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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애닯다, 감나무야

동생 둘과 함께 고향 산에 올랐다.

전에 산전이라고 부르며 곡식 심어 먹던 밭이, 인적이 끊기다 보니 정글이 돼버렸다.

여기는 고구마 심던 밭, 여기는 깨 심던 밭, 여기는 콩 심던 밭, 다 알아본다.

내가 어머니 따라와 일할 때 대여섯 살난 우리 막내는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따라와 재롱부리고, 그러면 어머니는 찔레순이나 복분자나 복사나 싱아 같은 걸 구해다 먹이곤 하던 곳이다.

"옛날에는 이 골짜기에 집도 있어서 밤이면 아버지가 투전하러 왔었대."

아버지가 화투치러 다녔다는 집터를 보니 아직 석축이 남아 있다.

 

 

 

 

- 어머니, 아버지 밭에서 일하실 때 우리 형제들이 가재 잡으며 놀던 곳이다. 이 계곡물, 지금은 우리 어머니가 만드는 <약선장>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아마도 조선시대 농법으로 농사를 지은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다.

비료 대신 퇴비를 쓰고, 트랙터나 경운기 대신 소를 쓰고, 농기구라고는 삽, 괭이, 낫, 지게 등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우리가 둘러본 소지곡 산전은 아버지나 형이 두엄을 바지게에 져다 나르며 농사를 지었다. 봄비 내리는 날이면 고구마 순을 꺾어가지고 달려가 얼른 꽂곤 했다. 요즘 누구나 덮는 비닐도 없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니 땔나무하러 다니던 곳, 꼴 베던 곳이 다 눈에 선하다.

 

소지곡을 넘어 새앙골로 넘어 내려오는데, 동생들이 그곳에 있던 감나무를 찾아보잔다. 작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며 꼭 보자고 한다. 나 열 살 때, 내 동생들이 그보다 못한 나이였을 때 바람이 부는 여름날 저녁이면 "일찍 자자. 내일 아침에 홍시 주우러 나가야지." 이러면서 잠들었다가, 새벽같이 일어나 이 집 저 집 감나무를 찾아다니며 떨어진 홍시를 주웠다. 떨어진 홍시를 줍는 게 우리 형제만 있는 게 아니라 재빨리 돌아다녀야 했다.

 

그때 맨마지막으로 들른 데가 새앙골 감나무였다. 이 나무는 아버지가 심은 거라서 남의 산(국유지)에서 자라기는 하지만 우리 소유였다. 아마도 자생 고욤나무에 아버지가 접을 붙인 것이리라. 어쨌든 이 감나무만은 확실한 우리 나무이기 때문에 맨나중에 가보곤 했다.

풀숲 사이로 진홍색 홍시가 떨어져 있으면 기어이 파고들어가 줍곤 했다.

그렇게 해서 식전에 가족들이 모여 홍시부터 먹었다. 그래야 밥을 한 술이라도 덜 먹기 때문에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홍시를 자주 먹였다. 홍시 많이 먹거나 고구마 많이 먹으면 똥이 노랗게 나오곤 했다.

 

그러다가 내가 외지 고등학교로 나가면서 낙과를 더 줍지 못하고, 동생들도 잇따라 집을 나가면서 가을이나 돼야 형제들이 모여 익은 감을 한꺼번에  따오곤 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귤이나 바나나 같은 외국산 과일이 들어오고, 우리나라에서도 단감이 널리 퍼지면서 우려먹어야 하는 골감은 인기가 시들해졌다. 더구나 동네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가면서 인구가 줄자 새앙골 그 드넓던 밭에 잡목이 자라고, 나중에는 정글이 돼버렸다. 그러면서 가을철에 감 따는 일도 잊었다.

 

우리 형제들이 군것질 삼아 주워먹곤 하던 홍시를 해마다 공급해주던 이 나무를 오늘에야 찾아가 본 것이다.

"저깄다."

네째가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잡목을 쳐서 저 혼자 살게나 해주자."

네째는 우리 5형제 중 이 감나무 감을 가장 늦게까지 땄을 것이다. 제일 늦게까지 집에 머물렀으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 지금은 곶감 켜는 반시만 딴다. 골감은 눈이 내리도록 내버려두었다가 홍시나 돼야 따른 정도다. 우리 네째의 외동아들 동규가 홍시를 달라며 기다리고 있다. 동규만할 때 우리가 홍시 주우러 남의 감나무밭을 헤집고 다녔다.

 

나도 어린 시절 맛난 홍시를 먹게 해준 나무가 반가워 가까이 가보니 그만... 죽어 있었다. 혹시나 하여 가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죽은 게 틀림없었다.

잠시 슬펐다. 감나무가 자연사할만큼 훌쩍 지나간 세월 40여년, 우리 형제의 40년 역사도 저마다 죽은 느낌이었다. 40년을  빼면 나 열셋, 네째 열하나, 막내 여덟이니 그때가 한창 이 감나무 감을 딸 때다.

 

우리 집 뒤곁에는 죽나무라는 게 있어 여름철이면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을 따다 말려 기름에 볶아 먹곤 했다. 늘 따 먹던, 말려두었다 겨울에도 먹던 건데 지금은 죽나무가 없어 역시 아득한 기억으로 떨어져버렸다. 새끼가 두어 그루 있는데, 그걸 밭으로 옮겨 키울 생각을 못하고 있다.

 

산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니 완용이란 형이 생각났다.

그는 폐암 말기 환자로 지난 겨울 고향으로 내려와 고향집에 머물렀다. 설에도 만나 악수했다.

"완용 형 괜찮으냐?"

"지난 주에 장례 치렀어."

"그래? 나만 몰랐네?"

"둘째형, 큰형 다 왔었어. 둘째형하고 같은 말띠(57세)잖아."

"안됐구나. 그러고 보니 둘째형 마음이 안좋겠다. 나도 내 동갑 일수 죽을 때 참 기분 더럽던데..."

"둘째형 친구는 벌써 여럿 죽었잖아. 완용 형, 병선 형, 병호 형, 다 암이네."

"그래. 친구들이 죽을 때마다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거지. 아, 이렇게 되어가는구나. 어쩔 수 없구나. 그런 거지."

 

산꼭대기에 앉아 동생들하고 과일 나눠먹으면서 등 뒤에 있는 소나무에 기대보니 참 마음이 편했다. 눈을 감아보니 이게 행복인가 싶었다. 출세하고 성공해서 얻는 행복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한, 그냥 그대로 녹아들 것같은 여유 같은 것이다.

"법정 스님 참 안됐다. 무소유 책이 히트만 안됐어도 그이가 그렇게 살 이가 아닌데, 그놈의 무소유 때문에 거기 그만 갇혀버린 거야. 자동차를 살까 하다가도 무소유라 못하고, 주지 맡아볼까 하다가도 무소유라 못하고, 그런게 오죽 많겠어. 평생 무소유에 끌려다니다 죽을 때도 그만 무소유 보여주느라고 저렇게 관도 못쓰고, 수의도 못입었지. 오죽하면 책을 절판하라고 하셨을까."

그러면서 마음 가는대로 사는 것도 한 방편 아닌가, 저 멀리 하늘 바라보며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