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봄이 되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어머니가 절 28세에 낳으셨으니까 제가 열 살이면 어머닌 38세신 거지요.
아마 그 무렵일 거에요.
오늘 제가 가입한 카페에서 갖가지 약초를 들여다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한번 적어보는 거랍니다.
한겨울에 군것질 거리가 없을 때 어머니가 항아리에 담근 고욤을 내놓으면 우리가 걸신들린 아이들마냥 숟가락들고 달려들어 마구 퍼먹었지요. 익은 고욤을 따서 항아리에 넣어두면 겨울철이면 죽같이 되잖아요. 거기에 흑설탕을 넣어먹으면 좋다는데, 그땐 설탕이 없어 그냥 삭혀서 먹었지요. 고욤이 그렇게 좋다는데, 요즘은 먹고싶어도 못먹네요.
어머니 이른 봄에 긴밭골 둑에서 무릇 캔 거 기억나시지요?
대표적인 구황식품이래요. 다른 지방에서도 먹을거리가 없을 때 무릇을 캐서 먹었대요.
우린 무릇을 캐다 불에 고아 먹었지요. 그냥 담가먹기도 한 것같아요. 새콤한 맛이 기억나요. 혈액순환에 좋고, 해독 작용을 하나봐요.
우리야 밥 대신 먹었지만요.
그거 다시 먹을 순 없겠지요?
우리 어머니 너무 늙으셔서 제가 졸라도 못해주시겠지요?
- 무릇에 꽃이 피었다. 꽃이 피기 전 잎이 약간 난 2월에
구근을 캐어다 재워야 먹을 수 있다.
창출 캐러 산에 다니던 거 기억나세요?
어머니하고 저하고 둘이 괭이들고, 바랑메고 산으로 다녔잖아요.
먹진 못하고 뿌리를 말려 팔았던 것같네요. 위장에 아주 좋다네요.
헛간 뒤에 돌무덤이 있었잖아요.
거기 돼지감자가 늘 나곤 했는데, 둘째형이 그걸 캐서 같이 먹은 기억이 나요.
봄에 캐먹었던 거같아요. 다른 데선 뚱딴지라고 해요.
이게 그렇게 좋다네요.
우린 먹을거리가 없어 먹었을 뿐인데 항산화효과도 크고, 암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는군요.
요즘같은 봄이면 어머니가 산에 가 나물 뜯어오실 때 꼭 앞치마 앞쪽에 찔레순을 꺾어 오셨잖아요. 어머니가 불룩한 앞치마를 안고 돌아오실 때면 우리 형제들이 와, 하며 달려가 앞치마 속에 손 넣어 어머니가 숨겨두신 찔레순, 싱아순을 꺼내먹었잖아요. 생각나시지요?
어머니가 산에서 뜯어온 나물보따리를 마루에 쏟아놓으시면 어찌나 풍성해보이던지 정말 늘 감격적이었어요. 그런 날이면 싱싱한 산나물 무침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잖아요. 밥 안먹고도 나물무침만 먹을 수도 있을만큼 넉넉했잖아요.
요즘도 봄에 산에 가면 싱아를 꺾어 맛을 봐요. 그때 맛같지는 않아요.
찔레는 여전히 좋아요. 찔레순을 설탕으로 효소만들어 먹으면 아이들 키 크는데 좋다네요. 우리 형제들이 먹은 거에 비하면 다들 키가 큰 편이잖아요.
혹시 어머니 나물 뜯으실 때마다 꺾어오신 찔레순 때문 아닐까요?
어머니가 앞치마를 풀어놓으면 거기서 고사리, 취나물, 싸리순, 고추나무순, 다래순, 맹가순이 가득했지요. 입맛이 확 도네요. 여든한 살 어머니에게 이런 거 해달라고 조를 수도 없고, 눈썰미가 없어 저희는 잘 못따니 생각만 간절하네요.
지금은 어머니 늙으셔서 구기자 농사를 못짓지만, 막내 대학다닐 때까지도 많이 기르셨지요. 아버지가 노란 구기자 뿌리 캐서 삶아주시던 거 생각나요. 어머니는 요즘 같은 봄이면 구기자 순을 따서 나물로 무쳐 주셨지요. 지금도 구기자순 나물이 생각나요. 이젠 먹을 수가 없네요. 맛본 지 참 오래 됐어요.
