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토정비결」의 설화 수용 양상
최 운 식*
<차 례>
Ⅰ. 머리말
Ⅱ. 작품의 구성
Ⅲ. 설화의 수용과 변용
Ⅳ. 맺음말
1. 머리말
「소설 토정비결」은 이재운(李載雲)이 쓴 현대소설로, 1991년에 해냄출판사에서 상․중․하 3권으로 발행되었다. 이 작품은 발행 즉시 독자들의 인기를 끌어 1993년에 초판 82쇄를 발행하였다. 그 후에도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2000년 2월 10일까지 재판 13쇄를 발행하였다.
이 작품은 토정 이지함과 관련된 토정 설화를 비롯하여 많은 설화를 수용하여 구성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 작품의 설화 수용 양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은 이 작품의 이해에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Ⅱ. 작품의 구성
이 작품은 40장으로 분장(分章)되어 있는데, 상권 14장, 중권 12장, 하권 14장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장별로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상권(1~12장)
1)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서기(徐起)가 아산 현감으로 있는 토정의 임종을 예감하고, 아산현으로 찾아가 만난 후 걸인청(乞人廳)에서 묵으며 옛일을 회상한다.
2) 면천(免賤_--보령 심충겸(沈忠謙) 대감 집에서 종노릇을 하던 서기는 18세 때 심대감이 속량(贖良)해 주자, 홍성의 이지함을 찾아갔다.
3) 앞날을 읽는 사람--서기는 이지함이 마련해 준 집에서 1년 간 농사 지으며, 「금강경」을 비롯한 여러 가지 책을 읽는다.
4)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지함이 한양으로 떠나자 서기는 계룡산 용화사로 가서 명초(明草) 스님 밑에서 2년 간 행자 노릇을 한 뒤에 이지함을 만나러 한양으로 간다.
5) 기방에서 찾은 법열--한양에 온 서기는 친구 안명세와 혼약한 안민이를 잃고 기방에 파묻혀 지내는 이지함을 만나 술을 마시고, 기녀와 하룻밤을 지냈다.
6) 특정기(特定記) 사건--이지함이 대과에 급제한 직후에 안명세는 인종이 독살되었다는 사초(史草)를 쓴 사실이 발각되어 참수(斬首)되고, 안민이는 종으로 끌려갔다.
7) 원수의 아들을 스승으로 삼다--이지함은 서기와 함께 광릉 봉선사에 갔다가 특정기 사건을 일으킨 정순붕의 아들 북창(北窓) 정렴(鄭磏)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8) 도가입문(道家入門)--서기가 금강산으로 떠난 뒤, 이지함은 북창 정염을 스승으로 모시고, 도가 수업을 하였다.
9) 민이의 죽음--이지함은, 정순붕의 애첩이 된 민이가 염병에 걸려 죽은 사람의 팔뚝 뼈를 구해다가 정순붕의 베개 속에 넣어 정순붕이 염병에 걸려 죽게 하고, 자기도 염병에 걸려 죽었음을 알았다. 이지함은 나막신을 매점매석(買占賣惜)하여 얻은 여비를 가지고 송도로 서화담을 찾아갔다.
10) 화담산방--서화담을 찾아간 이지함은 돌탑을 쌓는 시험을 거친 뒤에 화담산방의 학인이 되었다.
11)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서화담은 밤에 찾아온 황진이를 만나 기(氣)로 정을 통하고, 이지함에게 기(氣)에 관해 깊이 있게 가르쳤다.
12) 빛을 잃은 태사성--천문을 보고 자기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 서화담은 이지함에게 전국 각지의 지리와 물산(物産)과 인물을 살펴 깨달음을 얻은 뒤에 쉽게 알 수 있는 운명서를 쓰라고 하였다.
13) 삼월 삼짇날--서화담, 박지화와 함께 한양에 온 이지함은 형 이지번과 아내, 아들 산휘를 만난 뒤에 용인으로 가면서 지리와 물산, 만물의 기(氣)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14) 화담의 임종--서기가 이지함을 만나러 화담 산방에 가니, 서화담은 이지함을 만나거든 주라며 「홍연진결(洪然眞訣)」을 주고 숨을 거두었다. 서기는 그의 가족과 함께 그를 매장하였다.
중권(15~26)
15) 방장 명초의 비밀--계룡산에 간 서기는 명초 스님을 만나서, 자기가 중종 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금부도사의 아들 정휴이고, 명초는 자기 숙부라는 사실과 심대감의 딸 명이가 자기 어머니와 심대감 사이에서 낳은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16) 그 땅을 보고 인물을 보라--서화담을 따라 용인에 간 이지함은 농사를 지으면서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안명진 진사를 만나 그의 물산 유통에 관한 생각과 장사 방법을 들었다.
17) 신라에서 찾아온 아내--서화담은 이지함과 박지화에게 천안의 주막에서 만난 처녀가 전에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이 환생(還生)하여 태어난 처녀라면서, 사주를 보면 그 사람의 전생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18) 화담이 살아 있다--홍성에 온 정휴(서기)는 이지함이 서화담과 함께 홍성에 왔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서기는 전우치․남궁두를 만나 「홍연진결」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민심을 소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홍성 현감에게 잡혀가 「홍연진결」을 빼앗겼다가 현감 부인인 명이의 도움으로 되찾았다.
19) 바다를 읽는 어부--이지함 일행은 홍성의 바닷가에서 만난 노인의 배를 타고 해남으로 갔다. 기후의 변화는 물론 인간의 도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가진 노인은 잡은 물고기를 비싸게 판 딸의 행동을 꾸짖고 더 받은 돈을 돌려주게 하였다.
