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해냄판 <소설 토정비결> 중권 <29장 두무지>에 조선에 닥치는 환난을 막기 위해 신명들에게 따지기 위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박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분에서 놀란 독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사실 이 장을 쓰게 된 이유가 있다.
나는 광주항쟁이 일어난 1980년에 휴교령으로 대학교에 나가지 못하자 집에 틀어박혀서 글만 썼다. 3권을 썼다.
그때 쓴 글 중 하나가 <밀라레빠의 탑>이란 소설인데, 이 소설에 이미 박수 두무지와 비슷한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왜냐하면 나는 불과 한 달 전쯤 충격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생불교연합회 서울지부장으로 있었는데, 화성 운주사에서 마침 대불련 수련회를 가졌다. 그때 우리 서울지부 일원으로 함께 참여한 이화여대 학생(아마도 당시 2학년)이 있어 이런저런 토론을 하고, 나란히 앉아 참선하고, 교리 이야기도 나누었다.
수련회가 끝나는 날, "잘 가라, 또 보자."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그날 중으로 이 여학생이 북한산에 올라가 자살해버렸다. 유서에 "난 이 우주와 세상이 너무 궁금해 늙어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먼저 가서 부처님도 만나고, 저승도 구경하고 싶다." 대략 이런 글을 남겼다.
그 친구가 이처럼 충격적인 유서를 남기고 간 뒤 무술생이 무술년을 맞은 오늘까지 내 머릿속에 이 사건이 콕 박혀 있다.
그래서 <밀라레빠의 탑>에서 신에게 도전하는 이야기로, <소설 토정비결>에서 신명과 싸우는 이야기로 그려낸 것이다. 그 친구,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잘 가라, 또 보자"며 웃던 그 허허로운 마지막 모습만 희미하다.
그동안 가슴이 아파 이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친구 이미지를 묘사한 소설 <밀라레빠의 탑>을 윤문하다가 생각이 나, 그 친구를 위해 이제야 적는다.
<밀라레빠의 탑>에는 이야기 중에 이렇게 적었다.
“아아아! 그만 좀 해요. 힘들어요. 제가 죽어 드리면 그만두시겠어요? 오, 신이여!”
<소설 토정비결> 중권 제29장 두무지 일부
이튿날 박지화와 이별한 지함은 천지봉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주막에서 산 옥수수와 고기가 들려 있다.
산에서는 전날 들리던 목소리가 계곡을 타고 다시 흘러내려왔다.
천지봉에 오르는 길은 험난하다. 길이 따로 없는데다가 바위가 날카롭고 삼림이 우거져 헤치고 나갈 곳이 없다. 한나절을 꼬박 걸어서야 마침내 지함은 산꼭대기 천지봉에 올랐다.
천지봉에 오르니 토굴이 하나 보였다. 두무지라는 박수는 그 토굴 속에 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허연 수염으로 뒤덮여 있어 좀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옷 대신에 걸친 짐승 가죽 때문인지 마치 늙은 짐승 한 마리가 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아니?」
「어서 오세요, 이 선비님.」
두무지 옆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한 명 앉아 있다. 얼굴을 보니 그도 잘 아는 황진이다.
