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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기쁨과 슬픔의 무게를 달아보니

기쁨과 슬픔의 무게를 달아보니

비가 억수(惡水)같이 쏟아진다.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창문이며 봉당에 내리치는 빗소리가 매미 울음소리보다 더 시끄러워지면 이제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샛노란 번개가 쩍쩍 갈라지고 큰북을 치듯 천둥하면 겁많은 우리집 개들은 죄다 현관으로 기어든다. 평소같으면 털만 닿아도 누구냐며 으르렁대던 놈들이 얌전히 포개눕는다. 컴퓨터와 텔레비전까지 꺼놓고 앉아 있다 보면 곧 처연한 감정에 빠진다.

까마득히 잊었던 한 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대학에 다닐 때다. 기독교를 신앙하던 한 시인이 요절했다. 평생 병고에 시달리다가 끝내 고치지 못하고 숨졌다. 그 사이 가정은 무너지고 시인의 꿈도 산산이 부서졌다. 죽을 당시의 자리도 남의 집 사글세방이고, 남긴 유산이라고는 빚과 쓰레기로나 분류될 구차한 살림살이 뿐이었다. 그렇건만 그는 장문의 시 한 편을 하느님에게 바치고 임종했다. 그 시에 적기를 평생 관심을 놓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노라고, 하느님의 이렇듯 집요한 사랑이 없었다면 자신은 천둥벌거숭이처럼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인생을 마쳤을 것이라며 거듭 하느님을 찬탄하였다.

지금 왜 그 이야기가 머리에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천둥소리가 거세질수록 내 겨드랑이로 파고드는 실내견 두 아이의 눈망울이 서글프다. 그런 기분으로 인생을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자니 만 가지 상념이 오락가락한다. 딸아이는 비가 오는지 마는지 제 방에서 그림 그리기에 바쁘다. 제 모습을 그릴 때는 온갖 액세서리를 갖다 붙이고, 화려한 물감을 들이붓는다. 그래도 내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딸이 불쌍해 보인다. 신이 나서 부르는 노랫소리에도 가슴이 저민다.

또 열한 살 늙은 개가 밥을 먹지 않고 오래도록 기운없이 누워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갖다 바치면서 제발 먹어달라고 사정하기도 한다. 그래도 기운을 차리지 못하면 영양제를 강제로 먹인다. 그러다가도 기운이 돌아오면 먹을 것 더 달라며 현관문을 두드리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전속력으로 대문까지 달려나와 꼬리를 치며 내 바지를 물어뜯는다. 그럴수록 녀석의 나이가 걱정된다.

날이 가물 때는 마당의 화초며 잔디도 걱정이 된다. 외출할 때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물 좀 주시라고 어머니에게 청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거실 화분에 사는 집없는달팽이는 더 신경이 쓰인다. 이 녀석들은 하루에 뽕잎을 대여섯 장씩 먹어치운다. 텃밭에서 떠온 흙에 몇 마리 붙어 있던 놈들이 어느새 새끼를 쳤는지 수십 마리로 불었다. 처음엔 그냥 안쓰러워 상추나 열무 같은 연한 잎을 따다주었는데, 그것도 문리가 트니 나중에는 뽕잎이 가장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녀석들을 야생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뽕잎에 달라붙을 때마다 주워다가 풀숲에 옮겨주는데, 내 손이 녀석들의 생식(生殖)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지 도무지 줄지를 않는다. 나나 달팽이나 피차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하는 수없이 화분을 마당으로 끌어낼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니 내 자신이 몹시 비뚤어진 이기심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 딸아이가 깔깔거리며 텔레비전 만화를 즐기고, 늙은 개가 기운차게 마당을 뛰어다니며 짖어대고, 잔디나 화초가 싱싱하게 자라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흐뭇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하면 나는 그들에게서 고통의 자유를 빼앗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고통, 고난이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는 인생의 깊이를, 그걸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막아서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든다.

나는 아들 다섯에 삼촌들까지 득실거리는 가난한 시골 농부 집안에서 자랐다. 마늘 한 통이면 사먹을 수 있는 얼음과자조차 머릿수가 너무 많아 번번이 참으라고 강요받던 살림살이였다. 먹고사는 게 지상과제인 시절이었다. 그런 중에도 인생의 희노애락이 있었고, 크고작은 깨달음이 있었다. 병원이 너무 멀리 있어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통이 깨지는 중상이 아니라면 집에서 민간요법으로 해결하고, 한 아이의 작은 관심사쯤은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교과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학교를 다녔다. 영어 단어를 써보면서 암기할 종이조차 없었다. 아니, 종이가 있어도 연필이 아까워 차마 쓰질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막상 그런 삶이 가난하거나 구차스럽다고 느끼지 못했다. 폐광촌인 우리 동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서울에서 사귄 친구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내가 ‘상대적으로’ 힘들 게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콤플렉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식이며 가족, 우리집 애완견, 화초한테까지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비가 그쳤는가 보다. 우리집 ‘영감’ 도롱이가 거실 창밖으로 와서 안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도 조금씩 걷히면서 흰구름으로 빛나고 있다.
 
 - 1998년이나 1999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