱수염이 긴 사람은 없단다. 지금 몇 사람의 도전을 받고 있긴 하지만 나는 수염을 잘 자라게 하는 특효약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 부문의 연속 우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의 턱수염은 어깨를 넘어가고도 땅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만약에 다른 사람한테 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런 일은 없다. 난 절대로 남에게 지지 않는다. 턱수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불사족 중에선 내가 가장 위대하다. 저 사람들을 보아라. 쥐가 뜯어먹은 것처럼 수염이 조금밖에 안난 자도 있고, 아예 턱수염을 갖지도 못한 바보도 있다.”

"그래도 만약에 지면?”

"글쎄 안 진다니까 그러는구나. 내가 최고의 턱수염이라고!”

턱수염은 버럭 화를 내었다. 동자는 깜짝 놀라 재빨리 질문을 고쳤다.

"그럼 저 먹기 우승자가 지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야?”

그제야 턱수염은 노기를 다소 가라앉히고 대답을 해주었다.

". 그렇게 되면 저 먹기 우승자는 불사도를 떠나야 한단다. 불사도를 떠나면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된단다. 늙기 시작하는 거지. 어차피 제 수명이 지났으니 뭐... ”

"왜 떠나?”

"부끄럽고 창피해서란다. 다른 불사족들이 멸시하거든. 불사족 중에는 남의 특기를 빼앗아 두세 개 부문의 우승자가 되어 우쭐거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반면에 불사도를 떠난 사람도 있고.”

동자는 먹기 시합장을 빠져 나와 다른 곳으로 갔다. 동자가 새로 간 곳은 셈 시합장이었다. 그 옆 시합장은 손톱 길이를 겨루는 시합장이고, 그 뒤로도 턱걸이 시합장, 소리지르기 시합장, 침 멀리 뱉기 시합장 등이 있었다.

동자는 시합장을 한 바퀴 돌아 나와 불사족들이 알려주는 곳으로 아누루다를 찾아갔다.

아누루다는 마침 길 가의 큰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동자여, 어서 오라.”

"아누루다여, 안녕.”

아누루다는 동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고, 팔뚝 근육은 힘차 보였다.

"아누루다는 시합을 좋아하지 않아? 다른 불사족들은 시합을 구경하느라고 야단법석인데.”

"나는 시합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불사족이 쫓아내려 하지 않았어?”

"난 맨 먼저 불사족이 되었기 때문에 나이 시합에선 늘 우승한다. 난 구만 살이다.”

구만 살? 아오! 그거 되게 많은 거지?”

아마 인간으로서 나만큼 오래 사는 사람은 없을 거야. 넌 몇 살이니?”

? 난 나이를 몰라.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는데, 문수 할아버지가 등을 떠밀면서 사막으로 가라, 그러셨어. 할 수 없인 떠난 길이 여기까지 온 거야.”

난들 내가 인생을 살고 싶어 살았겠니?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세상에 있더라. 우습지?”

나하고 똑같네?”

그래, 넌 아마 여덟 살이나 아홉 살쯤 되었을 거야. 그냥 여덟 살이라고 해라.”

그럴까? 하긴 내 이름도 문수 할아버지가 도담이라고 부르니 그런 줄 아는 거니까, 아누루다가 알려주는대로 여덟 살 할게.”

그래, 그러는 거다. 정신 차리고 나면 내가 네 아버지다, 내가 네 어머니다, 여기가 네 집이다, 너는 우리집 장자다, 이러는 거지. 그 전에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 불사족이 되었단다.”

왜 이렇게 답답한 불사도를 만들었어?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것같아.”

내가 처음 불사족이 되어 이 불사도를 세웠을 때엔 이럴 줄 미처 몰랐다. 난 죽음이라든가 고통 등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만 불사족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아루누다, 불사족은 어떻게 해서 되는 거야?”

"네가 한 것처럼 불사족이 만들어진다.”

"그럼 나처럼 배를 타고 나온 사람들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다 죽는 거야?”

"바다에 떠있거나, 어딘가로 떠밀려 가겠지. 폭풍우나 파도의 한 끼 식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누루다도 처음에는 무작정 배를 타고 왔겠구나?”

"그렇단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구만 년 전, 불사에 관한 연구를 하던 끝에 그 방법을 알아냈다. 그래서 이 섬을 불사족이 살아갈 터전으로 잡고 나는 아내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 행복했겠다.”

처음엔 모든 것이 꿈만 같은 나날이었단다.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바다에 띄워 해와 별로부터 불사의 비밀을 알아오게 내보냈다. 그래서 그들이 불사족이 되어 불사도에 이끌려 올 때는 늙은이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이었다.