「뉘시오?」
두무지가 지함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이지함이라고 합니다. 천하를 주유하던 중 이곳을 지나다가 선사(仙師)의 기도 소리를 바람결에 들었습니다.」
「화담이 보냈군.」
「예?」
「자네 스승 화담 말일세.」
「예?」
「그만 좀 놀라게.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화담 선생님은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그 사람, 죽고 나서야 만났지. 내가 팔도의 산신들을 두루 만나러 다니다가 지리산에서 잠시 그 귀신을 만났다네. 그때 화담이 자네를 내게 보내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그러면 제가 여기 올 것까지도 알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그쯤이야 손바닥 뒤집기지.」
「선생님도 귀신입니까?」
「예끼, 이 사람아. 멀쩡하게 살아 있네. 난 화담보다 한 수 높지.」
「춘추를 여쭙겠습니다.」
「여쭙게나.」
「춘추가 몇이십니까?」
「백스무 살이네.」
「예?」
「운주사 이야기 들었지?」
「예.」
「내가 원래 그 나무꾼일세.」
「예?」
「그만 놀라게. 놀랄 일도 참 많네그려.」
「이게 안 놀랄 일입니까?」
「이 땅에는 나 말고도 도인들이 수없이 많다네. 화담 같은 이는 드러난 사람이고 나 같이 숨어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나중에 한번 더 세상을 돌면서 산을 쭉 돌아보게. 생기가 뭉쳐 있는 곳마다 도인들이 숨어 있을 것일세.」
「그런데 선사께서는 왜 천불천탑을 쌓다 그만두셨습니까?」
「미륵에게 속았어.」
「미륵에게 속다니요?」
「그거 쌓는다고 이 세상이 바뀌나?」
「그래서 그만두셨습니까?」
「그건 아니네. 나는 어느 날 이 나라를 기웃거리는 검은 구름을 보았지. 미륵이 올 세상을 준비하다가 나는 미륵을 맞이하기도 전에 그걸 먼저 보았어. 살아남는 자가 없을 정도로 큰 재앙이었어.」
「그래도 미륵에게는 따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미륵이 쌓도록 시킨 것은 그런 불상이나 탑이 아니었어. 마음 속에 쌓으라는 것이지 땅 위에 돌덩어리를 세우라는 것이 아니었다네.」
「저도 화담 산방에 돌탑을 쌓고 나서야 입실했습니다.」
「그거야 자네 마음에 낀 때가 많아서였겠지. 나한테는 신심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 일을 시켰던 건데, 천불천탑을 쌓기도 전에 나는 내 일을 마쳤지.」
「그러면 지족 선사는?」
「그 무지한 놈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게지. 제 탑을 쌓는 게지 어디 중생을 위해 쌓는다던가!」
「그래서 그 뒤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지리산에서 숯을 구우면서 도를 닦았지. 그러다가 접신을 해서 박수가 되었다네.」
「미륵도 만났다면서 접신은 새삼스레...」
「미륵은 너무 크거든. 나한테 알맞은 스승이 필요했어.」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준비를 하게.」
두무지는 지함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황진이를 돌아보며 말을 던졌다.
황진이는 부지런히 북, 징, 방울 같은 무구를 챙겼다.
「밥을 지어놓게. 자넨 나를 따라오고.」
두무지는 오색 무의를 입으면서 황진이와 지함에게 말했다.
두무지는 황진이가 챙겨준 무구를 들고 토굴을 나섰다. 지함도 그를 따라 토굴 뒤쪽의 산을 타고 올라갔다.
두 사람은 벼랑끝을 타고 올랐다. 그 벼랑 끝에 수백 살도 더 되어보이는 소나무가 꿋꿋하게 서 있다. 그 소나무가 바로 두무지가 기도를 올리는 신목이다.
두무지는 무구를 신목 아래 제단에 차려놓고 벼랑 쪽으로 가 바람을 받으며 섰다. 지함도 그를 따라 벼랑 가까이 다가갔다. 계곡에서 불어오르는 바람이 드세어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수가 없다. 지함은 바람에 밀려 몇 번이나 뒷걸음질을 쳤지만 두무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벼랑에 서서 버텼다.
「백척간두에서 한발을 내디디면 거기가 어디겠는가?」
두무지의 말이 바람소리에 섞여 지함의 귀를 툭 치고 지나갔다.
지함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내디디면 어디긴 어디인가? 죽어 저승 가는 거겠지. 두무지는 그걸 묻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지함은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산이 칼같이 뾰족한 봉우리를 받쳐들고 서 있다. 음산하고 괴기스런 바람소리가 벼랑을 타고 자꾸만 밀려온다.
「이 책을 보게.」
두무지가 품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지함의 발 앞으로 던졌다.
「무슨 책입니까?」
겉장에 <홍연진결>이라고 씌어 있다.
「<신서비해>라네. 화담은 자네에게 자기 책을 전하려고 내 책을 빼돌렸다더군. 어차피 자네가 보아야 할 책이니 다른 사람에게야 보일 필요가 없었겠지.」
지함은 두무지가 던진 책을 집어들었다.
