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 서산대사 청허휴정의 애끊는 모정
선교 판사라는 불가 최고위직에 머물던 휴정은 마흔 살 무렵 홀연히 인수를 내려놓고는 운수에 나섰다.
발길은 저절로 고향으로 향했다.
열 살에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잃고 떠나온 정든 옛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군수의 손에 이끌려 휴정마저 집을 나왔기 때문에 옛 집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휴정은 잡초만 무성한 허물어진 빈 집에 들어갔다. 지붕이 뜯겨지고 서까래가 꺾이어 별은 숭숭 보이지만, 그래도 유년의 추억이 담긴 집이다 보니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재롱을 피우던 자리에 앉아 쉬었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웬 중이 바랑을 지고는 폐가에 들어가 앉아 있다는 소문이 그새 퍼진 것이다.
이윽고 노인들도 나타났다.
한 노인이 묻는다.
“뉘시길래 빈 집에 들어가 앉아 있소?”
노인의 얼굴을 보니 기억이 없다.
“저는 이 집에 살던 운학(雲鶴)이라고 합니다.”
“네가 그럼 열 살 때 어머니, 아버지 잃고 서울간 그 운학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에이구, 불쌍한 것. 나는 네 이웃에 살면서 너 걸음마하는 걸 지켜본 사람이다. 부모 잃고, 형들도, 누이도 잃은 너를 차마 불쌍해서 보지 못했는데, 군수 따라 서울 가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웬일로 중이 되었는고?”
“팔자인가 합니다.”
“그래, 그 이름이 문제다. 운학이라고 지었으니 구름 따라 흘러다니는 학이 된 거지. 참으로 무상하구나.”
노인은 홀로 흐느끼며 눈물지었다.
휴정도 따라 눈물을 흘렸다.
돌이킬 수 없는 옛일이지만 휴정도 한때는 이 집에서 형과 누이, 어머니, 아버지와 행복하게 살던 시절이 있었다. 꿈만 같다. 도시 꿈만 같아서 세상사 모든 게 다 꿈으로 보인다.
“운학아, 기왕 쉴 거 우리 집에 가 편히 쉬자꾸나.”
“고맙습니다만 저는 여기가 좋습니다. 다시 올 것도 아닌데 하룻밤 머물면서 옛정을 떠올리고자 합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하나둘 물러갔다.
휴정은 이 마음을 시로 옮겼다.
- 내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열 살에 고향을 떠났네
옛 집 찾아보니
그 옛날 아랫마을 윗마을은
쓸어버린 듯 밭이 되고
뽕나무와 보리만이 푸르러
봄바람에 흔들리네
내 이 슬픔 못 이기어
낡은 집 벽에다 회포를 적어두고
하룻밤 지샌 뒤에 산으로 돌아왔네
떠난 지 30년
고향이라 돌아오니
사람은 가고 집은 헐려
마을은 폐허가 되었어라
푸른 산은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저무는데
귀촉도 한 소리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네
계집아이들은 들창으로 엿보고
백발의 노인이 이름을 묻네
젖먹이 적 아호를 대니
서로 눈물만 흘리네
푸른 하늘은 바다같고 달은 삼경이네
선교양종판사를 지낸 대선사라 해도 부모를 잊을 수는 없는가 보다.
그가 직접 쓴 자신의 이력(청허당집 제2권 ‘완산노부윤에게 올리는 글’에 상세히 나옴)을 보면 휴정의 가문은 한미했던 듯하다. 외할아버지 김우(金禹)는 연산왕 시절 현윤(縣尹)을 지냈는데, 안주로 유배를 가 영영 거기 산 모양이다. 친할아버지 기록은 없고, 완산 최씨인 아버지 최세창(崔世昌)은 벼슬없이 시와 술로 일생을 마친 듯하다. 그의 어머니는 늘 술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한 기억밖에 없다고 적었다.
휴정은 1520년 음력 3월 20일, 양력 4월 17일에 쉰동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1474년 갑오년생으로 이때 50세였다. 그의 어머니는 한 노파가 “걱정 마시라. 사내대장부를 낳게 해줄 것이다.”하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정말로 생각지도 않은 아들을 낳은 것이다.
휴정의 아버지는 50에 아들을 낳아준 부인에게 “늙은 조개가 드디어 진주를 품었으니 하늘이 준 것이다,” 하며 좋아하였다고 한다.
휴정이 태어날 때 위로 두 형이 있고, 누이가 하나 있었다.
