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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아버님전상서의 계절

2008/04/14 (월) 13:23

 

내 세대만 해도 아버님전상서라는 어휘를 들으면 뭔가 짠하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우리 형제 다섯 중 세째인 나와 막내만 중학교에 입학하고, 그 힘으로 대학까지 마쳤지만 나머지 세 형제는 초등학교로 끝냈다.
큰형은 워낙 형편이 어려워 진학은 꿈도 못꿨고, 둘째형은 그해 농사가 흉년이 들어 진학하지 못했다. 만일 둘째형이 중학교에 갔더라면 해걸이마냥 내가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내 인생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둘째형은 못가고, 형하고 네 살 터울인 나는 독기를 품은 어머니의 간절한 희망에 따라, 또 고추농사가 풍년이 드는 바람에 무사히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두 살 어린 네째는 나 가르치는데 드는 비용을 몰아주기 위해 중학 진학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형을 위해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고 네째는 믿었다. 그런 덕분에 세 살 아래 막내는 또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이러다 보니 5형제중 셋이 초등학교만 마치고 논밭도 변변치 못한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어느 해 봄이던가, 큰형이 맨먼저 아버님전상서를 남겨 놓은 채 사라져버렸다. 형은 그로부터 영영 외지로 떠돌다가 외지에서 장가들어 살림을 냈다. 지금도 어렵게 사는 형만 보면 내 가슴이 미어진다. 둘째형도 역시 머리가 있어 시골에서 산간밭이나 긁어대가지고는 미래가 없다고 보고, 역시 어느 해 봄 아버님전상서를 놓고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둘째형은 몇년 서울에서 구르다가 도로 내려와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서당 정규 과정에 입학해 한학을 마쳤다. 그러다가 나중 내가 대학갈 무렵 날 가르치기 위해 재상경했고, 그 길이 집에서 영영 나가는 길이 되고 말았다.  

 

네째는 성미가 온순해 꽤 오랫동안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대략 5-6년 버티다가 역시 어느 해 봄이던가 아버님전상서를 놓고 집을 나갔다. 아버님전상서란 대개 돈 벌어 오겠다, 불효를 용서해달라, 이런 내용이다. 하지만 네째는 영등포역에 내려 며칠 여관에 머물면서 취직 자리를 알아보다 겁을 집어먹고 도로 내려와버렸다. 그러다가 나중에 10년쯤 더 집에서 일하다가 다시 서울에 가 재단 기술을 배워 재단사로 일했다. 

 

오늘 날씨가 하도 좋아 임도를 산책하다가, 이 좋은 봄날에 갑자기 내일 돌아가신 아버님이 생각나고, 이어 아버님전상서가 생각났다.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고, 뭔가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마음으로 들뜨는데, 그 궁벽한 시골에 살던 우리 형제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땅도 없는 집에서 농사라고 짓고 있으니 그게 무슨 희망이며, 초등학교만 졸업했으니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우리집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내 사촌, 육촌, 동네 선배나 후배들 상당수가 죄다 아버님전상서를 써놓고 서울로, 서울로 사라져버렸다. 우리 충청도가 대개 이러했고, 저 전라도 땅에서는 봄이 되면 아버님전상서를 쓰는 젊은 처녀 총각들이 부지기수라서, 호남선, 장항선이 붐빌 정도였다. 오죽하면 10만 명이나 되던 군들이 인구가 줄어 3만도 못채우는 곳이 그리 많으랴. 국회의원 하나 뽑는데 군 네 개가 모여야 겨우 되는 곳도 많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이 찬란한 봄, 꽃이 만발한 이 봄에 나는 아버님전상서가 먼저 생각나고, 춘궁기니 보릿고개니 하는 말이 먼저 생각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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