지함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 두무지는 두 팔을 번쩍 쳐들더니 무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천지에 음양을 세운 하늘 위의 하늘이여,
제물 바쳐 받들어야 할 당신은 누구시오!
생기를 주고 힘을 주고
온 백성이 받들어 따르는 신명이여!
그대는 불사를 말하나
그대의 그림자는 죽음을 부르네.
그대의 위력으로 숨을 쉬며
두 발 달린 것과 네 발 달린 것을 모두 지배하네.
제물 바쳐 받들어야 할 당신은 누구시오!
이 백성을 해치지 마소서.
땅을 낳고 하늘을 낳고 눈부신 해를 낳고 만물을 낳은 그대여!
......
「아직도 읽고 있는가?」
어느새 두무지가 무가를 마치고 지함을 바라보았다. 책을 든 지 벌써 한참이 지났다.
지함이 마침내 책을 내려놓았다.
「...사실입니까?」
책에는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때로부터 앞으로 오백 년 동안 조선에서 일어날 일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사실이 아니면 뭐하러 힘들여 그런 걸 썼겠는가?」
「우리 조선땅이 이렇게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그 많은 백성이 죽고 다치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이 듭니까?」
「그래서 내가 신명들에게 기도하고 있는 것 아닌가.」
「무엇을 빌고 있습니까?」
「빌긴 왜 빌어. 나는 하늘과 싸우고 있어.」
「하늘과 싸운다구요?」
「왜 우리 조선에만 이렇게 큰 환난이 와야 하는 것인지, 그것 때문에 신명과 싸우고 있어. 나는 이곳에서 신명과 싸우기를 삼 년이나 했네. 이젠 자네가 도와 줘야 한다네.」
「예?」
「자네의 학문은 깊이로 보자면 이제 더 갈 곳이 없네. 다만 하늘에 통하는 학문이 부족하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
「그러합니다.」
「그 책에 나오는 환난을 자네가 막아주어야 하네. 내가 자네에게 하늘을 보는 힘을 주겠네. 자, 신목 밑에 쌓인 눈을 치우세.」
두무지는 그가 신목으로 지목한 소나무 밑으로 가서 쓸었다. 지함도 두무지를 거들어 눈을 말끔히 치웠다.
「여보게, 나는 오늘밤 이곳에서 천지굿을 할 걸세. 자네가 <신서>를 보았으니 이제 그 책은 자네에게 깃든 것이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는 이곳에서 신명과 싸우기를 삼 년이나 했네마는 신명들이 내 말을 듣질 않아.」
「왜 안 듣습니까? 원래부터 안 들어줍니까?」
「아니지. 보통 굿을 하면 신명은 시시콜콜 다 말해주지. 그러나 이 문제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싸우고 있는 거지. 말 좀 하라고 신명들을 윽박지르고 있는 거라네. 자, 토굴로 내려가세. 굿을 준비해야지.」
두무지가 앞장서서 바람처럼 산을 내려갔다.
지함이 두무지를 따라 힘겹게 산을 내려가 토굴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는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있었다. 산간에 나지도 않는 반찬이며 고기, 그리고 떡까지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신기한 일이다.
「자, 주유 중에 제대로 먹지 못했을 터이니 잘 먹어두게.」
지함은 오랜만에 따끈한 고깃국에 술까지 얼큰하게 마셨다.
「선사님, 접신이 뭡니까?」
「신명들이 사람을 부려 저희들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네. 화담이 돌아다닌 짓하고 비슷한 거지. 화담이야 도통한 사람이니 저 스스로 혼백을 이끌지만 보통 귀신들이야 산 사람을 빌지 않고는 아무것도 못하지.」
「그러면 무당이나 박수는 신명이 부리는 일꾼입니까?」
「그렇다네.」
「그러면 저 같은 사람도 접신할 수 있습니까?」
「뭣하러 자네가 접신을 하나? 자네 혼자서도 잘 해나가는데. 무당이나 박수는 제 인생을 묻어두고 신명을 위해 사는 존재라네. 자네의 학문은 곧 신명에 이를 것일세. 그렇다면 그게 접신이지 따로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그래도 천문, 지리, 주역을 한 자 공부하지도 않고 앞을 훤히 내다보신다면서요?」
「그게 어디 내가 보는 것인가? 신명이 내다보는 것이지. 그래서 내가 이제야 제 정신을 차리고 신명과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일세. 나는 비로소 신명을 벗어나 나를 찾은 것일세. 그런데 여태 내 몸을 써먹은 신명들조차 도와주질 않아. 인정머리없이 말이야.」
두무지는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사람이 제 힘으로 노력하지 않고 귀신이나 모시고, 도를 이루기 어렵다고 환단이나 만들어 먹고, 단전에 뜸을 뜬다 어쩐다 다 부질없는 짓일세. 사람이 사람의 몸을 입었으면 사람답게 살아야지.」
날이 어두워지자 세 사람은 신목이 있는 곳으로 다시 올라갔다. 두무지는 무구를 챙겨들고 황진이는 제물을 머리에 이었다.