20) 두륜산--해남에 온 이지함 일행은 두륜산 기슭에서 만난 장사꾼 오천석의 사주를 봐 주고, 해안 마을로 간다. 정휴 일행은 길목에서 이지함 일행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21) 해사의 여인--두륜산 남쪽 마을에 도착한 이지함은 그 마을 처녀 희수(喜秀)와 하룻밤을 지내고, 아들을 낳으면 ‘규철(圭澈)’이라 부르라고 하였다.
22) 미륵불이 가사를 집어던진 사연--화순 운주사에 온 이지함 일행은 송도에서 황진이와 정을 나눈 뒤 자취를 감췄던 지족 선사를 만나 천불탑을 쌓는 현장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23) 날개 잃은 해동청--이지함 일행은 담양에서 송순을 만나고, 지리산 산천재(山天齋)로 가서 남명 조식과 정개청․서치무 등을 만났다. 정휴 일행은 산천재에서 이지함 일행을 기다리다가 허탕을 하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24) 돌림병--이지함이 밀양재에서 노숙(露宿)할 때, 서화담이 기(氣)로 호랑이를 물리쳤다. 이지함 일행은 석남사 인근 마을에서 염병으로 신음하는 사람을 구호하였다.
25) 화담의 묘를 파보다--서화담이 이지함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 정휴는 송악으로 가서 화담의 묘를 파고 시신을 확인 한 뒤에 다시 지리산으로 갔다. 경주에서 화담은 더 이상 지기(地氣)를 모을 수 없어 먼저 간다는 글을 남기고 떠나고, 이지함과 박지화는 여행을 계속하였다.
26) 지리산으로 간 정휴는 남명을 만나 죽은 화담이 지기(地氣)를 모아 현신하여 여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지함은 울진에서 「신서비해(神書秘解)」 사건으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뒤에 바뀐 신서를 읽고, 불에 태웠다.
하권(27~40)
27) 세월에 지는 사람--여행을 마치고 화담산방에 온 이지함은 박지화와 정휴․전우치․남궁두에게 박수 두무지, 도적 임꺽정을 만난 일을 이야기하고, 울진에서 태운 신서(神書)가 서화담이 쓴 「홍연진결」이었음을 밝혔다.
28) 도를 훔치다--이지함은 정휴 일행에게 무정 스님과 함께 운곡사에 갔을 때 금산 스님과 도에 관해 문답하고 토론한 이야기를 하였다.
29) 박수 두무지--이지함이 천지봉에서 만난 박수 두무지는 남사고가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신서비해」를 읽게 하고, 조선에 닥쳐올 전란을 막으라고 하였다.
30) 지함이 사라지다--5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기괴한 차림으로 돌아온 이지함은 전우치를 임꺽정의 군사(軍師)로 보내고, 백성을 위한 일을 하겠다며 정휴․남궁두와 함께 산방을 떠났다.
31) 허생전--이지함은 용인 안 진사에게 10만 냥을 빌려 안성과 용인에서 나는 유기와 대추, 밤, 배를 모조리 사다가 창고에 쌓아 두었다.
32) 토정의 난--이지함은 금산의 6년근 홍삼, 질 좋은 전주 한지, 영광의 물 좋은 굴비, 강진의 분청사기와 백자, 제주도의 말총, 경상도의 금과 은 등을 모두 사서 안성으로 보낸 뒤에 값이 오르기를 기다려 팔아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33) 삼개나루--이지함은 많은 곡식과 옷감을 가지고 마포 삼개나루로 와서 토정(土亭)을 짓고, 4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 상담하면서 재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곡식과 옷감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천기비전(天機秘傳)」을 지었는데, 그 책이 빌미가 되어 포천 현감이 되었다.
34) 명종의 시험--포천 현감으로 부임한 토정은 잡곡밥과 나물국을 먹으며 백성을 보살피고, 세도를 부리는 경주 김씨 종가의 위세를 꺾기 위해 잠두산(蠶頭山) 허리를 잘랐다. 토정은 포천현을 잘 다스리기 위한 개혁안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현감을 그만두었다.
35) 용호비결--토정이 금강산에 가니, 북창 정렴은 그에게 「용호비결(龍虎秘訣)」을 준 후 전란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그는 북창의 말대로 화순 운주사로 가다가 금성산 신당(神堂)에서 신처(神妻)를 만나고, 지족 선사의 임종을 본 후 한양으로 왔다.
36) 참성단--토정은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서 두 차례에 걸쳐 전국 역학 대가들과 만나 전란을 막을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율곡, 이순신, 권율, 조헌, 이산해, 이산보 등에게 전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토정의 말을 들은 율곡은 선조 왕에게 전란에 대비할 것을 주청하였다.
37) 토정비결--토정이 3년 간 심혈을 기울여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완성하니, 율곡을 통해 이를 본 선조 왕은 널리 보급하라 하였다.
38) 아산 현감이 된 토정은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양어장을 폐쇄하고, 잘못 된 일을 고쳐나가면서 개혁안을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답이 없었다. 그는 해사의 여인 희수와 운주사에서 만났던 동자승 규철을 불러 가까이 두고, 그들의 시중을 받았다
39) 다시 찾아온 두무지--토정의 임종이 임박한 것을 예측하고 찾아온 정휴에게 토정은 천계(天界)의 태극궁(太極宮)에 다녀온 두무지가 찾아와 전란은 정해진 운명이므로 피할 수 없다고 하였다는 말을 하며, ?토정비결?이 백성들을 위무(慰撫)하고, 희망과 용기를 줄 것이라고 말한 뒤에 숨을 거두었다.