불사족이 그렇게 점점 늘어가면서부터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백 년 이백 년 살아가다 보니 삶의 가치를 잃고 만 것이다. 그저 살 뿐이었다. 살다보니 아내가 싫어졌다. 백쉰여섯 살 때 나는 후손 중의 한 여자하고 살아보기도 했다. 그러니 부모나 자식, 부부 같은 관계라곤 있을 수가 없다.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한다든가, 누군가를 영원히 부모나 형제로 두고 산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그런 거란다. 불사족은 누구하고든지 관계를 가져도 상관이 없다. 구만 년 전에 내 아내였던 여인은 바로 제 뱃속에서 나온 8대 후손하고 눈이 맞아 벌써 칠십 년째 즐기고 있다. 바다로 내보낸 자식만 50명이 넘지. 빌어먹을, 무슨 세상이 이래.”

아누루다는 불사도의 구만 년 역사를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동자는 아누루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불사족은 왜 시합만 하는 거야?”

"불사족은 죽지 않는 몸을 갖긴 했으나 생명을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원래 생명이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었던 것이다. 무상하여 변하기 쉬운 것에 생명이 있는 것이지, 늘 똑같고 변하지 않는 것엔 생명이 없다. 공기에 생명이 있다고 하느냐? 그렇지 않다. 물에 생명이 있다고 하더냐? 그렇지 않다. 그래서 불사족에겐 생명이 없다. 불사족은 돌이나 나무나 바람 같은 존재다. 그냥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존재.

보통 사람들에겐 생명이 바로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지만 불사족은 그 생명을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의지나 이유 같은 게 없다. 결국 불사족은 처음 오백년은 무기력한 채 죽지 못해 지내다가 생명에 버금가는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곧 자신이 최고라는 자존심이란다.

처음엔 여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던 것이 변해서 여러 가지 시합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불사족 중에서 제일 잘났다는 자존심을 갖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나는 잘 해야만 되기 때문에 저마다 혼자만의 특기를 개발해서 그걸 자랑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살게 되었다. 그래서 불사족의 자존심은 곧 불사족의 생명이 되었다. 나는 남보다 우월하고, 남은 나보다 열등하다는 자존심만이 불사족을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힘이란다. 그것마저 없으면 죽는 거지.”

아누루다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오늘 시합을 마친 불사족들이 몰려와 동자를 조롱하며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 아무리 뜯어 봐도 잘난 것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아이로군.”

"저런 무기력하고 쓸모 없는 아이는 어서 빨리 불사도에서 쫓아내야만 한다구. 아누루다 같은 무능자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군.”

그때 아누라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방금 자신을 비방한 불사족을 야단쳤다.

"이놈, 너는 내 132대손이 아니냐? 감히 제 할아버지를 욕되게 하느냐

"하이고, 이 사람아. 머리는 내가 더 흰데 그게 무슨 말인가? 132대든 1320대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해? 당신 마누라였던 사람이 총 580명이었다며? 그 여자들 중 반 이상이 당신 후손 아니었어? 말 같은 소릴 하라구. 불사도에 무슨 족보가 있어?”

아누루다는 그만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동자는 불사족들을 물러가게 할 만한 특기가 없는지 마음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동자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불사족들에게 말했다.

"나는 걸음을 아주 잘 걸어. 나는 모래사막을 혼자서 건넌 적도 있어.”

그러자 불사족들은 동자에게 시합을 걸어왔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동자한테서 자존심이나 우월감을 빼앗고 열등감을 대신 주려는 것이었다.

동자는 누가 오래 걸을 수 있는지 시합을 걸기로 했다.

동자와 불사족 수천 명이 불사도 둘레를 걸어서 돌기 시작했다. 불사도를 한 바퀴 도는 데 하루가 걸리고, 그 동안에 동자와 시합을 벌이던 불사족 가운데 반이 떨어져나갔다. 다음날엔 나머지의 반이 또 기권했다.

시합은 꼭 열흘만에 끝날 수 있었다. 동자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붙던 불사족 한 명이 끝내 포기하고 만 것이다.

시합이 끝나자 동자는 불사족으로서 자존심을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동자는 아누루다의 이별을 받아야 했다.

"동자는 이 섬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생명이란 변화하는 데 있는 것이지 멈추거나 안주하는 데 있지 않다. 바다 건너 북쪽 아득히 먼 곳에 마친자의 도시가 있다. 그곳에 있는 바슬지라 선인을 찾아가라. 나도 머지않은 장래에 불사도를 떠나 죽음을 받고 싶다. , 죽음이 달콤하게 느껴지는구나. 도리어 영원이 두렵구나. 무한이라는 게 몸서리쳐지도록 무섭구나. 동자여, 잘 가거라. 혹시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불사족처럼 사는 이가 있다면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앞으로 걸어가라고 전해라. 앉아만 있다면 바위나 물이 될 것이라고 전해라.”

동자는 이별하는 아누루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자는 아누루다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아루누다여, 안녕.”

동자는 아누루다와 헤어져 불사도를 떠났다.

동자가 처음 배를 탔던 부두로 돌아와보니 그의 뒷줄에 섰던 사람들은 아직도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탓인지, 배를 파는 장사꾼이 게을러서인지 알 수 없지만 동자는 그들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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