신목에 이르자 두무지는 장고와 징을 내려놓고 적색, 청색, 황색의 백면포 조각을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이윽고 주렴이 완성되었다.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주렴이 펄럭거리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두무지는 무복으로 남색 쾌자를 한 활옷을 입었다. 홍천릭 같은 옷에 팔소매가 색동이고 나머지 끝동은 백색이다. 그리고 몸통 전체가 적색으로 허리에 주름이 잡히고, 앞가슴에 한 자쯤 되는 옷고름이 달려 있다.
두무지가 두건을 매자 황진이가 바닥에 앉아 북을 두드렸다. 황진이가 치는 북소리에 맞추어 두무지가 파수를 치고 난 다음 벌떡 일어나서 대신칼을 오른손으로 집어들더니 신목 주변을 연신 찌르면서 뛰어다녔다.
황진이가 무가를 선창하자 두무지가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방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두무지는 지함에게 다가와 신칼을 마구 휘두르며 노래를 불러댔다.
이번에는 두무지가 북채를 잡고 휘모리로 빠르게 두드리자 황진이가 일어나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지함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뜨거운 불덩이가 핏줄을 타고 마구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정수리에 불꽃이 이는 듯하더니 뭔가 팍 터지는 기분이 들며 온몸에서 흥이 절로 솟는다.
지함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황진이의 춤에 맞추어 발을 구르고 팔을 뻗었다. 두무지는 징과 북을 요란스레 두드리면서 두 사람을 몰아붙였다. 그렇게 얼마나 춤을 추었을까.
어느 순간 두무지가 북을 메고 징을 치면서 벼랑 쪽으로 가더니 북과 징을 벼랑 아래로 집어던졌다. 곧 징이 바윗돌에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황진이와 지함은 그제야 춤을 거두고 숨을 골랐다.
「자, 두 사람은 이제 내려가게. 이제부터는 나 혼자서 해야 하네.」
황진이는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리고 돌아섰다.
지함은 황진이를 따라 어두운 밤길을 더듬으면서 토굴로 내려갔다.
두무지가 기도하는 소리가 밤새 들려왔다. 그 음성이 어찌나 처절한지 지옥에서 울려오는 울부짖음 같다.
지함과 황진이는 두무지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지나온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송도를 떠나서는 어디로 가셨소?」
지함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여기저기 떠돌았습니다. 천하의 남성을 다 만나볼 생각이었지요.」
「여자의 몸으로 여간 힘들지 않았을 터, 우리 같은 남자들도 힘든데...」
「아랫도리를 주체 못하는 양반들이 천하에 즐비한데 제가 힘들 게 뭐가 있겠어요?」
「도대체 그대는 알 수 없는 여인이오.」
「여인은 생각할 자유도 없습니까? 저도 도를 닦고 팔도를 주유하면서 문사 도사들과 어울려 시회도 열고 도화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허나, 여자의 길을 누가 막아놓았습니까. 그 잘난 유가 아닙니까.」
황진이가 당찬 목소리를 모아 지함에게 말했다.
