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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아드반-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6. 조각가 푸른다

6. 조각가 푸른다

 

동자는 바위산으로 조각가 푸른다를 찾아 길을 떠났다.

바위산을 뒤덮은 바윗돌 사이사이에 조각이 서 있었다. 동자는 이 조각들을 감상하면서, 산에서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를 따라 푸른다를 찾아 걸어 올라갔다.

오래지 않아 동자는 망치질 소리가 들려오는 바위산 계곡에서 바삐 움직이는 작은 점 하나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푸른다는 바위를 타고 앉아 돌을 쪼고 있었다. 푸른다는 동자가 옆에 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조각에 여념이 없었다. 바위가 깎여나가는 모습이 점점 토끼를 닮아가는 듯했다. 결국 푸른다가 정을 대고 망치질을 해대던 바위는 앞발을 들어 얼굴을 닦고 있는 토끼로 변했다.

그제야 푸른다는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동자를 바라보았다.

", 도담 동자로구나. 험한 산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푸른다, 안녕. 조각 작품을 구경하면서 왔어. 푸른다는 이 바위산을 온통 조각으로 만들어 놓으려는 거야?”

"그렇단다. 나는 바위에 숨어 있는 내 친구들을 깨워야 한다. 간절하게 두드리면 녀석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거든. 방금 나는 바위에 숨어 있던 토끼를 꺼냈단다.”

"조각은 푸른다가 마음대로 깎아서 만드는 거잖아? 바위를 보고 토끼를 깎고 싶으면 토끼를 깎고, 다람쥐를 깎고 싶으면 다람쥐를 깎는 게 아니야?”

"아니다. 너도 보았지만 이 토끼는 수백 년 전부터 바위에 숨어 있었다. 아니, 갇혀 있었던 거지. 난 그런 걸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꺼내주었을 뿐이야.”

푸른다는 땀에 젖은 저고리를 벗어 바위에 펼쳐 놓으면서 말했다.

푸른다의 말은 대단히 힘이 있고, 동자는 푸른다의 불타는 듯한 눈빛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푸른다는 바위에 숨어 있는 게 뭔지 다 볼 수 있는 거야?”

"보아라, 저기 저 큰 바위를. 넌 저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겠니?”

"모르겠어.”

"너는 모를 거다. 저 속에선 지금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사자 일곱 마리가 배 고파 울고 있단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바위엔 새끼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어미 사자가 들어 있다. 난 빨리 저 새끼 사자들과 어미 사자를 꺼내 줘야 한다.”

조각가 푸른다는 다시 저고리를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망치와 정을 가지고 그가 가리킨 바위로 갔다.

푸른다는 새끼 사자가 들어 있다는 바위부터 두드리기 시작했다. 푸른다의 망치질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빨랐다.

"이 바위산엔 아직도 많은 친구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며 긴 잠을 자고 있다. 난 친구들을 모두 잠에서 깨워 줘야만 한다. 그들은 벌써 수만 년 전부터 나를 애타게 기다려 온 거야. 수만 년이나.”

"외롭지는 않아?”

"아니다. 바위산엔 내가 찾으려는 친구들이 모두 다 있다. 난 네가 이 산을 떠나가더라도 언제든지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내 기억은 모두 바위 속으로 깃든단다. 바위엔 나의 옛 추억들이 빠짐 없이 들어 있다. 너도 그러한 추억거리가 되어 이 산의 어느 바위엔가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내가 아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바위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너도 그렇게 깃들 것이다.”

"그럼 나를 사막으로 보낸 할아버지도 들어 있어?”

"난 그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모르는 사람은 내 바깥 세계에도 없을 뿐더러 내 안에도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바위 속에 들어 있게 될 것이다. 바위산은 곧 내 세계다. 바위산은 온 우주를 머금고 있다. 바위산의 바위 하나하나에 우주가 들어 있으며, 부서진 바위 조각이나 작은 모래알에도 마찬가지로 우주가 가득 차 들어 있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단다.”

푸른다는 큰 바위 속에 숨어서 어미를 찾고 있는 새끼 사자 일곱 마리를 다치지 않게 깨우기 위해 조심스럽게 바위를 쪼아댔다. 곧 새끼 사자들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 푸른다는 마치 오래 전부터 친했다는 듯이 그들의 갈기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푸른다는 도담 동자의 손을 끌어다 새끼 사자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동자는 섬뜩한 마음에 얼른 손을 빼어 가슴에 묻었다. 그러자 푸른다는 소리내어 웃으면서 그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도담 동자여. 나는 바위산에서 40여 년 동안 조각을 해 왔다. 내 나이 일곱 살 때, 사막에 그림을 그리다가 끝내는 그 사막에 그려진 당신의 그림에 쓰러져 생을 마친 화가 아버지는 내게 바위산의 조각가가 되라고 유언하셨다. 바람도 없이 늘 고요한 그 사막엔 아직도 화가 아버지의 그림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일생을 사막에 걸고 늘 위대한 작품을 그리기 위해 애쓰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의 서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못 다 이룬 그 서원을 대를 이어 이루어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위대한 그림, 아버지의 서원은 바로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그리는 일이었단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내게 이렇게 이르셨다.

