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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아드반-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10. 뱃사공 바시라

10. 뱃사공 바시라

 

도담 동자는 삼천 생 전의 아내이던 도란 아가씨의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비틀비틀 평원을 걸었다. 삼천 생 전의 기억이라니. 길도 잡지 않은 채 헤매는 동자의 눈엔 눈물이 이슬처럼 맺혀 방울방울 떨어졌다.

동자는 그로부터 닷새만에 고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어느 강가에 이르렀다.

강 건너 멀리 머리를 하얀 안개로 두른 설산이 보인다. 밝은 햇살에 설산 이마가 반짝거리고 있다.

동자는 생각이 멎은 듯 숨이 멈춘 듯 눈 덮인 설산을 올려다보았다. 어깨가 들썩거린다. 울음이 흐른다.

동자는 강으로 들어가 차디찬 물에 발을 담그고 강이 흐르는 물결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동자가 이제까지 걸어 온 먼 길이 조용히 흐르는 듯하다. 강물은 수천 년 수만 년 흐르고, 그의 생도 수천 년 수만 년 흐른다. 전생의 기억은 차디찬 물빛만큼이나 시리고, 물길만큼이나 끈질기다.

강물은 봉인한 듯한 침묵으로 동자의 수심어린 눈을 비추며 말없이 흐른다.

강물에는 동자의 슬픈 눈 같은 그믐달이 출렁거린다. 동자는 물결에 따라 일그러지거나 흩어지는 그믐달을 구경했다.

동자는 그믐달이 가라앉은 강에서 먼먼 세월의 그림자를 찾아보려 애썼다. 동자의 두 눈과 그믐달이 오랫동안 물결에 묻혀 이리저리 일렁거린다. 전생이란 이슬 같은 것, 눈 뜨고 해 뜨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나룻배가 다가와 동자를 실었다. 동자는 기억 속에 주렁주렁 달려오는 삼천 생이란 긴 시간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나룻배 뒷켠에 앉아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발이 시리지만 굳이 비비지도 않았다.

사공이 동자의 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도담 동자여.”

동자는 사공의 나지막한 음성을 듣고서야 먼 기억의 달음질에서 돌아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울고 있구나.”

동자의 눈언저리에 눈물자국이 나 있다. 동자는 그때까지도 울고 있었다.

어린 너한테 무슨 슬픔이 그다지도 깊단 말이냐?”

, 내 전생의 아내를 이별하고 오는 길이야. 삼천 생 전의 아내를, 이제는 다시 못 보지. 영원히 이별했거든. 이승에서고 저승에서고.”

사공은 동자의 눈물을 그의 옷깃으로 닦아주면서 말했다.

나는 뱃사공 바시라다. 이 강에서만 칠십 년을 살았다. 그러나 강은 칠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차별하지 않는다. 늘 뱃사공 바시라로 여겨준다. 아니, 내가 뱃사공이면 뱃사공으로 보고, 내가 나그네면 나그네로 보고, 내가 가난하면 가난하게 본다. 강은 나이도 이름도 묻지 않는다. 강은 흐르기 때문이다. 강에는 시간이 없다. 흐른다, 이것만 있지. 삼천 생 전의 시간이나 지금이나, 또 어느 먼 미래의 시간까지도 강은 오직 흐를 뿐이다. 강은 너의 기억은 단지 쌓일 뿐이고, 강은 단지 흐를 뿐이다. 흐르고 흐르기 때문에 흘러감은 흘러감이 아니요, 흘러옴은 흘러옴이 아니다. 흘러감이 흘러옴이요, 흘러옴이 흘러감이다. 이것이 강의 흐름이고, 너의 기억이며, 세상의 역사란다. 네 마음에서 기억을 가두는 시간의 벽돌을 빼어내라. 그래야 너도 온전히 흐를 수 있지.”

동자는 어느새 눈물을 거두고 뱃사공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강은 소리와 빛의 고향, 온갖 종류의 소리와 가지가지의 빛깔이 녹아서 원음(圓音)과 원색(圓色)을 나타낼 뿐이다. 사람들은 슬픈 소리와 슬픈 빛깔, 기쁜 소리와 기쁜 빛깔을 본다. 그러나 강은 결코 슬픈 소리와 슬픈 빛깔, 기쁜 소리와 기쁜 빛깔을 구분하지 않는다. 듣는 이가 그렇게 듣고, 보는 이가 그렇게 볼 뿐이다. 소리는 소리이고 빛은 빛이다.”

동자의 눈에서 슬픔의 빛이 걷혔다.

바시라 뱃사공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동자여, 너는 강이니라.”

그뿐, 사공은 더 말하지 않고 가만가만 노를 저어 갔다.

나룻배가 강 건너 나루에 도착하자 바시라 뱃사공은 동자를 안아 내리고 다시 손님을 태웠다. 바시라는 손을 한번 들어 이별을 알렸다. 동자 역시 손을 들어 뱃사공 바시라에게 이별의 인사를 전했다.

동자야, 나는 지금 너를 영원히 이별한다. 슬프니?”

아니.”

도담 아가씨를 이별한 게 슬프니?”

아니.”

그럼 안녕.”

안녕.”

동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강을 노저어 떠나는 뱃사공 바시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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