우리 형제들이 구기자 많이 먹어서 지금껏 다 건강한가봐요. 오형제가 다 건강하잖아요.
구기자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어떻게 심어봐야 하는데, 엄두가 안나네요.
- 구기자순, 구기자꽃, 구기자열매. 봄이면 구기자순을 나물로 무쳐먹고, 겨울에는 뿌리를 캐어 삶아먹었다.
약초 자료 보니까 둘째형이 캐거나 따다 판 게 많네요. 둘째형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부지런하지요. 우리가 화뿌리라고 부르던 게 이름이 뭔지 못찾겠네요. 형은 반하도 많이 캐서 말렸지요. 그때 저는 나이가 너무 어려 뿌리가 깊은 칡뿌리나 마는 잘 캐지 못했지요. 대신 둘째형이 많이 캐날랐던 것같아요. 둘째형 덕분에 칡뿌리나 마 같은 건 잘 먹었지요. 둘째형은 재주가 많아 이맘때면 다람쥐도 잡아오고, 새도 잡아왔지요. 다람쥐 먹인다고 사과 구해다가 즙을 내어 먹이던 게 기억나네요.
어머니, 이맘 때 노랗게 피는 동백 있잖아요. 표준말로는 생강나무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저 어렸을 때 머리에 바를 기름 짠다고 새앙골에 가서 동백 열매 따오라고 시킨 적이 있어요. 까만 열매를 얼마나 땄는지는 모르는데, 네째 데리고가서 어머니 머리에 바를 거라며 재미나게 따던 일이 생각나요.
- 생강나무꽃, 생강나무 열매 동백.
봄이 무르익으면 네째하고 막내 데리고 제가 주전자 들고 산에 가서 버찌를 따오곤 했지요. 버찌 먹다보면 혓바닥이 빨갛게 물드는데, 그러면 우리 형제들은 서로 혓바닥 내밀면서 웃곤 했어요.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드시라고 저희가 주전자 가득 따다 드린 거 기억나세요? 지금도 가로수로 서 있는 벚나무에 버찌가 열릴 때면 꼭 한두 알 따서 입에 넣어봐요. 그럼 그때 생각이 나요. 타임머신 탄 것처럼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해요.
요즘이면 어머니는 새 쑥을 뜯어다가 국도 끓여주시고, 떡을 만들어주기도 하셨지요. 쑥떡요. 가끔 인절미를 만들 때 쑥을 넣어주기도 하셨고요. 인절미만 보면 전 우리 가족이 새벽같이 일어나 몰래 해먹던 일이 생각나요. 그때 이웃에 살던 정자네는 저녁도 굶었다지요? 우리도 저녁을 고구마로 먹거나 죽으로 대신하던 시절이라 떡해 먹는 게 아주 특별했지요. 그래서 어머니는 주무시기 전에 찹쌀 두어 되를 물에 담가두고, 콩고물을 만들어 시원한 살강에 넣어두었다가,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가만히 밥을 짓고, 마당에 있는 절구에 넣고 찧었지요. 준비가 끝나면 어머니는 곤히 자는 저희들에게 다가와 "얘들아, 인절미 먹자." 이러셨지요. 그러면 우리 형제들은 군기 바짝 든 군인들처럼 벌떡 일어나 어머니 주위로 모여들었지요. 어머니가 인절미 떡을 썰어 고물 쟁반에 던지면 저희들이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굴려가며 김이 솔솔 나는 인절미를 먹곤 했지요.
어머니 먼저 드시라는 말도 할 줄 몰라 우리 형제들은 서로 먹기 바빴지요. 네째나 막내나 먹을거리가 부족해 남 먼저 먹으라는 예의를 배울 새가 없었잖아요. 전 지금도 마트에서 인절미를 보면 어머니가 새벽에 해주시던 게 생각이 나요. 우린 인절미를 꼭두새벽에 해먹곤 했으니까요. 인절미를 떠올려도 왜 아버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요? 아버지는 소 여물 쑤시면서 저희들에게 양보하시느라고 안들어오셨나요? 아버지가 인절미 잡숫는 장면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요.
