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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전원 이야기

고독을 사귀는 법

전원 이야기 | 2007/05/19 (토) 21:35

 

고독(孤獨)을 사귀는 법


전원주택에 살자면 예상치 않은 어려움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힘든 게 고독이 아닌가 싶다. 고독이란 어원을 보면 어려서 부모가 없는 게 고(孤)이고, 늙어서 자식이 없는 게 독(獨)이다. 그래서 고독하다는 건 함께 있어줄 가까운 이웃이 없다는 뜻이다.

전원주택에 살자면 고독해진다는 건 무슨 뜻인가.


가족이 모두 함께 산다고 해도 이웃과 단절되고, 지역사회와 단절되면 저절로 고독해진다. 나 역시 내가 용인이라는 낯선 땅에 내려와 산 지 어느덧 13년째지만 나 스스로 내가 용인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내가 여기 내려와 사귄 용인사람들 역시 날 용인사람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늘 거리가 있고, 따로 노는 듯이 겉도는 경우도 많다. 선거철이 되어도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고, 어쩌다 그들 후보가 우리집 대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


가까운 곳에서 수원 갈비아가씨나 용인 돼지아가씨(지금은 없어졌지만)를 뽑는다고 하면 웃음만 나오고, 무슨무슨 지역 축제를 한다고 해도 하나도 흥이 안나고, 고속도로니 경전철이니 하는 노선이 지나가네마네 눈에 불을 켜고 사람들이 흥분해도 난 영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런 중에도 어려서 잠깐 산 적밖에 없는 고향땅에 무슨 기업이 공장을 짓느니, 그 지역구 의원이 뭘 어쨌느니 하면 귀가 솔깃해진다. 투표권도 없으면서 말이다.


생활 리듬도 그렇다. 글을 쓰다보면 한밤중에도 마당에 나가, 혹은 길에 나가 걸어보기도 하는데, 그럴라치면 밤을 지키는 개나 짖어댈 뿐 어느 한 집 불이 켜져 있는 곳이 없다. 적막하다. 쓸쓸하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잔치를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한다. 그들은 날 부르며 한 잔 하자고 하지만 삶의 코드가 다르니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인사치레로 다가가 억지로 막걸리 한 잔을 받아마실 뿐이다.

또 우리 가족이 놀러나가는 길에 밭마다 논마다 일을 하던 동네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묻는다. 어디가? 그러면 당당하게 놀러간다고도 못하고 일보러 가요, 이렇게 말한다. 그네들의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보고는 차마 놀러간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러니 우리 가족끼리 아무리 똘똘 뭉쳐도 맨날 보는 얼굴이란 또 하나의 고독의 시작일 뿐이다. 하루 종일 같은 얼굴만 마주 대하면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니까.


이쯤 되면 넓고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우리집만 둥둥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그러면 도로 서울로 돌아가고 싶고, 사람 많은 도심으로 숨어버리고 싶어진다. 어쩌다 서울에 나가 그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며 시끌벅적한 뒷골목을 걷다보면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진다. 여기가 내 고향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이런 과정 끝에 고독과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고독을 이기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빨리 현실속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빨리 전원을 사귀는 것이다. 제 손으로 나무를 심고, 화초를 가꾸어야 한다. 나무들도 한 그루 한 그루 이사와 마당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 강아지들도 낯선 이 집에 들어와 얼굴을 익히고, 나중에는 집주인 노릇까지 하면서 이웃들을 감시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고독이 밀려간다. 높다란 배나무 가지에 올라가 홀로 잎을 갉아먹는 달팽이를 보면서, 수돗가에 위태롭게 지어놓은 개미굴에서 무려 십수 미터나 떨어진 장미넝쿨에 올라가 먹이를 구하는 일개미를 보면서 조금씩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하거나 아니면 익숙해져 가야 한다. 깜깜한 땅속에 숨어 혼자사는 지렁이는 또 얼마나 고독한가. 그러니 그놈들하고 사귀어야만 한다.


자연과 사귀다보면 하루 일과가 매우 바빠지고, 고독이 감히 침노할 겨를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 잔디밭에 물을 주고, 강아지들 사료를 내주고 한번씩 배를 쓸어주고, 새벽부터 날아드는 벌나비를 보고 웃음 한번 짓고, 아침거리로 상추잎을 뜯어 손에 들고, 탕탕탕탕 하면서 지나가는 경운기가 뉘집 경운긴가 담 너머로 기웃거리고, 체조하면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상큼한 아침 공기를 흠뻑 들이마신다.


그렇게 일과를 잡자면 하루가 빠듯하다. 일출이나 일몰도 꼭 보아야 한다. 황혼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정리하는 것도 고독을 이기는 큰 힘이 된다. 서울에 사는 친구하고 전화할 때는 비록 방에서 수화기를 잡고 있더라도 얼른 창문을 열어 바깥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저기 보이는 더덕덩굴이 끙끙거리며 나뭇가지를 타고오르는 것이며, 민들레가 노란 꽃을 내밀고 방글방글 웃는 것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담장에 앉아 깍깍거리는 까치의 사연에도 귀를 기울이며 아무개의 얘기를 듣고, 아무개의 고민을 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 감정을 듬뿍 담아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 전염시켜야 한다.


이따금 토끼풀꽃을 모아다가 아이들 꽃반지도 만들어주고, 담장밑에 난 씀바귀나 더덕순을 뜯어다 고추장에 찍어먹으며 전원을 즐겨야 한다. 근거없이 이건 간에 좋고, 이건 피부에 좋고 너스레를 떨면서. 모란꽃, 난초 따위를 보면서 언제 피고 언제 지는지, 언제 빛깔이 가장 고운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딸기에 맺힌 열매가 언제나 익을까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보고 익을 때까지 눈길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고독이 물러간다. 안그러고 집만 덩그마니 전원에 앉아 있다고 해서 전원생활을 할 수는 없다. 사람 친구만 사귀려 해서도 안된다. 무엇이든 친구가 돼야만 고독을 이길 수 있고, 고독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전원에 사는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그 고독을 극복하고 재미있게 사는 친구들, 낙오한 개미, 개가 마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벌,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리는 나비, 파헤쳐진 흙에서 나와 깜짝 놀라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지렁이, 매미가 될 굼벵이, 병든 꽃나무와 썩은 과실 나무, 웃자란 채소들, 키큰 잡초들이 씩씩하게 즐겁게 사는 걸 보고 우리네도 씩씩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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