푸른다야. 너는 네 안에 들어 있는 진짜 푸른다를 찾아낼 수 있겠느냐? 진짜 푸른다는 늙거나 젊거나 또 생김이 잘 났다거나 못 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맛이 좋다거나 아프다는 느낌도 갖지 않는다. 진짜 푸른다는 지금의 네 모습처럼 두 손과 두 발의 형상을 짓고 있지 않다. 태어나지도 않으며, 태어난 적도 없을 뿐더러 또한 영원히 죽지 않는다. 아니 태어난다든가 죽는다든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모습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하나이기도 하고 수천 수만이기도 하다. 나는 내 안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나는 그림을 통해 그것을 찾아보려고 일생을 바쳤지만, 사막에 그려진 것은 환영이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너는 꼭 찾아야만 한다. 바위산에 가서 네 안에 숨어 있는 진짜 푸른다를 꺼내도록 하라. 음악가 할아버지도 이루지 못 한 꿈이다. 할아버지는 소리를 통해 할아버지의 참모습을 빚어내시려다 수천 개나 되는 악기들만 남기고, 내가 네게 이르듯이 안타까운 유언만 남기곤 세상을 떠나셨다. 너는 네 자식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조각을 해야 한다. 분명 조각을 통해 네 참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할아버지와 내가 항상 너를 지켜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유언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채 이 산에 와서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간절한 서원을 이해하여 지금은 조각을 하는 데 갖은 정성을 쏟고 있다.”

동자는 새끼 사자의 꼬리를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

"그럼 푸른다는 진짜 푸른다의 모습을 찾아냈어?”

"아니, 아직은. 그러나 난 내가 조각한 것에 생명을 넣어 줄 수 있지. 또 망치나 정이 없이도 내가 원하는 대로 바위 속의 친구들을 꺼낼 수도 있다.”

"어떻게?”

푸른다는 바위산에 아름답게 늘어서 있는 자신의 조각들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저것들은 내 손이 닿기 전에 이미 저 모습들을 갖추고 있었단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저 모습으로 존재해 온 것이다. 나는 다만 그것들을 찾아냈을 뿐이야. 이 세상엔 창조라든가 발명이 있을 수 없다. 발견될 뿐이며 모든 건 서로 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럼 푸른다가 아무리 애써서 조각해도 그건 의미가 없는 거야?”

"아니지. 저기 저 바위를 보아라.”

푸른다는 서너 아름쯤 되어 보이는 바위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둥글둥글한 바위였다.

"난 삼십 년 전부터 저 바위를 살펴왔다. 처음엔 내 아내감이 될 만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내 생각이 달라져서 그 여인의 키도 좀 키워보고, 새 옷을 입혀 보기도 했어. 울려본 적도 여러 번 있고... 그러나 아직도 나는 내 아내의 적당한 모습을 찾지 못한 채 오늘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어. 그동안에 바위 속 여인도 더 성숙해지긴 했지만 내 소망을 채우기엔 아직 멀었단다. 나는 이처럼 바위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자라게 하기도 하고, 바꿔 놓기도 하고, 길들이기도 한단다. 그것이 조각가의 가치란다.”

"그럼 한번 조각된 모습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거야? 더 이상 자라게 하거나 바꿔놓거나 길들이지 못하고?”

"아니란다. 조각 속엔 또다른 조각이 들어 있고, 그 또다른 조각 속에 역시 다른 조각이 들어 있다. 고정된 모습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또 변해야 한다. 동자의 안에도 그런 많은 조각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푸른다는 말을 마치고 어미 사자가 들어 있다는 바위를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어미 사자는 새끼 사자들을 향해 날쌔게 달려가는 모습으로 바위 속을 뛰쳐나왔다.

푸른다는 동자에게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동자가 자신의 참모습을 보는데 내 조각들이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구나. 이 산을 내려가는 대로 니라야성을 찾아가서 소지옥의 돕는자를 만나라. 그는 소지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소지옥으로 들어가신 거룩한 분이다. 잘 가거라.”

동자는 푸른다의 이별 인사를 받고 바위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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