40. 토정, 그 후--율곡은 10만 양병(養兵)을 주장하고, 이순신을 유성룡에게 추천하였다. 정여립은 ?정감록(鄭鑑錄)?을 짓고, 모반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정휴와 박지함도 임란을 막으려 애를 쓰다가 임란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은 토정이 살았던 조선 명종~선조 때를 배경으로 하여, 토정의 학문과 도가 입문 과정, 전국의 지리와 물산과 인물을 살피면서 겪은 일, 임진왜란을 막기 위한 노력, 백성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줄 ?토정비결?을 완성하기까지의 일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은 토정 이지함을 스승으로 모시는 서기의 입을 통해 토정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Ⅲ. 설화의 수용과 변용
이 작품은 많은 설화를 수용하여 구성하였는데, 이 작품에서 수용한 설화 중에는 토정 설화도 있고, 토정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다른 등장인물과 관련이 있어 수용한 설화도 있다. 여기서는 이 작품이 설화를 어떻게 수용하여 변용하였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토정과 관련된 설화를 살피고, 뒤에 다른 등장인물과 관련된 설화의 수용과 변용에 관해 살펴보려고 한다.
1. 서기의 출신과 학문
?소설 토정비결」에서 서기는 토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임종(臨終)을 지킨 제자로, 작품의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작품에 나타난 서기의 면모는 다음과 같다.
A. 서기는 보령 심충겸 대감 집에서 종노릇을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B. 서기는 열세 살 때부터 밤이면 심충겸 대감의 방으로 가서 심대감에게 글을 배웠다.
C. 서기가 18세 되었을 때, 심대감은 서기를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켰다. 면천(免賤)한 서기는 이지함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D. 서기는 계룡산과 금강산의 절에서 수도하고, 토정을 찾아 지리산에 갔다가 남명 조식을 만났다.
E. 서기는 계룡산 명초 스님을 만나 자기가 중종 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금부도사의 아들 정휴임을 알았다.
F. 서기는 토정과 함께 백성을 보살피고, 전란을 막기 위한 일을 하였다.
G. 금강산에 있던 서기는 천문을 보아 토정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고, 아산으로 찾아가 임종(臨終)을 지켜보았다.
서기에 관한 이야기는 문헌설화에 나타나는데, 이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a. 고청 서기는 재상인 심열의 집 종이었는데, 심 대감이 서기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서기는 심 대감이 죽은 뒤에도 부인을 극진히 섬겼는데, 뜻하지 않은 일로 부인께 죄를 짓고 자기 집에 가 있었다. 부인은 귀인들이 서기를 찾아와 위로하는 것을 알고, 그를 노예로 대하지 않았다.
b. 고청 서기는 공주 사람의 종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16세 때 상전의 밭에서 목화를 따다가 소나기를 피하여 바위굴에 들어갔다. 그 때 한 남자가 비를 피하러 들어왔다가 그녀를 겁탈하였는데, 그 때 임신이 되어 낳은 아이가 서기이다. 고청이 18세 때 이 사실을 알고, 그 바위굴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다가 아버지를 만나 함께 살았다.
c. 서기는 어렸을 때 주인을 매우 부지런히 섬겼는데,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저물녘에 빈 지게를 지고 돌아오기를 사흘 간 계속하였다.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서기는 종달새가 나는 연습하는 것을 보고, 그 이치를 궁리하느라고 나무를 못하였다고 하였다. 주인은 그가 종살이를 할 사람이 아니라며 종 신분을 풀어 주었다. 그는 글공부를 하여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 그는 동주 성제원과 토정 이지함과 함께 제주에 가서 남극노인성을 관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혼자 중국에 가서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얻어다가 공주의 공암 서원에 봉안하였다. 서기는 며칠 동안 말없이 어디를 갔다와서는 제자들에게 처사성(處士星)의 흐름을 보니, 구봉 송익필이 보은으로 망명한 것 같아 찾아가서 만나고 왔다고 하였다.
소설 A와 설화 a에서 서기는 종으로 되어 있다. A에서는 심충겸 대감 집의 종으로, a에서는 이름은 밝히지 않고 심 재상의 종으로 되어 있다. 그가 종살이한 곳도 A에서는 충남 보령으로, a에서는 충남 공주로 되어 있어 서기가 충남의 심씨 집에서 종노릇을 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A와 a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상전이 종인 그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서기가 글공부하는 과정이 a에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데 비하여 A에서는 서당에 다니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어깨너머로 글공부를 한 뒤에 상전인 심 대감과 대화하며 시를 주고받고, 글을 가르치는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진다.
서기의 출생을 보면, 설화 b에서는 종노릇을 하는 어머니가 소나기를 피하러 들어간 동굴에서 만난 행인과 관계하여 낳았다고 하였는데, B에서는 금부도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리어 어머니와 함께 종이 되어 종살이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c에서 심 대감은 종달새 새끼가 나는 것을 지기(地氣)의 움직임과 연결 지어 관찰하는 서기의 총명함을 보고, 종노릇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속량(贖良)한다. C에서는 서기를 속량하는 심 대감의 의도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으나, 서기가 원래 양반의 자식이었다는 점과 남달리 총명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c에서 서기는 별의 움직임을 보고, 구봉 송익필이 망명할 것을 미리 알고 찾아가 만날 정도로 천문에 능하다. 이러한 서기의 능력은 C를 비롯한 여러 대목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토정의 수한(壽限)이 다한 것을 아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설화에서 서기는 토정과 함께 남명 조식을 찾아갔다가 남명의 사치스러움을 보고 똥을 누어 책상과 이부자리에 발라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없이, 서기가 토정을 만나러 지리산 산천재에 갔다가 남명 조식을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작자는 설화를 수용하여 서기를 토정의 측근 인물로 꾸미고, 화자로 등장시켜 작품을 이끌어가도록 구성하였다.
