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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아드반-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9. 전생에서 찾아온 아내

9. 전생에서 찾아온 아내

 

동자는 북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끝없이 걸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마친자의 도시가 천리 천리 또 천리 먼 길 밖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마친자의 도시는 여기서 삼천 리, 어른도 석 달을 가야 한다. 그러나 너 같은 아이는 여섯 달이 더 걸릴지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삼켜버리는 때와 곳의 계곡도 통과해야만 한다.”

동자는 눈을 꼭 감고 그 먼 길을 그려보았다.

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길이 무겁게 느껴졌다. 삼천 리를 뻗어 있는 길은 그만큼 많은 나그네를 업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동자는 생각했다.

실제로 길은 뜨거운 태양열에 거의 타들어 가고 있었다. 뿌연 먼지로 덮여 생기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길 가에는 메마른 흙부스러기만 날릴 뿐 풀 한 포기 나 있지 않았다. 하늘에는 동자가 사막길을 건널 때 보았던 물기 없는 마른 구름이 두어 점 흘러가고 있었다.

동자는 열매 주머니를 풀어 손에 들고 걸었다. 이따금 열매 주머니를 어깨에 메어 보기도 하고, 머리에 얹어 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주머니를 앞으로 멀리 던져 놓고 한참을 맨손으로 걸으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동자는 오로지 열매 주머니에 의지해서 두 달 동안이나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나그네들은, 마친자의 도시는 아직도 까마득하며, 곧 눈물을 뿌리까지 다 뽑아버릴 때와 곳의 계곡이 나올 거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자는 지친 발을 이끌고 한 계곡의 입구에 들어섰다.

동자는 그때까지 걸어온 모든 길을 뒤로 모아 한눈에 돌아본 뒤 큰 숨을 들이쉬고 계곡에 발을 들여놓았다.

 

동자가 계곡에 발을 내딛는 순간 골짜기의 나무와 풀이 춤을 추며 늙기 시작했다. 소문으로 들리던 때와 곳의 계곡이었다.

어떤 나무는 삽시간에 꽃을 피웠다가 터질 듯이 익은 열매를 매달았다. 잠깐 동안 탐스러운 모습으로 매달려 있던 열매는 금방 땅으로 떨어져 썩고, 나무는 어느새 아름다운 단풍을 몽땅 떨궈버리며 앙상한 가지를 잠시 드러내놓고 있다가 또 잎을 새로 내고, 꽃눈을 틔워 얼마 후엔 꽃이 소담스럽게 피어났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나무는 개구쟁이가 뛰어다니듯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 다녔다.

언덕도 금세 평지가 되었다가도 더 높은 언덕으로 쑥 올라오거나, 아예 산으로 변하기도 했다.

계곡은 때와 곳의 감각을 잃었다. 아니, 그곳은 어떠한 물리법칙도 적용되지 못하는 자유 공간, 자유시간의 세상이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역류하기도 했다. 계곡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이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변화는 호흡 사이에 일어났다 사라질만큼 빠르게 일어났다.

동자는 마침내 그의 의식이 밖으로부터 안으로 모여들었을 때 이상한 계곡의 변화가 자신에게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동자는 어른이 되어 나무 그늘에 서 있기도 하고, 늙은이가 되어 힘겹게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발을 딛고 있던 곳이 냇가, 나무등걸, 바위, 진흙구렁, 언덕, 산 등으로 변하기도 했다.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계곡의 무수한 변화에 동자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한 노파가 동자가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물가에 서서 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게 주마등 같은 빠른 변화 속에서 잠시잠깐 동자의 눈에 들어왔다. 얼마 후에 동자는 그 노파가 동자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자가 처음으로 그 노파를 보았을 때 동자와 노파의 거리는 열 발짝이 좀 넘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도 없이 탁 틔어 있었다.

그러나 그 노파가 열대여섯 살의 소녀가 되어 동자의 곁으로 다가올 때까지 둘 사이에 난 길은 일곱 번이나 변하고, 열세 가지의 꽃이 피었다 지고, 수백 마리의 나비와 새와 벌이 날아가고, 동자와 노파는 각각 세 번씩 아기에서 늙은이까지 생로병사를 겪었다.

마침내 동자는 동자로, 노파는 소녀로 서로 손을 마주잡았을 때 길은 모래뿐인 황야로 변하고, 그 순간 때와 곳의 계곡은 시간과 공간이 다 함께 멈추었다.

동자는 그제야 놀라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손을 잡고 서서 예쁜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녀를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소녀를 바라보는 동자의 눈이 점차 깊은 그리움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자는 그 그리움이 얼마나 멀고 깊은 데서 밀려오는 건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누구..., 너는?”

도담?”

소녀는 무척 반갑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 도란 아가씨.”

낯선 이름이다. 목소리는 귀에 설고 얼굴은 눈에 설고 그 이름은 기억에 설다.