휴정이 세 살 때, 그의 아버지 최세창이 꿈을 꾸었는데 한 스님이 찾아와 범어로 주문을 외우더니 이름을 운학(雲鶴)이라고 지을 것이며, 아이의 일생은 이름 그대로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휴정을 운학아 하고 부르기도 하고, 가끔 애기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휴정 자신도 그 말에 귀를 기울였는지 모래탑 쌓기를 좋아하고, 기왓장으로 절을 짓는 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그러나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그만 어머니를 잃고, 열 살에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쉰둥이로 태어나다보니 어머니는 나이 쉰아홉, 아버지는 예순에 죽었지만 아이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두 형과 누이 하나가 남았지만 이 형들과 누이마저 차례로 죽었다.
천애고아가 된 휴정은 군수 이사증(李思曾)의 눈에 들어 그의 양자가 되었다. 이사증은 어린 휴정에게 운(韻)을 주어 시를 짓는 시험을 본 뒤 양자로 삼았다.
이사증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전출되자 휴정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로 따라가 성균관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성균관에 들어갈 때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그 3년 사이에 어머니, 아버지, 형 둘, 누이 한 명까지 한꺼번에 잃은 것이다.
졸지에 부모형제를 잃은 외로움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어 사무치는 외로움은 스스로 달래야 했다. 그래서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노는 데 정신을 팔았다.
과거를 보았으나 우울한 마음이 큰 나머지 벼슬에 대한 의지조차 없었던 듯하다. 그러던 중 마침 스승이 호남으로 발령받아 떠날 때 휴정은 제자들 몇몇과 함께 거기까지 따라갔다. 그런데 이 스승은 몇 달만에 낙직되어 서울로 돌아가버렸다.
이때 휴정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벗들과 함께 지리산에 놀러갔는데 여기서 아예 출가를 해버리고 말았다. 스물한 살 때이니 열 살 이후 고아로 떠돌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때 읊은 시에도 고향이 나온다.
- 창밖 두견새 울음소리 듣자니
눈 가득한 봄산 모두 내 고향일레.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은 휴정은 열심히 경전을 익히고 참선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서른 살이 될 무렵, 연산왕 때 폐지되었던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과가 부활되자 1차로 응시하여 중선과에 합격하고, 이어 대선 장원을 거쳐 선교양종 판사가 되었다. 대선에 합격하면 문무과 대과에 합격한 것과 같은 지위를 얻던 시절이다. 선교양종판사는 국가가 인정하는 최고위직 벼슬이다.
휴정은 승려로서 선교양종판사를 6, 7년이나 지내며 우러름을 받았지만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뒤 늘 품어온 인생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놓지 않았다.
- 어미 잃은 까마귀 새끼
까옥까옥 처절하구나.
사람이다 까마귀다 어찌 논하랴.
오늘 내 마음을 휘젓는구나.
- 어머니 한번 가신 후
흘러흘러 세월이 깊었구나.
늙은 자식 아비 얼굴 닮아서
연못 바라보다 깜짝 놀라네.
여기까지 내용은 ‘완산부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휴정 자신의 ‘꿈같은 인생’에 관해 진술한 것이다. 이 글 말미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 그러하오나 사람을 대해서 그 시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은 아버지에 대해서 부끄럽기 때문이며, 욕을 당하여 성내는 빛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을 수 없던 것은 어머니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효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행(行)이 사람의 자식으로 가장 어렵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알았습니다. 아, 이 한 붓으로 지난 자취를 늘어놓는 것도 하나의 꿈입니다.
그뒤 완산부윤이 ‘꿈같은 세상(몽세)이 무슨 뜻인지 자세히 알려달라’는 물음에 또 답을 하면서 한번 더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 소자의 아버지는 한 꿈에 어떤 늙은이로부터 운학(雲鶴)을 얻고, 어머니는 한 꿈에 노파로부터 대장부를 얻고, 소자가 일생 동안 구름처럼 노니는 것도 또한 부모의 한 꿈이었습니다. 나타난 바는 그처럼 광대하나 베갯머리를 떠나지 못하였고, 변한 것은 잠깐이지만 이미 백년이 되었으니 꿈인가 허깨비인가 경각과 영원이 거침없이 통하고, 진실인가 허망인가 같음과 다름이 걸리지 않습니다.
휴정은 그의 나이 57세되던 1576년 음력 1월 13일, 양력 2월 22일에 제사하는 글을 지으면서 한번 더 부모를 추모했다.