- 어머니가 시집 와서 줄곧 쓰시던 화강암 돌절구.
여기에 찌은 찹쌀을 넣고 찧어다 인절미를 해먹었다.
지금은 수련을 심어 놓았다.
어머니 명예를 생각하면 이런 건 회고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래도 해보지요. 1월이나 2월쯤 되면 먹을거리가 다 떨어지잖아요. 남아 있는 고구마도 작은 것 뿐이라 실하지도 않지만, 어머니는 오후에는 꼭 고구마를 쪄서 싸리나 버드나무로 만든 소쿠리에 넣어 안방선반에 올려두셨지요.
저녁 서너 시쯤 어머니가 동치미를 건져오라고 시키면 그때 고구마를 먹는 거지요. 아버지나 형이 대문 앞 텃밭 한가운데에 땅을 파고 동치미 독을 묻었는데, 볏짚으로 막아놓은 숨구멍으로 손을 밀어넣어 덮개를 들춘 다음 가만가만 동치미를 건져오곤 했지요.
그러면 어머니가 동치미를 쭉쭉 찢어 저희 어린 것들이 먹기 좋게 동치미 국물이 담긴 사발에 담고, 그제야 고구마 소쿠리를 내려놓으셨어요.
제 기억에 저는 선반에 손이 닿아 어머니 몰래 내려먹은 적도 있는 것같아요.
그런데 네째나 막내는 손이 안닿아 어머니가 주셔야만 고구마를 먹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어머니, 우리가 맛있게 고구마와 동치미를 먹고 있을 때 누군가 대문으로 마실 오는 동네 분이 있으면 어머니는 얼른 소쿠리와 동치미 그릇을 선반으로 올려놓았잖아요. 이런 것까지 기억해서 정말 미안해요.
- 고구마줄기를 잘라 심은 밭. 나 어릴 때 약 1000평 가까이 심어 온 가족이 고구마 먹으며 겨울났다. 오른쪽은 고구마꽃. 백년에 한 번 핀다는 건 거짓말이고 자색고구마는 항상 피고, 밤고구마도 더러 핀다.
- 대를 이어 내 딸(오른쪽흰옷입은)이 고구마를 캔다.
그래놓고는 얼른 문 열어 손님을 맞으셨지요. 냄새 나가라고 미리 여셨던 것같아요. 그러면 우리 형제들은 입맛을 다시며 씁쓸하게 웃방으로 건너가 손님이 가기를 기다렸지요. 그때는 서로 다 그랬어요. 남의 집에 놀러가서 뭘 얻어 먹은 적이 없으니까요. 어렵던 시절이라 다 그러려니 했잖아요.
산넘어 살던 사촌형이 놀러와 며칠씩 눌러 있으면 어머니가 눈총을 주셨잖아요.
또 둘째형이 봉갑리 사촌형네 가 며칠 있으면 작은어머니한테서 눈총받았고요.
먹는 건 아니지만 바위옷(바위솔) 따러 다니던 생각도 나네요. 할머니 병환에 좋다고 해서 저하고 네째가 산에 올라가 바위옷을 벗겨왔잖아요. 그걸 말려 화로에 넣고 불태우면 연기가 나는데, 할머니가 그 연기를 쐬셨잖아요.
할머니 생각나니까 뒷골 할아버지 댁 소변 옹기에서 더깽이 벗겨왔던 것도 생각나네요. 그거 벗겨오라고 해서 소변 옹기에 긴 더깽이(치석처럼 달라붙는 물질)를 긁어 모아다 할머니께 드렸지요. 나중에 보니까 그게 정말 약이더라구요.
지금 같으면 병 축에도 안드는 건데 할머니는 끝내 그 병으로 돌아가셨지요. 할머니한테서 냄새난다고 다들 피할 때 전 할머니 곁에서 자곤했잖아요. 제가 지금도 냄새를 잘 못맡아요. 그러니 개를 열 마리나 길렀지요.
