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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홍만식의 삼사(罧史)

어제 인사동 나갔다가 수묵화가 김호석 화백 만나고 돌아오니 그의 페북에 홍만식의 글씨가 올라와 있다. 나하고 헤어진 뒤 인사동 어느 가게에 들렀다가 구한 글씨란다.
罧史(삼사).
罧은 그물 网과 나무들林로 만들어진 글자인데, 물고기가 많은 웅덩이에 던져넣는 풀미끼 같은 것이다. 이걸 '깃'이라고 한다. 풀을 뜯어 둥글게 뭉친 다음 웅덩이에 던지면 물고기가 물풀인 줄 알고 모여든다. 그러면 지켜보던 사람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다.
그러므로 삼사(罧史)는 '물고기를 잡아온 이야기'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문집의 제목인 듯한데, 내용은 모르겠다.
다만 나는 1800년대 중반에 태어난 우리 조상들의 불운을 느낀다.
대원군 이하응, 그의 어리바리한 아들 고종 이재황, 욕망은 넘치지만 무능한 왕비 민자영 등이 세상의 흐름을 보지 못한 채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개굴거릴 때, 당시 지식인들, 선구자들의 숨은 얼마나 거칠었을까 상상해 본다.
하필 태어나고 보니 서구 열강이 날마다 쳐들어와 통상을 요구하고, 조정은 쓰레기 잡놈들이 차지하여 매관매직하며 지친 백성을 뜯어먹기 바쁘고, 힘은 없고 능력도 안되고 지식도 부족하여 부르르 두 주먹 밖에 쥘 게 없었다면 난들, 넌들 어쩌랴.
일본처럼 유신, 개혁이라도 하여 서구에 먹히지 않아야 한다면서 그 일본 따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목 잘려 죽은 김옥균 등 피 끓는 젊은이들의 타는 가슴이 느껴진다. 이 글씨를 쓴 사람 호운 홍만식이 그런 시대를 살았다.
형보다 더 피 끓는 아우 홍영식은 우정국 총판으로 있던 중에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사흘만에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역적이다. 갑오개혁 때 김옥균이 가까스로 복권시켰지만, 그나마 김옥균마저 목이 잘린 뒤 도로 역적이 되었다.
이 글씨의 주인공 홍만식의 아버지이자 영의정 출신이자 대원군의 측근이던 홍순목은 '부끄러워' 자결했다. 글씨 주인 홍만식도 그 즉시 삭탈관직되어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스스로 나아가 감옥살이를 살았다.
망해가는 나라를 살려보려 이리저리 뛰어보지만 암울한 그의 조국 조선은 티끌만큼도 변하지 못하고 끝내 일제로부터 을사늑약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가장 먼저 음독자살해버렸다.
이 글씨에는 홍만식이 만난 시대의 아픔이 서려 있는 듯하다.
우리 할아버지는 1900년생으로, 홍만식과 비슷한 또래의 형 따라다니며 만세운동을 하고, 독립군자금을 모아 만주로 보내셨다. 당신들은 콩깨묵으로 연명하고, 일제 치하에서는 교육을 시킬 수 없다 하여 자식 중 국민학교라도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서당만 다녀 내 아버지와 숙부들과 고모들의 학력은 모두 무학이다.
1950년생인 내 형도 그 못지 않은 불우한 시대를 견뎠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 시대를 잘못 만난 청년들이 다투어 몸을 던지는 일이 있었고, 광주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 20, 30세대가 유독 자주 거론되는데, 너희는 태어나자마자 선진국 국민이어서 이런 이야기를 읽어도 영화나 소설처럼 느껴질 것이다.
국민소득 60달러 시대에 태어난 내 또래들에게 옛날 이야기는 그저 눈물 뿐이다. 너희는 비장할 것도 없고, 나라를 위해 자결하거나 의병에 나갈 일도, 학도병으로 나갈 일도, 화염병 들고 나갈 일도 없다. 그저 구김살 없이 마음껏 상상하며 창의적으로 살아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구질구질한 20세기 이야기할 것도 없다마는, 소설 읽듯이, 영화 보듯이 '옛날 아주 먼 옛날,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이해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