하지만 동자 역시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를, 사막을 건넌 후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이 그렇게 반가웠던 것처럼 그만큼 깊은 마음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동자는 소녀를 바라보면서도 단순히 그 소녀만을 보지는 않았다. 동자는 소녀를 완전한 한 영혼, 전생에서 전생에서 이승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실체를 보려 했고, 또 그렇게 보았다. 소녀는 그런 모습으로 동자의 눈 속에 오랫동안 머물러 주었다.

동자의 길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선 소녀는 이윽고 영롱한 눈빛을 반짝이며 동자에게 말했다.

역시 날 알아보지 못하네? 그래. 우리는 지금 아무런 약속도 없이 이유도 없이 우연히 만난 거야. 동자의 길에 내가 나타난다는 것은 누구도 예고하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일이 예고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거야. 넌 아마 마친자의 도시에 사는 바슬지라 선인을 만나기 전에는 다른 인연은 아무도 만나지 못할 거라고 믿었겠지. 왜 불사족 아누루다는 도담이가 나를 만나리라는 예언을 하지 못했을까?”

도란 아가씨. 남의 얘기 말고, 우리 얘기를 듣고 싶어.”

도란 아가씨는 동자의 손을 이끌어 얼음처럼 굳어버린 때와 곳의 계곡을 거닐면서 말했다.

도담 동자여. 오늘 우리는 삼천 생 전부터 계속된 나의 발원(發願)으로 아주 잠시 만나는 거야.”

삼천 생 동안이나 나를 만나려 했다구? ?”

동자는 놀라는 눈빛으로 도란 아가씨의 깊은 눈을 바라보았다.

도란 아가씨의 눈은 어느새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언제던가……. 삼천 생 전의 아득한 옛날, 난 어떤 젊은 청년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어. 그 청년은 밤이면 밤마다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곤 했어. 그이는 나를 어찌나 사랑했던지 그의 전 재산을 우리 아버지에게 바치고 나를 아내로 데려갔어. 그 후에도 우린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서 떨어질 줄 모르고 늘 함께 붙어 있곤 했어.

그이가 먼 나라로 장사를 떠나면 나는 밤잠도 자지 않으며 그이가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어. 그래서 약속의 날이 나흘이나 사흘쯤 앞으로 다가오면 나는 청사초롱에 불을 밝히고 그이가 돌아오실 길목에 서서 기다리고, 그러면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 그이는 그만큼 미리 당겨 와서 우린 밤길을 같이 걸어오곤 했지. 그이는 장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진주목걸이며 금팔찌, 또 향수와 화장품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나를 기쁘게 해 주었어. 그러나 장사꾼이란 몇 달, 심지어는 일 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법. 그러나 그만 해도 괜찮은 거였어.

어느 날 마차 스무 대를 몰고 장사를 떠난 그이는 일 년이 가도 이 년이 가도 돌아올 줄을 몰랐지. 나는 매일 밤 정화수를 떠놓고 신이란 신은 다 불러가며 그이가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어. 그러나 그이는 십 년이 가도 이십 년이 가도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어느 날 정화수 사발 앞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지. 그때까지도 그이는 안 돌아오지 않은 거야.”

영영?”

그래, 영영. 장사꾼이란 새 길을 가고 싶어하고, 새 물건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거든. 다른 세상, 다른 사람들하고 어울리느라 그만 고국의 가족을 잊어버리기도 해.”

저런... 어떻게 그럴 수가?”

동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

?”

그이는 바로 너였어.”

…….”

동자는 순간 넋을 잃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삼천 생 전의 먼 과거가 보였다.

그제야 도란 아가씨의 눈빛을 보니 거기 천길 만길 가라앉은 아득한 그리움이 보였다.

도란 아가씨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도란 아가씨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따라 동자의 어깨도 들썩거렸다.

네가 전생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는 채 다음 생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어. 나는 전생의 못 다한 사랑과 죽을 때까지 계속된 발원으로 너를 다시 만나긴 했으나 너는 아마도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었는지 내 남편이 아닌 양아들로 내 앞에 나타났어. 나는 양아들인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남편의 질투를 샀어. 결국 너는 다 자라기도 전에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지.

넌 또 그 후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 나는 그래서 또 한 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야만 했어.

그 다음 생에서는 인연도 흩어졌는지 우린 겨우 열흘밖에 같이 지내질 못했어.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너의 모습에 비치는 아련한 향수를 느끼고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했으나, 너는 내 몸만 짓밟고 어디론가 또 가버렸어.

그 다음 생에 나는 너의 하녀가 되어 만났으나 단 하루만에 쫓겨나고 말았어. 널 바라보는 내 눈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네 아내가 나를 쫓아낸 거야.