4월에는 비름나물, 풍년초나물, 냉이나물, 달래, 돋나물 뜯으러도 다니셨지요. 산에 나는 게 아니다보니 주로 밭가에서 캐거나 뜯으셨지요. 질경이국도 기억이 나네요. 어머니, 우리 식구는 한 해에 콩을 스무 가마나 먹었잖아요. 쌀농사가 없으니 주로 콩을 주식삼아 먹었지요. 어머니가 애들 싫어한다고 콩 적게 넣고 보리밥 지으면 아버지가 화를 내셨다지요. 보리쌀 빨리 떨어진다고요. 하긴, 아버지는 그때 점심 대신 된장국물을 한 대접 마시고 도로 밭으로 일하러 가신 적이 있다면서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지금도 된장국물을 좋아해요. 어떤 때는 물을 끓여 된장을 풀어먹기도 해요. 그럼 참 구수해요. 단식할 때 그렇게 먹는 걸 배웠는데 옛날 생각이 나더라구요. 어머니는 그냥 된장국물만 주기 미안해서 거기에 질경이나 배춧잎을 넣어 먹이려고 하셨다지요. 세상에, 배추가 다 자라기도 전에 그 잎을 따다, 마치 상추처럼 한 잎 한 잎 따다가 된장국물에 넣어 우리 먹이셨다면서요?
호박 나는 여름부터는 호박 넣어 끓여주시고요. 어쨌든 우린 된장국은 정말 많이 먹었어요. 어머니가 만드는 약선장, 정말 우리 형제들 입맛에는 딱이지요.
- 시골집 장독대. 큰 독이 약 150개 정도 있다.
어머니, 봄에 죽순 따 먹던 생각나세요? 우린 그걸 김부스러기처럼 먹었지요. 어머니가 들기름으로 맛있게 볶아주셨잖아요. 헛간 옆에 키가 큰 죽나무가 있었지요. 아버지하고 형들이 그 잎을 따 말리던 게 생각나요. 지금 뒤곁에 새끼나무가 자라잖아요. 지난 주 일요일에 네째하고 소나무밭에 죽순 씨앗 백여 개를 심었어요. 싹이 날런지 모르겠어요. 손자 동규가 다니던 유치원에서 받아온 씨래요. 우리 식구들이 먹던 죽나무 씨앗이면 좋겠는데, 지금은 큰나무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요. 네째도 그때 먹던 죽순이 그리운가봐요.
- 봄철이면 죽나무 잎을 따서 말린 다음 무쳐 먹거나 볶아 먹었다.
이 정도면 봄 얘기는 다 한 것같네요, 어머니.
우리 자식들 봄이 이렇게 바빴으니 어머니 봄은 얼마나 바빴겠어요.
잿간 앞에서 짚으로 유기그릇 내놓고 닦는 일이며, 감자싹 내는 일, 고구마싹 내는 일, 참 바쁘셨잖아요.
저, 어머니가 5월초던가 청보리 이삭 끊어 앞치마에 담는 걸 보았어요.
보릿고개가 뭔지 그때 이후 똑똑히 알게 됐지요.
그 귀한 밭에 지금은 은행나무 심고, 꾸지뽕나무 심으니 할아버지가 아시면 화내실지 모르겠어요. 지난 주에는 그밭에 감초 30포기 산수유 20그루를 심었어요. 할아버지는 이런 세상을 이해 못하실걸요. 지금이라도 여쭈면 "콩 심어라! " 이러실 걸요?
- 오른쪽 사진이 보리를 심던 밭. 지금은 꾸지뽕, 호두나무 등을 심어 기르고 있다.
초등학교 다녀오는데 어머니가 이 밭에서 덜 익은 보리이삭을 베어 앞치마에 담는 걸 보았다.
나를 보고 "학교 다녀 오니?" 하면서 씩 웃으셨다. 어머니가 30대 중후반이실 때다.
그게 보릿고개 때 먹는 청보리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봄 이야기 다 했으니 여름 되면 여름 이야기 한번 해보지요.
- 우리 어머니. 80세 때 여름 부여 무량사 대웅전 앞에서 내가 찍은 사진.
큰며느리가 사준 목걸이 자랑하시려고 막내며느리가 사준 옷깃을 일부러 제치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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