2. 걸인청(乞人廳) 운영
아산 현감이 된 토정이 걸인청을 두고 유랑민을 보살피는 이야기가 설화와 소설에 나온다. 먼저 소설의 경우를 보면, 걸인청은 소설의 내용 단락 1)에서 임종을 앞둔 토정을 만나려고 아산현에 간 서기가 그를 숙소로 안내하는 관비에게 묻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보게, 잠깐만. 이 방은 뭐하는 덴가?」
「예. 걸인들이 쉬었다 가는 걸인청입니다.……이곳을 지나는 걸인이면 아무나 여기서 먹이고 재우고 기술을 가르쳐 줍니다. 제각기 기술을 익히고 적으나마 살림 밑천을 마련하면 양민이 되어서 이곳을 떠납니다. 그 동안 이곳을 스쳐간 사람이 굉장히 많답니다. 이제 이곳 아산의 걸인이나 유랑민들은 다 없어졌으나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찾아오는 바람에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답니다. 현감 어르신은 조석으로 이곳에서 걸인이나 유랑민들과 함께 진지를 드시고 같이 일도 하십니다.」
걸인청에 관한 설화의 내용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지함은 유랑민이 떨어진 옷을 입고 걸식하는 것을 가엾게 여겼다. 그는 큰 집을 지어 그곳에 살도록 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하나를 손수 업으로 삼아 살도록 하였는데, 직접 대면하여 깨우쳐 주지 않음이 없었다.
그는 각 사람을 이끌어 의식을 주선하여 주었다. 능력 있는 자에게는 미투리를 삼도록 하고 친히 감독하여 하루에 10켤레씩 만들어 팔게 하였는데, 이로써 의식이 풍족해졌다. 그런데 일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말없이 도망하는 자들도 많았다.
위 이야기는 문헌에 기록된 것인데,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구전으로도 전해 온다. 이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떠도는 유랑민이나 걸인들에게 살 집을 마련해 주고, 능력에 맞는 일을 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하려고 애쓰는 토정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걸인청을 세운 토정이 직접 걸인청에 나가 거기에 온 사람들을 살피는 이야기는 소설의 내용 단락 38)에도 나온다. 토정은 걸인청에 오는 유랑민을 보살피다가 해사에서 하룻밤 인연을 맺은 후로 잊지 못하던 희수를 만났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설의 걸인청 운영에 관한 내용은 작자가 문헌 및 구전 설화에 나오는 걸인청 이야기를 수용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3. 묏자리 잡기와 단맥(斷脈) 및 비보(裨補)
소설에는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표현된 곳은 다음의 세 군데이다.
A. 어머니의 묏자리--토정의 어머니 묏자리를 잡을 때 지관이 그 곳에 묘를 쓰면 첫째와 둘째 아들 쪽으로는 영상(領相)이 줄줄이 나오지만 막내아들 쪽으로는 영 벼슬 인연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형 지번이 딴 자리를 알아보자고 하였으나, 토정이 극구 형을 설득하여 그 자리에 묘를 썼다. 그 후 두 형의 아들들은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토정의 아들들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하권 257~259쪽)
B. 포천의 잠두산 끊기--포천 현감이 된 토정은 세도를 부리는 김씨를 누르기 위하여 물길을 틀어 잠두산(蠶頭山) 아래로 흐르게 해 놓고, 그 위에 제방을 쌓은 다음 제방 위에 옻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김씨 가에만 집중된 생기가 고을 전체에 고루 퍼지는 형국이 되었다. 그 후 김씨 가에서는 대과는 물론 향시에서도 급제자가 나오지 않았다. (하권 171~172쪽)
C. 남근석(男根石) 세우기--음기(陰氣)가 세서 남자가 살지 못하고, 그 마을 처녀는 다른 곳에서 받아주지 않아 시집도 못 가는 해사 마을에 남근석을 세워 음기를 제압하였다.(중권 133~146쪽, 하권 236~237쪽.)
문헌설화에는 A와 같은 내용의 설화가 여러 편 전해 온다. 그러므로 A는 여러 문헌에 실려 있는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수용한 것이라 하겠다. 단락 34)의 B와 단락 36)의 C는 풍수의 단맥(斷脈)과 비보(裨補)에 관한 이야기이다. 설화에는 토정이 어머니의 묘 자리를 잡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풍수에 능하였다는 이야기가 여러 편 전해 온다. 그러나 위의 B와 일치하는 내용의 설화는 없다.
설화에는 토정이 풍수 상으로 허약한 부분을 보완하여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든 비보(裨補) 이야기가 전해 온다.
토정이 천안시 성남면의 흑성산에 가보니, 그곳이 앞으로 명당이 될 곳인데, 그러려면 봉황 한 마리가 더 있어야 하였다. 토정은 봉황이 한 쌍이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 천안시 북면에 있는 산에 봉황산, 마을에 봉황이 먹는다는 오동나무가 있는 오동촌, 봉황이 앉는다는 푸른 대나무가 있는 청대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 지명을 사람들이 널리 불러야 하는데 물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살기 불편하므로, 토정은 보를 쌓아 물이 흐르게 하고 사람이 살게 하였다. 그래서 이 보를 토정보(土亭洑)」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비보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전해 온다. 그러므로 단락 C는 작자가 「토정보(土亭洑)」 이야기와 같은 비보담을 수용하여 구성한 것이라 하겠다.
이로 보아 B와 C는 풍수설화에 많이 있는 단맥담(斷脈談)과 비보담(裨補談)을 수용하여 구성한 것인데, B는 포천의 세도가 김씨를 제압하고 포천현 전체에 생기가 감돌게 하는 방법으로, C는 음기가 많아 남자들이 살지 못하는 해사 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로 바꾸는 방법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어머니 묘 앞에 둑쌓기
소설의 내용 단락 1)에는 어머니 묘 앞에 둑을 쌓는 이야기가 나온다.
