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이야기 | 2007/05/19 (토) 21:34
사람을 먼저 보라
전원주택을 짓고 산다고 하여 높은 담 둘러치고 가족만 오순도순 단란하게 지낼 수는 없다. 시골이라고 조용한 줄 알다간 큰코다친다. 이장이 찾아오고, 방위가 찾아오고, 파출소 순경이 찾아오고, 교회에서 찾아와 자꾸만 초인종을 눌러대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전원 생활을 꿈꾸는 분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무시한다. 아파트 생활에서는 몇 년이 가도록 옆집하고 인사를 하지 않은 채 지내는 일이 허다하다지만, 시골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혼자 고고하게 살고싶은 분이라면 사실상 전원은 꿈꾸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사람이 많이 북적거리는 도시가 혼자 숨어살기에 훨씬 더 좋다.
시골에서 살자면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깎듯이 인사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내게 인사를 하니까. 아이들은 한번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인사를 해온다. 그런 그 아이들의 이름도 잘 기억해두었다가 이따금 덕담도 해야 한다. 방학이라 좋겠네, 운동회 했니?
물론 그렇게까지 하면서야 힘이 들어 어디 살겠느냐고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냥 모른 체하면 될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런 분에게 들려줄 좋은 실화가 있다.
우리 이웃에 교사 한 명이 이사온 적이 있었다. 높은 언덕에 위풍당당하게 집을 짓고 동네를 내려다보며 살았다. 동네사람들과 마주쳐도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자동차로 쏜살같이 지나가곤 했다. 나한테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촌티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다는 듯 그 교사는 늘 그런 식으로 제 집을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학교까지 출퇴근하더니 나중에는 힘이 들었던지 서울로 훌쩍 가버렸다. 그러고는 주말마다 내려와 고상하게 커피 한 잔 들고나와 마당을 거닐다가 휭하니 올라갔다.
그러던 어느 날, 투기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여기 아무개란 사람이 실제로 사느냐는 질문에 영악한 노인들(시골 노인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서울 사람들은 잘 모른다.)은 다들 모른다고 고개를 내둘렀다.
이 교사는 즉시 투기자 명단에 오르고, 급기야 학교에서 파면당했다. 당연하지만 퇴직금이 덩달아 날아갔다. 이 교사는 그제야 울며불며 동네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마음에 없는 선물을 뿌려야 했다. 그러고는 실제 산다는 확인서를 가까스로 받아내 교육청인지 감사원인지 하는 곳에 청원을 냈다. 그런 끝에 가까스로 복직이 되었다.
공무원이나 정치인, 또는 명예가 중요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시골 사람들은 사실을 중요시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기분으로 진위를 가려주니까.
아무리 산자락에 멀리 떨어져 집을 지어도 거기 누군가의 논이 있고 밭이 있는 법이다. 사람하고 연관되지 않는 땅은 거의 없다. 만일 이웃에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전원주택을 짓겠다고 덤벼들면 집을 짓는 동안 십년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집을 짓기 시작하자마자 마을 입구에 ‘8톤 트럭 금지’라는 현수막이 떡 나붙거나 아니면 갖다 버려도 아깝지 않을 낡은 경운기 한 대가 길을 막고 서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갑자기 하수도 공사를 한다면서 길을 파헤쳐 놓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법규에 위반되는 일을 하면 시청에 민원전화가 빗발친다. 높은 공무원들은 몰라도 면사무소, 군청, 파출소 등에는 누구 아들, 누구 아우가 꼭 있다. 딱히 혐의가 없어도 일단 찌르고 본다.
조금만 엇나가면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과 사귀는 게 피곤할 수는 있다. 학력이나 문화적 소양, 경력, 재력, 직업 등 어느 한 가지 비슷한 게 없으니 무슨 대화를 나누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마음을 열고 들여다보면 사귈만한 거리는 충분하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끼리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차츰 사귀다 보면 농촌의 삶도 또다른 가치를 지닌 고귀한 삶이란 걸 느끼게 된다. 그러면 이웃들과 조금씩 정을 쌓게 된다.
어느 날 아침 신문과 우유를 가지러 대문에 나갔을 때 누가 갖다놓았는지 모를 상추, 배추, 파 같은 게 나란히 놓여 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누군지 자신을 밝히지도 않고, 더러 알게 되더라도 “버리기 아까워서.”하면서 씩 웃고만다. 이쯤되면 혼사나 상사에도 기꺼이 참가하게 된다.
그러니 처음 전원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정원에 나무를 심는 데 정신을 팔 것이 아니라 한 동네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 일에 열정을 쏟아야한다. 시골에서 사귄 내 친구 하나는 저희집 나무를 캐다가 심어주기도 하고, 나 없는 집에 와서 웃자란 풀을 베어주기도 한다.
아직 택지를 고르지 않은 사람이라면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그곳 지세보다는 인심을 살펴야 할 것이다. 마을회관에라도 찾아가 함께 살고싶은 데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시시콜콜 정보를 줄 것이다. 먼저 이사와 잘 적응하지 못하는 서울 사람 욕도 할 것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이 사귈 만한 사람들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농촌 마을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사귈 수 있다. 문제는 빌라가 들어서기 시작하고, 뭔가 개발의 조짐이 보이는 마을이다. 이런 마을 사람들은 이른바 돈맛에 길들여져 인심이 매우 사납다. 그런 마을일수록 이장이나 농민후계자를 만나보면 대략 인심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다. 또한 옆집에 사는 사람을 찾아가 과연 이웃으로 살만한지 반드시 살펴야 한다. 이웃이 좋으면 사실상 나머지 문제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도 좋다.
- 내 아이를 자연에서 키우고 싶어 시골생활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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