「두무지 선사는 어떻게 찾아왔소?」
「한량들과 어울려 금강산으로 사냥을 따라나왔었지요. 그러던 중 한 대감이 숲속으로 저를 데리고 가서 겁탈하려는데 어디서 호랑이가 나타나 그 대감을 발로 쳐내고 저를 입에 물었습니다. 그 뒤로는 혼절하여 까마득하게 모르고, 뒤에 눈을 떠보니 여기였습니다.」
「호랑이한테 물려왔다구요?」
「그 호랑이는 두무지 선사가 데리고 있는 녀석이었습니다. 제가 눈을 뜨니 두무지 선사가 저를 내려다보면서 당신이 시킨 일이라면서 놀라지 말라고 하셨어요.」
「왜 그랬답디까?」
「오랫동안 기도를 해 와서 기력이 많이 쇠진해졌답니다. 양기를 보충해야겠는데 금강산에 있던 저의 음기를 보셨답니다. 그래서 저의 강한 음기로 선사의 양기를 격발시키려고 한 것이랍니다.」
「재미있는 말이오만...」
「그 뒤 선사는 제가 완전히 기운을 차리자 딱 한번 음기를 취하셨습니다. 그 뒤로 저는 선사님을 따라 굿을 할 때마다 무구를 갖춰 드리고 북을 쳐드렸지요. 그러다 보니 무가도 익히게 되고... 아마 제게도 무당기가 있는가 봅니다.」
「내가 보아도 그런 것 같소.」
「그런데 두무지 어른은 이 선비가 오기 전에 저더러 큰 굿을 준비하라고 하면서 음식을 마련해다 주었지요.」
「그러면 두무지 선사는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이오?」
「그렇지요. 그래서 진수성찬을 차려드린 거랍니다.」
「허, 참.」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새벽이 되자 토굴에도 가느다란 여명이 스며들었다.
그때 황진이가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신음했다.
「왜 그러시오?」
지함이 놀라서 황진이를 일으켜 세웠으나 그는 고통이 멈추지 않는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동안 격렬하게 몸부림을 하던 황진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선사님이, 선사님이...」
그러면서 황진이는 토굴을 뛰어나갔다.
황진이는 미친 여인처럼 신목이 있는 곳으로 뛰어올라갔다. 밤 사이에 내린 눈으로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황진이는 미끄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면서 비틀비틀 올라갔다.
지함도 황진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신목이 있는 곳까지 겨우 올라갔을 때, 신목은 눈을 하얗게 뒤집어 쓴 채 계곡에서 불어오르는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저기...」
황진이가 신목을 가리켰다. 지함은 눈을 들어 신목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에 호랑이가 앉아 있다.
「호랑이가?」
「두무지 어른의 호랑입니다. 그 위쪽에...」
황진이가 다시 손가락을 들어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나뭇가지 밑에 커다란 눈덩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지함은 직감적으로 그가 두무지임을 알아차렸다.
호랑이가 두 사람을 보더니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함이 황급히 달려가 눈을 털고 보니 역시 두무지다.
두무지는 신목에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다. 그가 늘 빌던 신목에 목을 매어 스스로 죽은 것이다. 늘 그랬듯이 두무지는 하늘을 향해, 신명을 향해 울부짖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신목에 매달린 두무지의 시신이 세찬 바람에 흔들거린다.
지함이 힘겹게 시신을 끌어내리자 저고리 안가슴에 꽂아두었던 서찰이 툭 떨어졌다. 지함은 서찰을 펴보았다.
- 하늘이 내 말을 듣지 않는군. 내가 하늘에 직접 올라가 따지리라. 왜 이 순박한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가를... 기도 가지고 안 된다면 신명들한테 가서 싸울 수밖에. 기다리고 있게. 자네에게 돌아오겠네.
어디선가 호랑이의 포효가 쩌렁쩌렁 들려온다.
지함은 꽝꽝 얼어붙은 두무지의 시신을 두고 토굴로 내려가 도끼와 불쏘시개를 들고 올라왔다.
지함은 두무지가 목을 맨 신목을 도끼로 패기 시작했다.
계속 장작을 패서 높다랗게 쌓고 두무지의 시신을 그 위에 올린 다음 불을 질렀다.
두무지는 지함에게 빚을 남기고 떠나갔다. 백성들에게 닥쳐오는 검은 구름을 막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그 원을 지함의 가슴에 고스란히 안겨 놓고.
<신서비해>에 적혀 있는 커다란 환난을 내 힘으로 어쩌란 말인가.
지함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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