토정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나이가 든 뒤에 어머니 묘지 앞에 조수(潮水)를 막을 방죽을 쌓아야겠다고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돈을 벌어 인부를 사서 둑을 쌓았다. 방죽을 쌓은 지 두 해 만에 큰 해일이 일어 바로 그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래서 토정의 어머니 무덤만 무사하고, 근처의 논이고 밭이고 싹 쓸고 지나갔다고 한다.(상권 32쪽 및 34쪽)
이와 관련되는 설화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토정이 어렸을 때 어버이를 바다굽이에 장사하였는데, 조수가 점점 가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천백 년 뒤에는 물이 무덤을 침범할 것이라 하여 이를 막는 둑을 쌓으려고, 곡식을 늘리고 재물을 모으며 준비하였다. 사람들이 비웃었으나, 토정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며 계속하였다. 그러나 바다 어귀가 넓고 커서 준공하지는 못하였다.
위 이야기에서는 바다 어귀가 워낙 넓고 커서 토정이 어버이 무덤 앞에 둑 쌓는 일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둑쌓기에 성공한 이야기도 있다.
토정이 젊었을 때 형과 함께 산에 가서 한 무덤을 보았다. 토정은 그 자리에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자고 하고, 형은 남의 묘를 훼손할 수 없다고 하여 다투었다. 날이 저물어 두 사람이 불빛을 보고 가니, 한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꿈에 한 사람이 푸른 철릭을 입고 나타나서 자기가 유택을 옮기려 하니 두 사람을 잘 대접하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제사를 지내고 무덤을 이장하였다.
그 묘는 보령 바닷가에 있어 물이 먹어들어 왔는데, 토정이 빈손으로 장사를 하여 모은 천금으로 제방을 겹으로 쌓았다.
위 이야기에서 토정은 장사하여 번 돈으로 어머니 묘 앞에 제방을 쌓아 해일의 피해를 예방하였다고 한다. 구전설화에는 토정이 바닷가 마을에 해일의 피해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마을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하였으나 피하지 않아 많은 사람이 죽고, 몇 사람만 살았다는 이야기가 여러 편 전해 온다. 이것은 토정이 앞일을 예견하는 능력이 뛰어났음을 말해 준다. 이로 보아 소설의 어머니 묘 앞에 둑 쌓기는 토정이 젊었을 때부터 예견력이 뛰어났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작자가 위의 설화를 수용하여 구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5. 장사하여 이익 얻기
소설에서 토정이 장사를 하여 이문을 남기는 이야기는 단락 9)와 단락 31)~32)에 나타난다. 해당 내용을 간략히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A. 토정은 아내가 가지고 있던 돈으로 나막신을 모두 사들인 다음, 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비가 내리자 나막신 값이 뛰었으므로, 나막신을 팔아 4배의 이문을 남겼다.(상권 204~209쪽)
B. 토정은 농사를 지으면서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용인 안명진 진사에게서 10만 냥을 빌려 안성과 용인에서 나는 유기와 대추․밤․배, 금산의 6년근 홍삼, 전주의 질 좋은 한지, 영광의 물 좋은 굴비, 강진의 분성사기와 백자, 제주도의 말총, 경상도의 금과 은 등을 사서 안 진사의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값이 오른 뒤에 팔아 많은 이문을 남겼다. 토정은 안 진사에게 빌린 돈을 갚고 남은 돈으로 곡식과 옷감을 싣고 삼개나루로 와서 토정을 짓고 거처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 상담하고, 사주를 짚어본 뒤에 자립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를 나누어주었다.(하권 98~160쪽)
A는 토정이 서화담을 찾아 송도에 가기 위한 여비와 고생하는 아내에게 줄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잠깐 시험해 본 것이다. B는 전국의 특산물을 매점매석(買占賣惜)하여 큰 이문을 남긴 이야기이다. 이것은 토정이 전국을 순회하며 지리(地理)와 인물(人物)과 물산(物産)을 깊이 연구한 뒤에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한 장사 이야기로 많은 분량에 걸쳐 서술된다.
설화에서 토정이 상업적인 수완을 보이는 이야기는 앞에서 살핀 ‘놋그릇을 팔아 수저를 사서 이문을 남긴 이야기’를 들 수 있고, 그 다음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 수 있다.
토정은 백성들에게 장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맨손으로 생업에 힘써 수년 내에 수만 석에 이르는 곡식이 쌓였는데, 가난한 백성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또 한 섬에 들어가 바가지를 심어 수만 개의 바가지를 만든 뒤에 그것으로 천 석이 넘는 곡식을 산 다음, 경강(京江)의 마포로 운반하여 강촌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위 이야기는 토정의 상업적인 수완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소설의 A와 B는 작자가 이러한 설화와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참고하여 구성한 것이다. 작자가 연암의 「허생전」을 참고한 것은, 하권에 실린 제31장의 이름을 ‘허생전’이라 하고, ‘머리글’에서 토정을 연암이 쓴 「허생전」의 주인공으로 비견하였음을 밝힌 것에서 알 수 있다.
6. 양어장 메우기
내용 단락 38)에서 아산 현감이 된 토정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뜻에서 양어장을 폐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대목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아산의 양어장에서 나오는 잉어는 워낙 맛이 좋아 아산 지방의 특산물로 이름이 높았다. 서울의 벼슬아치들은 그것을 알고는 나라님께 바치는 공물 품목에 넣었는데, 중간에 손을 대는 관리들이 많아 해마다 잉어 공물량이 늘어났다. 잉어 양식량은 늘 같은데 할당량이 늘어나니 백성들만 죽을 지경이었다.
