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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내 고향 청양, 그 파란 태양

☞ 내 고향 청양, 그 파란 태양
 

* 원래 '푸른 태양'이라고 적었는데 '파란 태양'으로 바꾼다. 하지만 아이디 '푸른태양'은 기록이니

그냥 둘 수밖에 없다. 푸른태양은 태양 온도에 따라 변하는 걸 나타냈다.


나는 청양에서도 벽지로 이름난 운곡면, 그 운곡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할 때까지 살았다.
내 또래라면 특별한 얘기도 아니지만, 난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가방이란 걸 들어보고,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본 것도 그 해가 처음이었다. 2층집조차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보고 나름대로 엄청난 문화, 문명 충격을 받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내가 처음 겪은 신문명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텔레비전이라는 걸 버스터미널(당시 차부라고 불렀다) 옆 무슨 양복집 창밖에 서서 처음 구경하고, 자석식 전화기를 처음 구경했다. 만화방이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돈이 없어 가보지는 못했다.
기억이라곤 이런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집안이 왜 청양에 내려갔는지 안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낸 기록에 따르면 17세기 초, 거제도 장승포로 귀양가 몇 년 고초를 겪던 분이 형제를 이끌고 숨어든 곳이 지금의 청양 장승개(개는 浦를 말한다)다. 그러다 인조반정에 참여하면서 우리 집안은 이때부터 청양의 대표적인 반가로 행세한 모양이다. 거기서부터 흘러흘러 4백년이 되어 내게 이르렀다. 4백년을 장승개와 운곡 오로지 두 곳에서만 산 것이다.

그래서 청양은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 조상들의 뼈가 수없이 묻혀 있는 나의 4백년 연고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청양(靑陽)이란 말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고향 이상이다.
그런 덕분에 내 통신 아이디는 한때 '푸른태양'이었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대신 재당질이 천리안 아이디로 쓰고 있다. 이 재당질 역시 청양중 출신이고, 우리 집안의 본거지인 장승개에서 났다. 그 애가 아니어도 우리 집안은 대부분 청양중 동창이고, 아마도 우리 집안 식구만으로 동창회를 열어도 적잖이 북적댈 것이다.

어쨌든 '푸른태양'이라는 아이디는 청양(靑陽)을 우리말로 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사기(史記)에 보면 하루 햇빛을 시간대별로 나누어 이름을 붙인 게 있는데 청양은 그중에서도 가장 밝은 시각의 햇빛을 가리킨다. 그 뜻이 좋아서 그런지 중원(中原)에도 청양이란 지명이 있다. 그 이름을 따 온 것인지, 아니면 백제 시절 거기 살던 사람들이 돌아와 고랑부리란 옛 지명 대신 붙인 것인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정권이 강제로 개명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나로서는 그 지명의 유래보다는 내 키가 170센티 정도(고 1때) 자랄 때까지는 적어도 청양의 물을 마시고, 그곳에서 난 곡식을 먹고 자랐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땅의 바람을 마시고, 그 땅의 흙냄새를 맡으며 자랐으니 구기자나 고추만 청양산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나 역시 엄연한 청양산이다.
지금도 그곳에 가야만 마음이 편하다. 구름이 낯설지 않고, 망초 한 송이조차 오래 된 친구 같다. 서울에 십년을 살아봐도 남의 땅 같고, 지금 사는 용인에도 11년째 살고 있지만 그냥 직장에 나와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다.

어제, 하도 시골에 내려간 지가 오래되어 왜 안오느냐고 홀어머니가 성화하는 바람에 오후 다섯 시에 시골집에 내려갔다. 그러고는 밥 먹고, 당숙한테 인사 드리고, 감 한 접 따고, 그렇게 두 시간쯤 있다가 올라왔다. 트렁크에는 혼자 사시는 어머니가 틈틈이 농사지은 고구마, 고추, 배추, 무, 상추, 밤이 바리바리 들어찼다. 김치도 큰 그릇에 가득 담겨 조수석을 차지했다. 원래 배추만 갖다가 집에서 김치를 담가먹지만, 물이 달라서 그런지 어려서 먹던 입맛이 느껴지질 않아 숫제 시골집에서 완성품을 갖다먹는다.

나뿐이 아니라 우리 5형제가 다 이 짓이니 어머니는 허리가 휠 지경이다. 장(醬) 맛 다른 것도 문제고, 흔한 겉절이조차 물이 달라지면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대전이며 천안에 나가 있는 형제들은 기본 식단 정도는 시골집을 들락거리며 얻어다 먹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전보다 더 자주 가보자는 큰형의 지시에 따라 나 말고 다른 형제들은 일 삼아 자주 다니는 모양이다.

내 컴퓨터 앞에 사진으로 늘 계신, 저승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는 또 얼마나 집을 그리워하실까. 군대 4년을 빼놓고는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 한 자리에 나무처럼 붙박혀 사신 분이다. 사진 배경으로 나온 동네 뒷산을 보니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다 눈에 익고, 하늘빛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잊지 않는 것은 적어도 내 딸의 고향은 이곳 용인이라는 점이다. 네 뿌리는 청양이다, 그렇게 가르치면서도 이곳의 들과 개울에 익숙해 있는 딸의 고향을 생각해서라도 늘 가슴에 담아보려고 애쓴다.

 
- 돌아가신 당숙이 글에서는 아직 살아계신 걸 보니 2001년 가을에 쓴 글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