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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사람들/스님들의 어머니

외아들이 출가해 대가 끊어졌으니 - 진묵 스님

외아들이 출가해 대가 끊어졌으니 내 묘소를 누가 지켜줄 것인가 - 진묵 스님

 

진묵 스님이 전주 일출암(日出庵)에서 수행할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어머니는 일출암 인근의 왜막촌(倭幕村, 현재 전북 완주군 용진면 아중리)으로 모셔와 머물게 하였는데 진묵스님은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하였다.

 

하루는 어머니의 얼굴이 좋지 않아서 어찌된 일인가 살펴보니, 밤새 모기에게 물려서 고생을 하신 것이었다. 이를 안쓰럽고 송구하게 생각하여 산신(山神)에게 부탁하여 어머니가 사는 마을의 모기떼를 다른 곳으로 쫓아버리게 하였다. 그래서 왜막촌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모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없다고 전해진다.

 

 

어린 나이에 출가한 진묵스님은 홀로 계신 어머니와 아직 시집 못간 여동생이 늘 걱정되었다고 한다. 그 근심과 염려 때문이었는지 스님은 술을 곡차(穀茶)라 하면서 무척 즐겼다고 하는데 술에 취하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게송을 읊었다. 

 

- 하늘을 이불로, 땅을 돗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만들어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나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이렇게 배포가 큰 수행자였지만 노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어쩌지 못하였나보다.

어느 날 병석에 누워있던 어머니가 탄식하였다.

“외아들이 출가하여 대가 끊어졌으니 제삿밥은 물론이고 내 묘소를 누가 지켜줄 것인가?”

이 말을 듣고 진묵스님은 노모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여 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진묵스님은 고향인 만경 북쪽의 유앙산(維仰山, 지금의 조앙산)에 길지를 가려 장사 지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49재를 모시면서 왕생극락을 축원하였다.

 

- 열 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까?

어머니 슬하에서 길러 주신 그 은혜를 이 자식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세(萬歲) 위에 다시 만세를 더 사신다 하더라도

이 자식의 마음에는 그래도 부족하온데

백년 생애에서 백년마저 다 채우지 못하고 가셨으니

어머니의 수명은 어찌하여 그리도 짧습니까?

표주박 손에 들고 걸식으로 살아가는 이 산승(山僧)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녀를 꽂고 아직 시집가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애처롭지 않겠습니까?

상단(上壇)의 불공의식을 마치고 하단(下壇)의 재(齋)가 끝나니

스님들은 제각기 방으로 돌아가고

앞산과 뒷산은 첩첩산중인데 어머니의 영령은 어디로 떠나셨습니까?

아! 애달프다, 사랑하는 어머니여!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묘를 단장한 뒤 진묵스님은 붓을 들어 현판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 여기 이 묘는 만경현 불거촌에서 나서 사문이 된 진묵일옥의 어머니를 모신바, 누구든지 풍년을 바라거나 질병 낫기를 바라거든 이 묘를 잘 받들어라. 만일 정성껏 받든 이가 영험을 못 받았거든 이 진묵이 대신 결초보은하리라.

 

현재 진묵스님의 어머니 묘소는 김제군 만경읍 화포리 조앙산(祖仰山)에 모셔져 있고 그 옆에 성모암(聖母庵)이라는 사찰이 생겼다. 그런데 사찰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인근 마을 사람들이 풀을 깎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진묵대사 어머니 묘를 먼저 벌초하고 제사지내면 그해 농사가 풍년 들고 꼭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먼 고을 사람들까지 앞 다투어 묘소를 돌보았다. 과연 진묵스님의 예언이 적중한 것일까. 어쨌든 이러한 전통은 수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성모(聖母)의 묘역은 늘 깨끗하고 참배객이 줄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