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소지옥의 돕는자
동자는 아득한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해안에 길다랗게 뻗어 있는 뗏목길을 걸어서 조각가 푸른다가 가리킨 니라야성을 찾아 떠났다.
뗏목길은 바닷물에 떠올라 니라야성까지 이어져 있었다. 바닷물은 동자의 발목까지 차올라서 작은 파도로 힐끔힐끔 핥듯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동자의 발목에 하얀 물거품이 일었다.
뗏목을 밟아 건너던 동자는 길을 돌아가는 나그네를 만났다. 나그네는, 니라야성은 뗏목길을 걸어온 만큼 남아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때는 바다를 걷기 시작한 지 나흘이 되던 날이므로, 동자는 니라야성까지는 여드레가 걸릴 것이라고 계산했다.
동자는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무리지어 갔기 때문에 그다지 심한 피로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도 길을 갈 수 있었다. 여행자들과 나누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든가 발을 간질이며 헤엄쳐 가는 물고기로 잠시도 외로울 틈이 없었다.
동행하는 여행자 중에는 잿빛 옷을 허름하게 걸쳐 입은 늙은 수도승 한 명과 온 누리를 속속들이 뒤지고 다니며 물건을 팔러 다닌다는 장사꾼이 있었다. 그들은 늘 동자를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동자는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언제나 그들 가운데에 서서 철벅철벅 물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니라야성은 문이 두 개로 갈려 있다며?”
동자가 쳐내는 물방울로 수도승의 잿빛 가사는 이미 아랫도리가 흥건히 젖었다.
"그렇단다. 하나는 소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또 하나는 소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란다. 그곳은 진짜 천국과 진짜 지옥을 쏙 빼닮았다더구나. 누구는 천국과 지옥의 그림자라고 말하지. 그래서 여행자들은 그곳에 가서 미리 심판을 받아 보고 싶어하는 거야.”
"그럼 수도승도 그걸 알아보러 가는 길이야?”
수도승은 동자의 거친 발걸음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을 피하려 한 걸음 물러서며 대답했다.
"그렇단다.”
"수도승은 그런 심판도 직접 못하나? 그걸 못하면 깨달은 게 아니잖아? 그런데 뭣 하러 뻔한 심판을 받으러 가는 거야? 차라리 공부를 계속하는 게 낫지 않아?”
수도승은 아예 헐렁한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려 한 손으로 잡고 걸었다.
"좀 차분히 걷거라, 동자야.”
동자는 그제야 자신이 바닷물을 너무 차고 간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발목이 너무 간지러워.”
수도승은 동자에게 그가 심판을 받으러 가는 이유를 길게 설명했다. 동자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때 몹시 불편해 하는 수도승을 돕기 위해 장사꾼이 소지옥에 있다는 불쌍한 이를 ‘돕는자’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돕는자는 소지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불쌍한 죄인들을 언제까지나 돕겠다고 맹세한 거룩하신 분이란다. 소지옥에서는 그분의 성스러운 목소리나 모습을 한 번 뵙기만 해도 금세 소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더라.”
"나는 그분을 만나러 가는 거야.”
동자는 돕는자의 거룩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장사꾼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자는 남을 돕는다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도 모르고, 얼마나 도와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돕는자는 대단히 거룩할 거라고 상상했다.
이윽고 동자는 여행자들의 긴 행렬에 밀려 니라야성에 이르렀다. 성문 앞 넓은 뜰에는 파수병이 창에 의지해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심판도 않고 잠만 자나?”
동자가 실망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파수병 뒤에 앉아 역시 졸고 있던 성주가 부시시 눈을 뜨더니 그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심판을 기다리던 여행자들은 파수병과 성주가 잠자는 틈을 타서 소천국으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수도승도 그들을 따라 소천국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동자가 가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돌아섰다.
"소천국을 가려고 온 게 아니라 심판을 받으러 왔다면서? 조금만 기다리면 성주가 잠에서 깨어날 거잖아?”
동자는 성주의 흔들의자를 잡고 조금씩 흔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행자들은 계속 소천국으로 몰래 들어갔다.
동자는 더 세차게 성주의 의자를 흔들었다. 마침내 흔들의자는 성주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듯이 거세게 흔들렸다. 결국 성주는 소리를 꽥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웬놈이냐?”
동자는 의자를 잡은 손을 놓고 성주에게 다가가 말했다.
"심판을 안 할 거야?”
