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12 (화) 17:06
☞ 직업에 귀천(貴賤)은 있더라
얼마 전 나는 어른 몇 분을 모시고 제주행 비행기에 탔다. 우리는 우리대로 스케줄을 놓고 왁자지껄 재미있게 토론하면서 기분 좋게 제주 공항에 내렸다. 승합차 한 대를 예약해 놓았는데, 이 친구는 우리를 발견하자 마자 점심 시간이니 식당으로 가자고 낡고 더러운 차를 붕붕거리며 매연을 뿜어댔다.
우리는 이미 서귀포의 한 식당을 정해 놓아, 그 시각쯤이면 음식이 자글자글 끓고 있을 무렵이었다. 서둘러 예약된 식당으로 가자고 말했더니 이 친구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서 올라타라고만 했다. 우리는 갈 곳도 그때그때 정하면서 쉬엄쉬엄 지낼란다고 다시 말했지만 이 어린놈은 투덜투덜 혼자 중얼거리면서 산길을 일부러 거칠게 몰아갔다.
나중에 현지에 사는 분의 설명으로 안 일이지만 이 안내원들은 식당이나 가게에 손님을 데리고 다니면서 돈을 쓰게 하고, 쓴만큼 우려낸다는 거였다. 사실 이 친구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단 한푼도 우려낼 가치가 없는 팀이었다. 이틀 묵을 동안 식당도 다 정해 놓고, 구경이라고는 식물원 한 군데밖에 정해 놓지도 않고 나머지는 제주도에 사는 분의 집에서 차 마시면서 웃고 떠들려고 작정을 한 터였다. 그러니 이 친구가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건지, 이튿날 아침 시간에도 삼십 분이나 늦게 나타나 오히려 큰소릴 치고 투덜거렸다. 이 친구는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우리가 밖으로 나오기만 기다렸다고 우겨댔다. 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그 어느 나라에 가서도 내가 고용한 운전기사를 찾으러 드넓은 호텔 주차장을 찾아 헤매 본 적이 없다.
나이 든 어른들을 모시고 이런 일을 겪을 때는 참말로 황당하다. 기분 같아서는 주먹다짐이라도 해서 시비를 가리고 싶지만, 그러다 보면 재미있는 여행을 망칠까 봐 화를 무던히 억누르고 조심했다.
이 친구는 관광 안내원이라는 직업을 천하게 여기는 장본인이었다. 그 친구야말로 그토록 천박하게 여기는 직업을 왜 하고 있는지 참 안됐다. 단지 돈 때문이라면 그 친구처럼 애처롭고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시골에 사는 내가 모처럼 딸에게 영화를 보여주러 강남의 한 극장에 갔다가 씻지 못할 더러운 추억을 안고 돌아왔다. 토요일 오후라서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영화 입장권을 보여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수위들이 문을 막았다. 그래서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차에 탄 채 어떻게 표를 사느냐, 차 세운 다음에 내려가서 사 가지고 나올 때 보여주면 되잖느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아니면 돈이라도 내면 될 게 아니냐고 했지만 돈도 필요없다고 했다. 물론 나는 절벽같은 그네들의 말투에서 이들이 틀림없이 공무원 흉내를 내는 자들이려니 짐작했다. 아니나다를까 그들은 공무원도 아니면서 공무원 비슷한 기관에 붙어먹는 수위들이었다.
결국 차를 도로 빼어 아슬아슬하게 차를 세워놓고 표를 구한 다음 다시 올라가 주차장에 들어갔다.
문제는 또 영화가 끝난 다음이었다. 다시 표를 보여달라기에 반쪽난 표를 보여 주었더니 극장에 가서 도장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노인들의 무례를 따졌다. 영화 안보고 영화표 샀겠느냐고 따져도 소용이 없었다. 표를 받아두거나 들어갈 때 확인했으면 그만이지 웬 도장이냐고 해도, 규정이니 따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는 수없이 극장에 도로 들어가 도장을 받아다가 늙은 수위들에게 그 값을 단단히 갚아주었다. 난 이런 경우 거의 참지를 못하는데, 아마 좀 날뛰었을 것이다. 결국 애비는 있느냐, 있다, 그럼 네 애비한테도 그렇게 대드냐, 우리 아버지는 당신네들처럼 일 안하면서 빌어먹듯이 살진 않는다, 젊은 놈이 건방지다, 당신이 젊었을 때는 더 건방졌을 것이다 등등 온갖 소리가 난무했다.
난 해외에서 십여 년 전에 만난 한 여행 안내원이 너무도 고마워서, 지금도 책이 나오면 얼른 부쳐 드리고, 때때로 철이 되면 내가 먼저 인사를 올리는 분도 있다. 그분 때문에 열 번을 가도 얻지 못할 정보를 그야말로 단 한 번에 송두리째 구할 수 있었고, 마음 편하게 기분 좋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분은 정말로 프로였다. 역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분답게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도 하고, 책도 썼다. 그렇게 훌륭한 전문가였지만, 그분은 단 한 차례도 예외 없이 철저하게 관광 안내원 일을 했다.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고, 우리보다 늦게 잤다. 식당에 먼저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고 메뉴를 확인하고, 차에 오를 때에도 맨 마지막으로 오르고, 내릴 때는 맨 먼저 내렸다. 이렇게 자기 직업에 충실한 분을 보면 눈물이 울컥 치밀 정도로 감동스럽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미담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기업이나 관청에 드나들다 보면 까다롭고 무서운 수위를 만나기 일쑤다. 얼마나 드세게 대드는지 그 건물에서 일하는 직원들조차 일정 직급 이하인 사람들은 언제나 쩔쩔 맨다. 어떤 사람은 인사를 차릴 만한 인물이 다 퇴근하고 난 다음에는 두 다리를 쭉 뻗어 창틀에 얹어 놓고 텔레비전을 보는 경우도 있다. 부장, 과장, 대리쯤이야 하고.
직업이란 그 직업의 본래 면목에 충실할 때 귀해지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제발 자기 자신을 천박하게 대하지 말기를...
- 제주도 여행이란 걸 보니 1996년 봄에 쓴 것같다. 그때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청사홍사'가 끝나 문화부 서희건 부국장하고 담당했던 신형준 기자, 삽화를 그려주신 이왈종 화백까지 부부 동반으로 뒤풀이 여행을 했다. 서희건 부국장은 그뒤 몇년 안되어 세상을 떠나시고(서희건 부국장이 그때 제주에서 선물해주신 지갑을 작년까지 썼다), 신형준 기자는 지금도 학술 전문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이왈종 화백님이야 설명이 필요없을만큼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중이고.
밑에 나오는 극장은 강남에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주차장이 어떤 정부투자기관 소속이었는지 잘 생각이 안난다. 세월이 흐르면 나만 남는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들이 누군지보다 내가 뭘 했는지 내 얘기만 생각난다. 결국 다 떠나가고 남는 건 언제나 나 자신 뿐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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