토정은 그 말을 듣고 즉각 양어장을 흙으로 메꿔 폐쇄시켜버렸다. 잉어를 아예 산출시키지 않아 공물량의 많고 적고로 인한 시비가 생길 겨를이 없게 만든 것이었다.(하권 262쪽.)
이와 비슷한 내용의 설화가 구전으로 전해 오고, ?토정집?에도 전해 온다. 소설과 설화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설화에는 메운 양어장이 현감에게 드리는 물고기를 기르는 곳으로 되어 있는데, 소설에서는 나라님께 바치는 잉어를 기르는 곳으로 되어 있어 양어장의 폐해를 나라의 일로 확대하였다.
이처럼 소설의 작자는 토정의 양어장 메우기 설화를 수용하되 현감에게 바치는 물고기를 기르는 양어장을 임금님께 바치는 잉어를 기르는 곳이라 하여 상납 제도의 문제점과 폐해를 지적하면서 이를 개혁하려는 토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7. 소박하고 절제하는 생활
소설의 내용 단락 34)에서 작자는 포천 현감으로 부임하는 토정의 모습과 부임 첫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토정은 나발소리를 거두라고 명하고 환영행사를 물리쳤다. 그리고 조용히 관아로 향했다.…………관아에 도착한 토정은 베옷에 짚신으로 갈아입었다.
때가 되자 저녁상이 들어왔다. 상다리가 휘도록 신수성찬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토정이 수저도 들지 않고 물끄러미 상을 내려다보자 아전들은 상이 빈약해서 그러는 것으로 짐작했는지 황급히 상을 물리고 더 큰 상을 차려왔다. 그래도 토정은 밥상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먹을 만한 게 없소.」
관리들은 어쩔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그러자 토정은 넌지시 잡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여 그것을 달게 먹었다.(하권 167~168쪽)
이처럼 소설에는 포천 현감으로 부임하는 토정의 소박하고 절제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 대목은 다음 설화와 일치한다.
포천 현감이 되어 베옷과 짚신, 베삿갓 차림으로 등청하여 내온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아전이 맛있는 음식을 가득 차려왔으나, 역시 먹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토정은 오곡이 섞인 잡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을 모자 갑(匣)에 차려서 내오도록 하였다.
다음날 읍의 관리들이 오자, 마른 나물을 넣고 끓인 죽을 권하니, 그들은 조금 먹고는 토하였으나, 지함은 다 먹었다. 오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읍 사람들이 길을 막고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문헌에도 전해 온다. 이로 보아 소설의 토정의 포천 현감 부임 대목은 위의 설화를 수용하여 토정의 검소하고 절제하는 모습, 목민관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화에는 토정이 고청(孤靑) 서기(徐起)와 함께 지리산의 남명(南溟) 조식(曺植)을 찾아갔다가 그의 호사스러움이 못마땅하여 그의 방에 소변을 보고, 벽과 책상, 이불에 똥칠을 하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화려한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토정의 의식을 표현한 것인데,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없고, 토정이 남명과 만나 도에 관한 토론을 벌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8. 바다를 읽는 어부
소설 중권 ‘바다를 읽는 어부’에서 이지함 일행은 홍성의 바닷가에서 만난 노인의 배를 타고 해남으로 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 그 노인은 기후의 변화를 비롯한 자연의 섭리는 물론 인간의 도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가졌으므로, 이지함은 그와 함께 여행하는 며칠 동안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노인의 딸이 고기를 가지고 가서 비싼 값에 팔았다고 하자, 노인은 “나는 어부지 장사꾼이 아니다. 가서 제값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고 오라.”고 하여 제값만 받게 한다.
위 내용과 일치하는 이야기가 ?토정집?에 전해 오는데, 토정은 노인을 충청도의 해상에서 처음 만나고, 10여 년 뒤에 다시 전라도 바닷가에서 만났는데, 그를 존경하여 다음에 찾아가니, 자취를 감추어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소설의 작자는 이 이야기를 수용하여 ‘바다를 읽는 어부’ 장을 구성하였는데, 토정이 서화담을 따라 전국을 순회하는 중에 충남 홍성의 바닷가에서 만나 그의 배를 타고 해남까지 가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다.
9. 임진왜란 예견과 방비
소설에는 토정을 비롯한 도인(道人)들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는 이야기가 많은 분량으로 서술된다. 토정은 강화도 마리산에서 두 차례에 걸쳐 전국 역학(易學) 대가들과 만나 전란을 막을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전란에 대비하였다. 정개청과 서치무는 싸움터가 될 곳을 찾아다니며 지맥(地脈)을 다스렸고, 정작은 향약(鄕藥)을 살피면서 ?내경(內經)?을 집필하였다. 남궁두는 장수가 될 사람과 의병을 일으킬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임진년의 일을 알렸다. 특히 이이, 이순신, 권율, 조헌, 이산해, 이산보 등에게 전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토정의 말을 들은 율곡은 선조에게 전란에 대비하기 위해 10만 양병(養兵)을 주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토정은 전란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하늘이 정한 이치라서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줄 ?토정비결」을 집필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토정과 이이가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는 설화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수용하여 구성한 것이다. 그 중 토정과 이이와 관련된 설화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a. 선조 때에 한 노인이 과천현의 선비에게 조을(鳥乙)이라는 동물이 알을 낳는 것을 본 나라는 꼭 십 년 후에 전란을 당한다고 하였다. 선비가 노인더러 이름을 물으니, 노인은 스스로 토정 이지함이라고 하고서는 떨치고 가버렸다. 선조 임진년에 과연 왜구가 우리 나라를 침입하였다.