"알았느니라. 아함. 나는 잠을 매우 잘 잤노라. 이제부터 너희를 심판하겠노라.”
수도승은 심판없이 소천국으로 달아나고 있는 여행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성주에게 따졌다.
"왜 저들은 심판하지 않는가요?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요?”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 지나간 여행자는 저희가 문을 정해 가느니라. 그러나 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내 심판을 받아야 하느니라. 그것이 니라야성의 법이니라. 니라야성은 이렇게 모든 게 공평하니라.”
"그래도 우리는 저들에 비해 불리합니다.”
"남들 끌어들이지 말고 네가 저들에 비해 불리하다고 말하라. 너 자신의 이야기만 하란 말이다.”
"예. 나는 저들에 비해 대단히 불리합니다.”
"‘대단히’라는 말이 ‘우리’라는 말 대신에 들어간 걸 보니, 우리라는 말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보구나. 그러나 말은 어디까지나 말, 말을 다르게 한다고 해서 원래의 바탕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라. 그대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수도승이로구나. 남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춰 보지 말고, 자기 자신을 거울 삼아 세계를 비추어 보라. 그러면 네 자신이 얼마나 공평한지 알게 될 것이다.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것은 너 스스로 불공평하기 때문이니, 니라야성의 법과는 상관이 없느니라. 저들이 소천국의 문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니 조금도 불리할 게 없느니라. 나도 처음엔 잠도 자지 않고 여행자들을 모두 다 심판해서 소천국과 소지옥을 정해주었지만 이제는 나대로 내 일에 요령을 터득해 낮잠을 늘 충분히 자고 있노라. 그럼 이제부터 너희를 심판코자 하노라.”
성주는 졸고 있던 파수병을 손으로 두드려 깨웠다. 파수병은 졸음에서 벌떡 깨어나 흔들의자 뒤에 드리워진 휘장을 걷어냈다.
휘장이 걷힌 곳에서는 작은 샘이 푸른빛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저 샘이 마음을 비춰내는 ‘밝은 거울’이니라. 누구나 저 거울에 얼굴을 내밀면 먼 기억들을 밝혀낼 수 있느니라. 이 샘이 보여주는 기억은 전생에서 죽을 때 나타내던 임종상(臨終相)이니라. 누가 먼저 나서겠느냐? 말 많은 수도승이 좋겠구나.”
수도승은 긴장된 모습으로 샘에 얼굴을 내밀었다.
잠시 후 푸른빛을 진하게 띠고 있던 샘은 점차 맑은 거울처럼 변해서 물결이 마지막 숨을 쉬듯 파르르 떨다가 잠잠해지면서 큰 사원을 나타냈다.
사원의 큰 방에는 수도승 수십 명이 스승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수도승들이 앉아 있는 중앙에는 임종을 기다리는 늙은 수도승이 제자 네 명한테 기대어 바튼 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앉아 있었다. 제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늙은 수도승이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앉은 채로 죽어야 덕이 높다는 것이 사원에 오랫동안 전해내려온 전통이기 때문에 늙은 수도승도 임종의 순간을 가부좌를 튼 채 맞이하려고 안간힘을 다 하고 있는 중이다.
늙은 수도승은 뭐라고 더듬더듬 말을 꺼내려 했지만 입 속에서만 맴도는 말은 마디마다 끊어져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도가 높은 수도승이 임종 직전에 제자들을 위해서 최후 문답(最後問答)을 허락하는 듯하기도 했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제자들의 질문을 받아낼 기운조차 없는 스승에게 뜻깊은 질문으로 가혹한 쇠침을 찌를 제자는 없었다.
자신의 임종을 예언한 지 벌써 12년, 곧 죽게 될 것이라면서 써놓은 ‘세상을 떠나는 글’ 사세장(辭世狀)이 역대 조사(祖師)들의 영정이 걸려 있는 벽에 나란히 매달려 근엄하게 흔들거렸으나 그것을 눈여겨보는 제자는 누구하나 없었다.
모든 최악의 상황에서 마지막 임종의 의식만은 꼭 해 보이겠다는 늙은 수도승의 의지는 결국 힘에 겨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제자들의 버팀에도 아랑곳없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죽은 것이다.
샘은 다시 숨결처럼 일어나 흔들리다가 곧 진한 푸른 빛깔을 내면서 출렁거렸다.
성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심판을 내렸다.
"그대가 죽기 전에 받는 심판은 모두가 네 인생의 일부이니라. 그러므로 심판은 심판이 아니며, 심판은 언제나 공정하다.”
