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13 (금) 23:17
두 달 전 몸이 안좋아 입원했다가 내 인생도 다 가는구나 하는 자괴감을 느꼈다.
이런 일은 누구나 평생에 한번은 반드시 겪어야 하겠지만, 난 너무 빠른게 아닌지 당혹스러웠다.
작년 초, 앞집 유치원생이 나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불러 한바탕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녀석 애비가 20대라서 내가 참고넘어갔다. 내가 시골친구들처럼 일찍 결혼했다면 나도 그런 나이의 손자를 둘 수 있을지도 모르고, 실제 내 초등학교 동창 중에는 손자를 본 경우도 있으니 나 자신을 탓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아이들 눈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리라 너그럽게 이해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좀 다르다. 유치원 교사들이 아버님, 아버님 하면서 부르고, 지금 내 딸이 다니는 중학교 교사들도 아버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간호사들이 아버님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경기가 이는 듯하다. 전에는 아무개 씨라고 불렸는데 올해부터 갑자기 아버님이 됐다. 작년에도 입원한 적이 있지만 그때까지도 아무개 씨였다.
뭐 여기까지도 참아줄 수는 있다. 입에 배서 하는 말이려니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작년하고 다른 놀랄 만한 사건이 있었다. 특실이라 혼자 누워 있는 병실에 들어온 간호사가 배실거리며 매우 친절하게 군다 싶더니, 이거 완전히 노인들 수발하는 자세로 돌변했다. 주사를 놓고는 애기 얼르듯이 내 가슴을 두드려주었다.
이게 웬일이야. 전같으면 쌀쌀맞게 들어왔다가 찬바람 일으키며 나가줘야 하는데, 행동도 느릿느릿 말도 또박또박 천천히 한다.
아, 저것이 날 남자로 보질 않는다 이 말이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대개 처녀들은 웬만한 사내를 보면 내외를 하는 법인데, 나이가 든 노인을 보면 경계심을 확 풀어버린다. 내가 이제 간호사들이 경계를 풀 나이가 됐다는 말인가 보다.
간호사가 나간 후 화장실로 가 한없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는 이팔청춘인데, 왜 간호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질 않을까. 참으로 통탄스럽다.
간호사, 너 큰 실수 한 거야. 이런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
퇴원 후 일상으로 돌아오니 이미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다. 서로 나이 들어가니 아무 감흥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딸을 붙잡고 "아빠 늙었니?" 하고 묻지만, 젖먹이 때부터 보아온 얼굴이라 비교를 하지 못한다. 대답은 "몰라."다.
어쨌거나 낯선 곳은 웬만하면 가지 말아야겠다. 애들 노는 데 기웃거리지 말고.
또 애 데리고 놀러오겠다는 사람 있으면 사양해야겠다. 애들하고는 눈 안마주치는 게 최고다. 이 어린 악동들은 거짓말을 못한다.
이 얼굴 들고다니는 한 언제 어디서 폭탄을 맞을지 모른다.
내가 아는 어느 분은 마흔다섯 살 때부터 할머니임을 인정하고 살았다 한다. 병원에 갔다가 꼬마 계집애가 이 분을 보고 느닷없이 울길래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애 엄마가 말하기를 "우리 애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 울어요." 이러더란다. 충격이 너무 커서 이 분은 며칠을 두고 고민하다가 "그래, 난 오늘부터 할머니다!" 이렇게 선언하고 사셨단다.
하지만 난 아니다. 아직 인정할 수 없다. 내 조카의 아들놈이 할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꿀밤을 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아직은 어린 중3 딸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때는 어쩌면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접수할는지 모르겠다. 결단코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어린 것들하고 마주치지 말고 살아야겠다. 어디 나이든 간호사 많은 병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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