b. 선조 갑신년에 병판으로 있던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자, 예판 서애 유성룡이 민심의 소란을 우려하여 반대하였다. 율곡이 죽은 후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국이 혼란에 빠지니, 서애가 비로소 율곡이 참 성인(聖人)임을 깨달았다.
c. 토정이 조헌과 10만 양병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새파랗게 날이 선 도끼를 임금께 바치면서,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 거짓이라면 두 사람의 목을 쳐 달라고 하였다. 이율곡도 두 사람의 말에 동조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10명의 사신을 보내 일본의 상황을 알아보게 하였는데, 3명은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7명은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 올 가능성이 없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7명의 보고를 받아들이고, 조헌과 토정을 내쫓았다. 이를 본 율곡은 임진강에 화석정을 지어 놓고 강릉으로 돌아갔다.
a는 토정이 신이한 행동을 하면서, 10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였음을 말해 준다. b는 율곡 이이가 병조판서 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고서, 전란이 일어나자 후회하였음을 말해 준다. c는 토정이 중봉 조헌과 함께 목숨을 걸고 10만 양병을 주청하고, 율곡이 이에 동조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소설에는 벼슬을 그만두려는 율곡과 이를 만류하는 토정의 대화가 길게 이어지는데, 이것은 ?토정집」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소설의 임진왜란 예견과 방비 이야기는 작자가 a․b․c와 같은 이야기를 수용하고, 그 당시에 살았던 여러 인물들의 전기에서 조금씩 이야기 거리를 찾아내어 상상력을 불어넣으면서 마디를 연결하고 의미를 되살려 구성한 것이다.
10. 기괴한 행동
소설에서 토정은 각 지역의 지리와 인물과 물산을 살피기 위해 여러 곳을 여행한다. 그 의 여행은 짧게는 몇 달 걸릴 때도 있지만, 몇 해를 계속할 때도 있었다. 여행 중 그의 차림은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는데, 때로는 기괴하였다. 단락 30)에서는 토정이 머리에 솥을 뒤집어쓰고, 여름인데도 거렁뱅이처럼 누비 적삼을 걸치고 있다. 정휴가 그 이유를 묻자, 토정은 이렇게 대답한다.
「오랑캐들이 사는 모양을 구경하다보니 이 솥이 쓰고 다니기가 좋게 생겼길래 한번 써 보았네. 나그네에겐 아주 그만이라네. 닳지도 않고 때가 되면 솥으로 걸어 밥을 지을 수도 있고.」
「다른 뜻이 있겠지요.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습니다.」
「하하하. 상(相)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었네. 헌데, 내가 본시 금기(金氣)가 부족하지 않던가?」(하권 88쪽)
토정은 이렇게 쓰고 다니던 솥을 아버지의 병환을 고치기 위해 달라는 더먹머리 총각에게 주었다.
소설에서 토정은 제주도에 갈 때에 “나룻배 한 척을 얻어 네 귀퉁이에 구멍을 막은 큰 바가지를 주렁주렁 달았다. 바가지가 워낙 물에 잘 떠서 웬만한 풍랑에는 배가 끄떡없이 잘 견뎠다.”고 한다.
토정의 기괴한 행동을 이야기하는 설화 중 소설의 내용과 관련이 깊은 것만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a. 이지함은 기이한 선비였다.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었으며, 대삿갓을 쓰고, 자루를 진 채 돌아다녔는데, 사대부 사이에서 방약무인하였으며, 제가잡술(諸家雜術)에도 능통하였다. 조각배를 타고, 사방에 큰 바가지를 매단 채 세 번이나 제주도에 왕래하였는데도, 풍파와 환난이 없었다. 쇠로 관을 만들어 쓰고 다니다가 벗어서는 밥을 짓고, 씻어서는 관으로 썼다. 8도를 유람하면서도 탈 것을 빌리지 않고 다녔다.
b. 선생이 베옷에 짚신을 신고 대삿갓에 바랑을 지고 다니면서 간혹 벼슬아치들 사이에 놀되 조금도 거리낌없이 행동하였다. 제가잡술에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한 조각 작은 배를 타고 배의 네 귀퉁이에 커다란 바가지를 매달아 가지고 세 번이나 제주에 들어갔으나 풍랑의 환(患)이 없었다고 한다.
c. 선생은 항상 대나무 지팡이를 휴대하고 길을 가다가 잠이 곤하면 곧 두 손으로 지팡이를 꽉 잡고 몸을 굽히어 머리를 낮게 하고, 두 발을 나눠 밟아 정해 선 뒤에 눈을 감으면 코고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 비록 소나 말이 받을지라도 도리어 소나 말이 물러나는 것이었고, 공은 산처럼 꿋꿋이 서서 마침내 움직여 흔들리거나 놀라 깨는 일이 없었다.
위에 나타난 바와 같이 토정은 여행을 즐겼는데, 차림이 기괴하고, 어디서나 잠을 잤다고 한다. 작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수용하여 소설을 구성하였는데, 토정의 여행은 지리와 물산과 인물을 살피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차림이 기괴하였다는 것과 제주도에 왕래할 때에 배에 바가지를 달았다는 것은 그대로 수용하였다. 설화에 나타난 토정의 기이한 행동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소설에서는 옷차림과 솥을 머리에 쓰고 다닌 일만 수용하였다.