"그럼, 전...”
늙은 수도승이 초조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죽음 앞에서도 위선을 벗지 못했구나. 소지옥감이로다.”
성주의 준엄한 심판이 내리자 수도승은 동자와 장사꾼을 돌아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소지옥으로 뛰어들어갔다.
다음은 장사꾼이 판결을 받을 차례다.
장사꾼은 샘으로 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시장 한 구석이 나타나면서 물건을 잔뜩 늘어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는 장사꾼의 모습이 보였다.
동자는 문득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 급살이라도 맞을 모양이지?”
잠시 뒤에 장사꾼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은 공포에 새파랗게 질렸다.
장사꾼 앞으로 창과 칼을 든 싸울아비들이 나타나 물건을 발로 걷어차고 집어던지며 가게를 온통 짓밟아 버렸다. 병사들은 쓸 만해 보이는 물건들을 모조리 걷어다가 마차에 실었다. 병사들이 마차를 몰고 떠나려 하자 장사꾼이 죽기를 무릅쓴 비장한 각오로 한 병사를 붙잡고 말했다.
"값을 내시오. 물건값을!”
"뭐? 뭐를 내라구?”
"돈을 내고 가져가란 말이오. 돈이 없다면 뭐라도 내놓고 가시오. 장사꾼의 자존심마저 빼앗아 가지는 말란 말이오.
"뭐라고? 무엇이든 내 놓고 가라고? 흐흐흐. 줄 게 없으니, 좋아. 네 모가지를 끊어 값을 치르마.”
병사는 칼을 뽑아 장사꾼의 목을 내리쳤다. 마지막 순간까지 장사꾼으로서 거래를 마친 그의 목이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성주는 박수를 치면서 소천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훌륭하오.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내었소. 물건값을 받지 못하고 물건을 내어준다는 것은 장사꾼으로서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 그대는 죽지 않은 장사꾼이오. 아, 이제 잠을 계속 자야겠노라. 다음 여행자들은 내가 다시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든가, 아니면 마음대로 가도 되니 알아서 하도록 하라. 파수병은 그만 샘에 휘장을 드리워라.”
동자는 눈을 막 감은 성주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냥 돌아섰다. 돕는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소지옥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장사꾼이 소천국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줄을 서서 심판을 기다리던 많은 여행자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갔다.
동자는 돕는자가 있다는 소지옥 쪽으로 걸어갔다.
동자는 잠든 성주와, 휘장을 치고 졸기 시작한 파수병을 한 번 돌아보고 돕는자가 있다는 소지옥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술냄새가 확 풍겨왔다. 동자는 코를 쥐고 소지옥에 들어섰다. 술판이 크게 벌어지고 소지옥의 주정뱅이들이 모여 시끌벅적 주정을 하고 있었다.
동자는 술에 취해 구역질을 하고 있는 한 주정뱅이에게 물었다.
"소지옥은 무척 쓸쓸하지? 또 고통스럽기도 하고?”
"뭐, 뭐야?”
"쓸쓸하냐구 물었어. 고통스럽지 않느냐구? 그러니까 술을 먹는 거겠지?”
"내가? 내가 왜 쓸쓸하고, 고통스럽지? 하하하. 세상 어디를 간들 이보다 행복하며 평화스러운 곳이 또 있을까? 비켜라, 난 그따위 농담으로 술 마실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난 술을 더 마셔야겠다.”
동자는 얼굴 가득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주정뱅이들을 보고, 소지옥이 그렇게 쓸쓸하고 고통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동자가 다음에 만난 무리는 싸움꾼들이었다. 싸움꾼들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잔뜩 신이 올라 싸움질을 멈추지 않았다. 때리고 맞는 쾌감이 그들을 신나게 하는 듯했다.
"싸우지 마. 왜 싸우고 있는 거야?”
동자가 한 싸움꾼을 떼어 말리며 말했다.
"오. 잘 만났다.”
그 싸움꾼은 동자의 머리를 한방 갈겼다. 동자는 아이쿠 신음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동자는 피가 터진 머리를 흔들며 땅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일어났다.
싸움꾼들은 닥치는 대로 치고 받으며 싸움을 즐겼다.
싸움꾼들 옆에서는 노름꾼들이 모여 앉아 빨갛게 충혈된 눈을 꿈벅거리며 노름판을 벌이고 있었다.