- 병자년 정월 13일, 집을 나온 소자, 묘향산 심원동 상남대에 병들어 누워 향과 폐백을 갖추고 사람을 보내 부모님의 쌍무덤 밑에 삼가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니 구천(九天)은 높고 구원(九原)은 아득한데,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우리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누구에게 부모가 없을까마는 우리 부모의 은혜는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르며, 누구에게 생사가 없을까마는 우리 부모의 죽음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지난 일을 생각하오면 사람들은 그 인자함을 칭송하면서도 그 유한(幽閑)한 인자함은 알지 못하고, 엄격함은 알면서도 도덕의 엄격함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인자함은 후손들을 어루만지기에 넉넉하고, 그 엄격함은 선열(先烈)을 잇기에 넉넉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세 자식이 머리를 땋고, 소자가 이를 갈던 해에, 인자한 어머니는 난새를 타고, 엄격한 아버지는 기마를 타고 떠나셨나이까. 바람은 옛나무에 슬프고 달은 빈 문을 조상하였나이다. 소자가 뜰에서 절한들 누가 시를 가르치고, 문앞에서 절한들 누가 짜던 베를 끊겠습니까.
아버지를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지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피로 변합니다. 천하와 인간 세상의 그 어떤 슬픔이 이보다 더 하겠나이까. 아아, 슬프고 애달파라.
소자는 외로운 그림자를 쓸쓸히 나부끼면서 이름을 관학에 두었다가, 학문을 그만두고 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은 뒤에 선교(禪敎)의 큰일을 맡고, 금궐(金闕)에 두 번 조회하였더니 세월은 흘러 어느새 백발이 성성합니다.
두 형이 이내 죽고, 누이마저 갔으니 하늘을 불렀으나 하늘은 높아 부르짖을 길이 없고, 땅을 두드렸으나 땅은 두터워 호소할 길이 없었나이다.
오늘에 이르러 은애(恩愛)를 끊는 것이 부처님의 법이라 하지만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구름이 슬프고, 바람소리가 슬픕니다. 아아, 슬프고 애달파라.
생각하오면 소자가 처음 났을 때, 무릎에 두고 손바닥에서 길렀으니 아버지의 은혜는 하늘과 같고,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었으니 어머니의 덕은 땅과 같나이다. 또 생각하오면 어머님이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이 소자를 “아가!”하고 세 번 부르고 큰 소리로 통곡하였으니, 아아 슬프고 애달픕니다.
또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밤에는 소자를 안은 채 베개를 높이하고 이불 속에서 고요히 가셨으니, 아아 슬프고 애달픕니다.
파란 등불은 벽에 걸렸으나 길쌈하는 어머니 모습 다시 볼 수 없고, 시 짓고 술 마시는 아버지를 다시 뵐 수 없사오니, 말소리와 모습이 아득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저승과 이승은 하나의 이치요, 아버지와 자식은 하나의 기운이니 천리 밖에서 한번 통곡하고, 만 번 절하옵니다.
백발의 한 형이 저를 대신하여 제사하나이다.
병자년 정월 열사흗날 불효 운학
이렇게 부모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평생 지킨 휴정은 그 후 임진왜란을 맞아 승군을 이끌고 국난을 극복하는데 선봉이 되어 나라를 지켰다. ‘팔도의 승려는 일어나라!’는 휴정의 격문 한 장이 띄워지자 각처에서 5천 명의 승려가 자원, 총궐기했다. 휴정이라는 이름이 이 정도였다.
아홉 살, 열 살에 천애고아가 된 힘이 그것이었다. 버릴 것 없고, 얻을 것 없는 용기가 불퇴전의 마력을 내어 선교판사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기축옥사 때 모진 고문에도 꿋꿋이 견뎌낼 수 있었으며, 임진란을 당하여 전쟁터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수습되어 갈 무렵 휴정은 승군을 제자인 유정에게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청산 백운 속에서 말년을 보냈다.
1604년 세수 85세, 묘향산 원적암에 있으면서 음력 1월 23일, 양력 2월 22일이 되자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더니 가마를 타고 묘향산에 있는 암자들을 두루 살피고 나서 대중에게 설법을 했다.
설법을 마친 휴정은 조실에 들어가서 자화상을 보면서 임종게를 그 뒷면에 적었다.
- 80년 전에는 이것이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게송을 쓰고 나서 영정을 사명과 처영에게 전하라고 한 뒤 단정하게 앉아서 그의 부모가 계신 구천 구원으로 떠나갔다. 어머니와 헤어진 지 77년, 아버지를 여읜 지 76년만에 그들이 있는 곳으로 ‘외롭지 않은’ 여행을 떠난 것이다.
이재운/소설가
- 청허휴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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