소설에서 토정은 큰형 지번이 세상을 떠나자 유해를 홍성 선산에 모시고, 삼 년 간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이것 역시 문헌에 수록된 이야기를 수용한 것이다. 이 대목이 설화에서는 형 지번이 토정을 가르쳤으므로 스승의 예로 3년 복상(服喪)한다고 하였는데, 소설에서는 벼슬자리에 있는 조카가 나랏일에 전념하게 하려고 조카를 대신하여, 3년 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1. 정순붕 첩의 방자
작품의 내용 단락 9)에서 토정의 친구인 안명세가 특정기(特定記) 사건으로 참수 당하고,
안명세의 여동생 안민이는 특정기 사건을 일으킨 정순붕의 집 종으로 끌려갔다. 미모와 교양을 갖춘 안민이가 정순붕을 지성으로 받드니, 정순붕은 그를 애첩으로 삼았다. 얼마 후 정순붕이 죽었는데, 그가 죽은 까닭은 민이가 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뼈를 몰래 구해다가 정순붕의 베개 속에 넣어 방자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 일로 민이 역시 염병에 걸려 죽었다. 정순붕의 작은아들 정작은 그의 집을 찾아간 이지함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민이의 절의(絶義)를 칭찬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문헌에 전해 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인숙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자, 그 노비는 일등공신인 정순붕의 소유가 되었다. 주인이 바뀐 노비들은 슬피 울었으나, 자태와 용모가 아름다운 한 계집종만이 기쁘게 새 주인을 섬겼다. 정순붕은 그녀를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시중들게 하였다.
몇 년이 지난 뒤에 정순붕은 귀신이 그의 머리와 얼굴을 누르는 꿈을 여러 번 꾸더니, 고질병이 되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순붕의 아내가 무당에게 물어보니, 베개 속에 있는 요귀 때문이라고 하였다. 베개를 뜯어보니, 사람의 두개골이 나왔는데, 그 계집종은 옛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기가 하였다고 자백하였다.
그 집에서는 그녀를 죽인 뒤에 말이 밖에 새나가지 못하게 단속하였는데, 작은아들 정작이 죽음이 가까워 오자,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정순붕(鄭順朋, 1484~1548, 성종 15~명종 3)은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 이기 등과 함께 윤임, 유관 등을 제거하는 을사사화의 주동인물이 되어 보익공신(保翼功臣)이 되고, 우의정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이러한 정순붕의 죽음과 관련된 위 설화는 ?어우야담? 외에 ?기문총화?, ?매옹한록?, ?금계필담?에도 실려 있는데, 역적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기문총화?에는 유관(柳灌)으로 되어 있고, 다른 세 문헌에는 유인숙(柳仁淑)으로 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유인숙이 아니라 유관이 맞을 것이다.
작자는 위 이야기를 수용하여 작품을 구성하면서, 유관의 집 계집종을 특정기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안명세의 여동생이며 이지함의 정혼녀인 안민이로 바꾸어서, 친구와 정혼녀를 잃은 이지함의 아픈 마음과 그리움을 그리고 있다.
12. 신처(神妻) 이야기
내용 단락 35)에서 이지함은 스승인 북창의 말대로 화순 운주사로 가다가 금성산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는데, 불빛을 따라 간 곳이 산 속에 있는 신당(神堂)이었다. 그는 신당에 있는 여인에게서 그 곳이 고려 때 탐라를 정벌하고도 공을 인정받지 못해 한을 품고 죽은 장수의 영을 모신 신당인데, 오래 전부터 처녀를 신의 아내로 바치는 풍습이 전해 온다는 것을 듣는다. 그는 그녀가 신처가 되기까지의 일을 듣고, 사주를 본 뒤에 신당 아래채에서 그날 밤을 지낸 후 이튿날 운주사로 가서 지족 선사를 만난다.
신당에 신처(神妻)를 바치는 이야기로는 「최영 장군의 사당」 이야기가 있다.
개성의 덕적산에 최영의 사당이 있는데, 지방 사람들이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 하였다. 지방 사람들은 사당 옆에 침실을 만들고 처녀를 두어 사당을 모시게 하였는데, 처녀가 늙고 병들면 젊고 예쁜 사람으로 바꿔서 모시게 하였다. 시녀는 밤이 되면 신령이 내려서 교접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300년 동안을 하루같이 그렇게 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단락 35)의 신처 이야기는 조선 후기에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실려 있는 「최영 장군의 사당」 이야기를 수용하여 구성한 것이라 하겠다. 작자는 이 이야기를 수용하여 작품을 구성하면서 신처가 동자승과 정을 통하는 장면을 설정하였다. 신처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는 구성은 홍명희의 「임꺽정」에도 보인다. 작자는 신처와 정을 나누던 동자승을 지족 선사의 상좌승으로 설정함으로써 이튿날 토정이 운주사에서 다시 만나게 하였는데, 그가 토정이 해사에서 인연을 맺은 희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규철이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작자는 신처를 바치는 풍습을 비판하면서, 토정이 해사 마을에서 인연을 맺은 희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규철을 만날 수 있게 하는 복선을 깔아 놓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소설 토정비결」은 작자가 토정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수용하고, 당시에 살았던 여러 인물들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조금씩 이야기 거리를 찾아내어 상상력을 불어넣으면서 마디를 연결하고 의미를 되살려 구성하였다. 그래서 토정의 삶과 수도하는 과정,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줄 「토정비결」을 쓰는 과정을 매우 역동적으로 그렸다.
Ⅳ. 맺음말
「소설 토정비결」은 작자가 토정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수용하고, 당시에 살았던 여러 인물들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조금씩 이야기 거리를 찾아내어 상상력을 불어넣으면서 마디를 연결하고 의미를 되살려 구성하였다. 그래서 토정의 삶과 수도하는 과정, 전국의 지리와 물산과 인물을 살피면서 겪은 일, 임진왜란을 막기 위한 노력, 백성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줄 ?토정비결?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매우 역동적으로 그렸다.
「소설 토정비결」의 작자 이재운은 많은 설화를 수용하여 이 작품을 구성함으로써 현대 소설 독자들에게 역사적 인물인 토정 이지함의 이미지를 새롭게 형상화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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