동자는 또 도둑들의 무리를 만나 하마터면 할아버지가 준 열매 주머니를 도둑맞을 뻔했다. 도둑들은 긴장과 웃음이 뒤섞여 아주 떠들썩했다. 그들은 서로 훔쳐내는 일을 계속했다. 훔치는 물건은 돌멩이나 숟가락, 낡은 옷가지 등 값어치가 없는 것들이었으나 그들은 훔친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기뻐했다.
동자는 다음에 노예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주인으로 섬길 사람을 기다려온 것처럼 동자의 발 앞에 꿇어앉아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들은 누구에게든 복종하는 것만이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는 듯했다.
동자는 노예들이 못마땅하였으나 그들은 계속 머리를 조아리며 동자를 따라다녔다.
"돕는자를 만나면 소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어요. 동자님. 그러지 않아도 돕는자의 도움으로 소천국에 갔던 노예들이 여럿 있었지만 모두 돌아오고 말았어요. 소천국에 가보니 아무도 일을 시키는 사람이 없더래요. 우린 주인을 모시지 않고는 한시도 살아갈 수가 없어요.”
동자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노예들한테서 힘겹게 도망쳐 나와 창녀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창녀들은 동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으나 동자의 울음으로 모두 시큰둥해졌다.
"하긴 아직도 말랑말랑할 걸 뭐.”
한 창녀가 입이 뾰로통해져서 말했다.
"난 돕는자를 만나러 왔어. 불쌍한 소지옥 사람들을 돕는 거룩한 분 말이야.”
"쳇! 그게 무슨 돕는자야? 난 한 번도 그치에게서 도움을 받아 본 적이 없다구.”
그때 한 창녀가 나서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돕는자는 내게 환희를 주었어. 하지만 그의 침대가 너무 딱딱해서 늘 고생한단 말이야. 호호호.”
창녀들은 깔깔거리면서 동자를 비웃어댔다.
"우릴 도우려거든 젖 큰 저 애만 탐하지 말고 골고루 도와주라고 말 좀 전해 주렴. 이 불 같은 몸뚱아리를 좀 식혀 달라고 말이야!”
"너도 어서 키워 가지고 내게로 오려무나, 언제든지, 언제든지 말이야.”
동자는 끝도 없이 만나는 소지옥의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무리로 나뉘어 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동자는 그뒤 니라야성까지 동행한 수도승을 만났다. 그는 위선자의 무리에 섞여 근엄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입 속으로 거짓 만트라(眞言)를 외우고 있었다. 위선자들은 가면을 한 채, 자꾸만 본래의 얼굴을 감추고 다른 얼굴을 닮으려 애를 썼다. 숨길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숨겼다.
동자는 이번에는 거지떼를 만났다. 그들은 먹을거리를 잔뜩 쌓아 놓고도 굳이 남의 것을 구걸해다가 허기만 면함으로써 거지의 얼굴을 꾸몄다.
동자는 거지떼를 지나 길을 가다가 방랑자와 바람둥이 무리를 만났다. 방랑자들은 아무 데도 머물지 못하고 소지옥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중이고, 바람둥이들은 창녀 무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동자는 그 뒤로도 속이기를 즐기는 사기꾼과 허풍장이, 구두쇠, 거짓말쟁이, 게으름뱅이 등의 무리를 거치면서 소지옥의 큰길을 걸어갔다. 그동안에 동자는 사기꾼과 허풍장이와 거짓말장이 때문에 여러 차례 길을 잘못 들어 헤매곤 했다.
모두들 저희들의 죄를 마음껏 즐기고 있을 때 한 어두운 길목에 쪼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동자는 곧 그가 돕는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소지옥에서 쓸쓸하고 외롭게 지낼 사람은 틀림없이 돕는자 한 명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자가 그동안 상상했던 돕는자의 거룩한 모습들은 순식간에 날개를 펼쳐 멀리 날아가 버렸다. 동자는 깊은 실망을 안고 돕는자의 곁에 가서 앉았다.
동자가 옆자리에 앉자, 돕는자는 졸음에 겨운 몸짓으로 머리를 털면서 동자를 맞이했다.
"어서 와라, 도담 동자.”
돕는자가 작은 소리로 침통하게 말했다.
"돕는자, 안녕. 돕는자는 어째서 죄인들을 구원하지 않아? 빨리 소천국으로 보내 줘야 될 게 아냐?”
"난 지쳤다.”
"몇 명이나 보냈길래 벌써 지쳐?”
