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초연화 보살은 지리산 자락에서 저 멀리 북녘 금강산 마하연까지 큰아들을 찾아 집을 나섰다.
내금강 마하연에 이르러 아들 김영주를 찾으니, 출가승이 된 아들 성철은 “이렇게 먼 길을 왜 오셨어요?”하고 댓바람에 퉁을 놓고 돌아서버렸다.
“아니, 난 니 보러 오지 않았다. 하도 금강산이 좋다고 해서 구경 온기라!”
성철 스님이 천 리 먼 길을 찾아온 생모를 박대하자 마하연 대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기어이 이 일로 대중공사(大衆公事: 대중이 모여서 의논하는 모임)가 열렸다.
결론이 내려졌다.
“먼 길 온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 구경을 시켜드리든지 아니면 당장 마하연에서 퇴방하라!”
대중공사의 명은 지엄하다.
다음 날부터 아들 성철스님은 대중스님들의 뜻에 따라 어머니를 모셨다.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여 어머니 손을 잡아 내를 건너기도 하고, 등에 업고 험한 길을 오르기도 하고, 뒤에서 밀어 올려 넓은 바위에 앉아 쉬기도 하면서 묘길상, 보덕암, 정양사, 표훈사, 장안사 등의 내금강을 두루 구경했다. 다음으로 외금강으로 넘어가 신계사, 법기암, 구룡폭포, 상팔담, 만물상 등을 둘러 두루두루 구경했다.
“그때 할머니는 하도 좋아서 극락세계가 따로 없었다”고 손녀딸(불필 스님)은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들은 말을 떠올렸다.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한 성철스님은 그 후 한 번도 고향땅을 밟지 않았다. 이 고향에는 그의 부모가 있고, 부인이 있고, 자식이 있는 곳이지만 그는 그러했다.
부친 이상언 옹의 회갑 날, 이웃과 친지와 벗들이 많이 모여 풍악을 울리며 하루 종일 잔치를 벌였다. 해가 질 무렵 가족이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때, 평소 그 당당하고 꼿꼿하던 성철스님의 부친, 이상언 옹이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던 큰아들 영주(성철)가 없었다. 그만 잔치마당은 울음바다가 되고 결국 회갑사진은 부친과 모친만 나란히 찍고 끝내 가족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성철스님이 출가한 뒤 부친의 상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들 생각을 하면 하도 애통하여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고, 평소에 곧잘 “석가모니가 내 아들을 빼앗아 갔으니 내가 석가모니에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말하곤 했다. 복수라는 것은 하인들을 시켜 집 앞에 흐르는 강가에 그물을 쳐서 일부러 고기를 잡는 것이다. 엄격한 유가의 전통을 지키는 부친께서는 불교가 살생을 금하고 있으니 살생을 하는 것이 복수한다고 생각했다. 잡아온 물고기들을 남김없이 매운탕을 끓여 먹는 걸로 석가모니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남편을 바라보던 초연화 보살은 남편이 낮에 잡은 물고기를 함지박에 넣어두고 저녁에 그가 잠이 들면 몰래 나가서 물고기를 모두 강에 쏟아 부었다. 한동안 이 집에서는 낮에는 잡고 저녁에는 살려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런 아쉬움과 애절한 안타까움 속에 지내다가 부친이 드디어 아들 성철스님이 머물고 있던 통영 안정사 토굴인 천제굴로 찾아 나선다. 도저히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유가의 선비라는 자존심도 버리고 꼿꼿하게 살아왔던 성정도 버리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강상윤리도 다 버리고 오로지 보고 싶은 아들을 찾아 지리산에서 통영으로 길을 나섰다.
부친은 그때 성철스님을 보고 아들의 풍모가 예사롭지 않은 것에 놀라고 감격했는지 집에 돌아오는 그 날로 강에 쳐 둔 그물을 손수 끊어버렸다.
- 1947년, 오른쪽이 성철, 왼쪽이 청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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