그 뒤로도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한 가닥 실오라기만한 인연을 끈질기게 당겨 보았으나 번번이 이룰 수가 없었어. 그래서 우리는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과 손님으로, 혹은 거리의 스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으로 점차 멀어지다가 결국 우리의 작은 인연마저 깨끗이 지워져 버린 어느 생엔가 단 한번도 서로를 만나지 못하고 영영 부딪치지 않는 남남으로 지낸 적도 있었어. 그저 풍문으로만 들리는 이름, 바람처럼 날아와 잠시도 머물지 않고 바람처럼 날아가는 그런 존재, 그게 우리의 마지막 인연이었어.

너는 아마도 너를 바라보는 어느 여인의 눈초리가 다른 여인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낀 적이 있었을 거야. 나는 그런 식으로밖에 너를 바라볼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런데도 너는…….”

도란 아가씨는 저 삼천 생 전에서부터 밀려오는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눈물만 흘려내었다. 동자도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도란 아가씨는 옷고름으로 동자의 눈가를 닦아주면서 다시 그 서글픈 사랑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기를 여러 생. 오늘 이 자리, 내 삼천 생 전의 발원, 수천 사발에 담겨져 어디론가 흩어져 간 나의 기도가 삼천 생을 떠돌아다니다가 동자와 내가 인연에도 없는 우연한 교차를 하는 이 순간에, 그 기도들이 그만 지쳐 우리 사이에 소나기처럼 떨어진 거야.”

동자는 삼천 생 전의 아내인 도란 아가씨를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동자는 전생의 아내를 바라보면서 손을 꼭 잡았다.

동자와 도란 아가씨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동자가 얼굴 가득히 흘러내린 눈물을 옷깃으로 훔치면서 먼저 말했다.

오늘 우리들의 시간은 얼마나 돼?”

마흔세 번 숨쉬고, 심장이 아흔다섯 번 고동칠 시간. 그러나 우리들의 시계는 여기 내 손에 있어.”

무언데?”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재는 생체시계를 갖고 있어.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과 생각, 믿음, 사랑, 용기 같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재는 시계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시계를 녹슬도록 내버려 두지. 시계를 잃은 사람은 남의 시계로 자신의 시간을 재. 그래서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에서나 자기 시계를 가지고 있는 시간 조절자가 한 명은 있어야 하는 거야. 그것이 얼마나 빠르고 얼마나 느리든 간에 시계를 잃은 사람들의 시간을 재어 줄 그런 사람의 시계말이야. 동자와 내 시계는 여기 따로 놓여 있으니까 시간은 얼마든지 같이 할 수 있어. 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네가 일으켜 주는 것만으로 우리 인연은 다시 맺어질 수 있어. 하지만 동자의 그러한 마음이 아주 없어져 버리면 시계는 저절로 우리들 몸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게 될 거야.”

동자는 도란 아가씨의 손을 잡은 채 마주보기만 했다.

난 마친 자의 도시에 가야만 해.”

이윽고 그들의 시계는 도란 아가씨의 손으로부터 서서히 떠올라 그들의 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도란 아가씨가 안타까운 듯 흐느꼈다.

. 이제 헤어지면 우리 사이에 만남이란 영영 없을 거야. 천 년을 가든, 만 년을 가든…….”

동자는 물끄러미 도란 아가씨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이제는 영원히 없어지는 둘 사이의 인연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도란 아가씨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면서 동자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동자는 아득한 옛 인연이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들의 인연이 영원히 없어짐을, 이제는 또 다시 모여지지 않을, 인연의 완전한 소진을 알리는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도란 아가씨의 얼굴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소녀의 윤기있는 살결이 여러 겹의 주름으로 바뀌는 동안 동자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았다. 도란 아가씨의 얼굴은 몇 번인가 변신을 거치면서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도담 동자의 전생의 아내, 그 도란 아가씨는 동자의 시선으로부터 멀리 물러나 조금씩 모습을 감추었다.

동자는 그것이 다시는 맺어질 수 없는 마지막 이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슬퍼하지 못했다. 꺼진 불꽃을 가까스로 모아들고 옛 인연을 찾아온 도란 아가씨의 마음을 잘 알면서도 동자는 오로지 눈앞에 펼쳐진 새 길만 바라보았다.

때와 곳의 계곡은 차츰 아무 것도 없는 광활한 평원으로 변했다. 마치 동자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잠시 잠깐 꾼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동자는 영원히 없어져 버린 전생의 인연을 조금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동자는 마구 울부짖었다. 눈물이 주루룩 쏟아졌다. 참고 있던 그 눈물이다.

도란 아가씨. 내 전생의 아내여. 그리워. 그립단 말이야.”

동자는 전생의 아내와 지낸 삼천 생 전의 신혼을 생각하면서 깊이 흐느꼈다. 어쩌면 동자는 그때 아내에게 돌아가지 않은 어떤 이유를 회상하며 참회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실은, 느끼든 안느끼든 그것만으로도 슬프다.

하지만 동자는 늘 새로운 길을 가려는 본능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난 어쩌면 삼천 생 전부터 새 길을 찾아다니기만 한 게 아닐까. 과거를 지우지 않으면 미래는 아마 오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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