"데려다 준 건 수없이 많지. 하지만 그들은 이내 소천국이 지긋지긋하다며 다시 소지옥으로 돌아오고 말았어. 도망치듯이 말이야. 결국 난 단 한 명도 돕지를 못한 거야.”
"그래서 지쳤구나.”
동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단다. 소지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가장 소천국을 그리워하며 도움을 청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밖에 없구나. 남을 돕는다는 것은 스스로 남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일 뿐이야. 남을 돕는다는 것은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과 같은 거야.”
"그럼 돕는자는 무슨 도움을 얻고 싶은데?”
"돕는다는 만족이란다. 난 도움을 주고, 돈 대신 그를 도왔다는 만족을 얻는단다. 누굴 도왔다고 해서 그 도움을 받는 이가 장차 어떤 대가를 치르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지. 주고받는 모든 관계는 그 자리에서 청산되는 거야. 은혜란 외상을 놓을 수도 없고, 빚을 질 수도 없어. 그런데 이 소지옥에서는 도무지 내게 만족을 주는 이가 없는 거야. 이 소지옥에는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야. 나는 소지옥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구나. 내 약속, 내 맹세만 없었더라면 당장 여기를 떠나 버리련만. 내 약속, 내 맹세를 저버리자니 너무나 부끄러워서….”
동자와 돕는자가 쓸쓸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 주정뱅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돕는자에게 다가왔다.
"돕는자님, 한 잔 안 하시려우? 우리 소지옥의 불명예, 단 한 명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여.”
동자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소지옥의 갖가지 진풍경을 바라보았다. 소지옥은 어느 세상보다도 활기가 넘쳤다. 거리의 곳곳이 춤과 노래로 흥청거렸다. 매일매일이 잔치라고 돕는자가 설명했다.
그런 곳에서 오직 한 사람, 그들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돕는자만이 침울한 표정으로 소지옥의 즐거운 분위기를 거스르는 것이다.
돕는자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너무 지쳐 맹세를 지키기가 아득해질 땐 나도 그만 소지옥의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즐긴단다.”
"돕는자도 소지옥이 즐거워?”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버렸어.”
동자는 뭔가 답답하다는 걸 느꼈다. 소지옥의 이상한 마력에 이끌려 버린 돕는자처럼 소지옥이 왜 지옥인지조차 스스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들을 구원할 방법은 있을까? 즐겁다는 것은 그것으로 완전한 것이 아닐까? 아니야, 아니야...’
그때 돕는자가 동자의 생각을 돕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다.
"동자여.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질서와 평화보다는 그것을 위해 만들어 놓은 법을 더 좋아하듯이, 진리를 가리키는 육신을 저들은 더 좋아한다. 육신은 언제나 진리를 가리키는 지표, 그걸 통해 진리를 보아야 하는데 소지옥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진리를 가리키는 몸을 더 좋아하여 그것에 빠져 있다.”
돕는자의 말을 듣고 있던 동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래. 돕는자여, 용기를, 믿음을 갖고 계속 저들을 구원하는 거야. 소천국에 보내려는 생각만 앞세우지 말고, 그들 스스로 소지옥을 떠나가도록 알려줘야 해.”
도담 동자는 그제야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돕는자여, 난 마술을 부릴 수 있어. 소지옥을 온 세상에 퍼뜨려 놓는 거야. 그럼 이들의 생각도 차츰 풀어질 수 있을 거야. 죄라고 해서, 나쁜 것이라고 해서 한 군데로 모아 놓는 것은 아주 큰 잘못이야. 인간에게서 다른 환경이나 다른 조건을 누릴 권리를 빼앗아선 안 돼.”
동자는 머릿속으로 마술을 위한 믿음을 내기 시작했다.
동자가 믿음을 내는 동안, 니라야 성주의 심판을 받지 않고 소천국으로 들간 여행자들이 소지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조금씩 흐려지다가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사이 소지옥이 온 세상으로 흩어진 것이다. 소지옥은 온 세상으로 변한 것이기도 하고, 세상 그 자체이기도 했다.
돕는자가 웃으면서 동자에게 다음 길을 안내했다.
"동자여, 니라야성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로 나아가서 불사족 아누루다를 만나라. 사람이 무엇으로 하여 긴 세월을 살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돕는자와 헤어져 가벼운 걸음으로 바닷가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돕는자는 이젠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거야. 진리는 흐르는 데 있음을 그는 알려 준 거야. 나는 길을 가고, 길은 내 육신이고...”
* 돕는자란? 지장보살의 화현. 목련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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