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가 싫기는 하지만...
어느 유명 인사께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노래하는 것을 가리켜 ‘언어가 설사한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전혀 거르지 않고 나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씨부렁’거리는 듯한 랩 스타일의 노래를 그렇게 평했는가 보다. 나는 그 분처럼 초로의 세대도 아니건만 이 말이 썩 그럴 듯하다는 느낌이다. 내가 듣기로도 그런 소리는 중얼거리는 것 이상으로는 절대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사실은 그분이나 내가 서태지의 노래를 소화하지 못하고 설사하는 것이겠지만...)
나처럼 애매한 나이, 즉 기성도 아니고 신세대도 아닌 30대 사람들은 참으로 괴롭다. 10년 전만 해도 기성 세대를 싸잡아 비난하고 욕하던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상큼한 감각으로 기성 세대를 힐난하던 우리 30대이건만 지금의 10대 20대 중 상당수의 의식 구조는 도대체 알 길도 이해할 길도 없다.
적어도 내가 대학에 다닐 때에는 민주주의니 독재 타도니 하여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일제에 타협한 지식인들, 독재 정권에 영합한 정치인들, 정치판에 총들고 뛰어든 군인들을 골고루 욕하는 재미를 만끽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것같다. 물론 그때라고 해서 요즈음의 오렌지족 아이들처럼 유흥가를 쏘다니던 친구들이 왜 없었겠는가.
요즈음 우리가 X 세대라고 즐겨부르는 10대 20대 아이들은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가졌던 그런 종류의 목표 따위는 전혀 없는 것같다. 예를 들어 지금의 노년 세대들은 일제를 물리치고 독립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그뒤 이승만 시대에는 이기붕 일당 등 독재자와 친일파를 몰아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그뒤 줄곧 박정희 군사 정권, 전두환 군사 정권, 노태우 군사 정권을 타도하여야 한다는 국가적 목표가 있었다. 즉 우리 민족이 국가적으로 가질만한 공동 목표가 끊이지 않고 있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X 세대는 그렇지 않다.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쿠프랜드가 1968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신세대를 가리켜 사용한 말인데, 전세계적인 공감을 얻은 말이 되었다. 더글라스는 부모가 이룩해 놓은 복지 상태에 이르는 것을 포기한 첫 세대라는 뜻으로 이 말을 쓴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아버지 세대, 형의 세대는 죽어라 하고 경제 발전에 매진한, 그래서 물질적으로는 충분히 살만큼 된 상태,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는 허전한 현실을 이 X 세대들이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세대는 참을 수 있을 만한 어떤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즉 국가적 목표를 상실한 지금 그들은 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욕망과 욕구를 빼면 아무 희망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어제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선진국이라는 프랑스가 일찍부터 x 세대 현상을 보인다고 생각해 보았다. 세 가지 색 블루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평범하고 참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병원에서 갑자기 유리창을 깨뜨리고, 그러고 나서는 태연하게 자살을 기도하였다. 또 나중에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남의 집 시멘트 담벼락에 주먹을 대고 한참이나 긋고 갔다. 당연히 손등의 살이 뭉개지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아주 태연하게 길을 갔다.
생각나는 대로, 당장 슬프면 울고, 당장 기쁘면 웃고. 이 여주인공은 남편이 죽자마자 어떤 남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이고는 격렬한 정사도 한 차례 벌인다. 그러고는 잘 가라고 한 마디 이르고는 또다시 슬픔에 젖는다.
요즈음 10대들이 하는 현상과 비슷한 면이 많다. 다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30대 가정 주부라는 점이 다르다.
프랑스 영화에서는 그밖에도 ‘37도 2분’이라든가 ‘니키타’ 같은 영화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아마도 2차대전 후의 선진국 프랑스의 국민으로 태어나 너무나 행복하게 살아온 프랑스인들이 이제는 점점 더 개인적인 세계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같다. 카메라가 보는 각도도 미국 영화나 우리나라 영화하고는 근본이 다르다. 우리는 자동차가 지나가면 전체 모습을 찍거나 적어도 운전자의 얼굴이 나오도록 찍는데, 이들은 바퀴가 굴러가는 모습만 죽어라 하고 찍는다든가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비치는 영상을 집요하게 찍는다든가 하는 식이다. 도저히 정상적인 시각만으로는 재미가 없는가 보다.
프랑스 영화가 장황해진 것은 우리나라 이야기와 비교를 해보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10대 20대 젊은이들은 프랑스인들이나 일본인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서다.
물론 우리나라는 잘사는 축에 들어간다. 이제 먹을 것 궁해서 허겁지겁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독재 정권도 무너뜨리고 마침내 문민정부도 섰다.
그렇지만 그래봤자 국민총생산은 세계 32위에 불과할 뿐이다. 유독 우리만이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독재정권과 맞서 있다. 남북 문제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만약 남북간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다름아닌 X 세대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북한의 핵 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니라 X 세대의 목숨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또 학문적으로도 우리나라는 자주적이지 못하다. 내 아들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으로 다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서울대학교보다 훨씬, 정말 훨훨씬 좋은 대학이 지구상에는 셀 수 없을만큼 많다. 일제와 미국 학문에 멍이 든 우리 국학(國學) 따위는 차라리 폐가처럼 먼지가 수북하다. 할 일이 너무 많은 세대, 차라리 우리 30대라면 독재 정권과 싸우느라고 공부할 새가 없었어, 4,50대라면 먹고 사는 게 급해서 그런 건 생각할 수도 없었어 하고 핑계나 댈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신세대들은 그런 걱정은 없다. 목표를 찾으면 신세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가장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세대이다. 그 목표, 그것을 어른들이 찾아주어야 한다.
부모들이 먼저 아이들에게 환상 따위를 심어주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말해보자.
당신이 잘 살아야 얼마나 잘 삽니까? 정말 잘 사는 사람을 구경하지도 못했군요.
당신 자식이 똑똑해야 얼마나 똑똑합니까? 정말 똑똑한 남의 자식을 구경하지도 못했군요.
이 나라가 뭐 그리 살기 좋습니까? 아직도 사고 투성이, 부정 투성이, 정말로 고쳐야할 게 너무 많은 집구석 아닙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아무 말이나 지꺼리면서 흥얼대는 저 어린 것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 바로 어른들이 일깨워 주어야 한다. 바로 그들이 우리나라를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으로 끌어올려야 할 세대들이다. 그들이 이대로 방종하다가는 우리나라도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꼴이 될지도 모른다.
- 1993년경에 쓴 글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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