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광덕스님이 단월과 차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스님은 소리 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지 광덕스님은 애써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광덕스님의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며 존함은 동낭(東娘)이다. 어머니는 자랄 때부터 책을 무척 많이 읽고, 여성이 갖추어야할 교양과 마음의 수양을 두루 쌓았다. 처녀 시절 친정집에 따로 선생님을 모셔 홀로 공부를 할 정도로 유복한 가정환경이었다고 한다. 붓글씨를 배우는가 하면 수를 놓는 일, 바느질을 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까지 익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광덕스님은 절에 온 뒤로는 스승이신 동산(東山) 조실을 모셨다. 조실스님께서 부르시면, 사내(寺內) 어디에 있든 바로 달려와 “예, 스님”하고 무릎을 꿇어 복종하는 자세를 갖췄다고 곁에 있던 백운스님은 증언했다. 속가에서 어머니가 부르거나 일을 시키면 한 번도 토를 달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한결같이 “예, 어머니!”하고 순종하고 복종했다는 것이다.
광덕스님은 출가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상도동에서 살았다. 그때 어머니가 병환으로 신음하자 밤낮으로 간호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건넌방에서 잠깐 잠든 사이 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말을 꿈결에 듣고, 벌떡 일어나 내의 차림으로 멀리 떨어진 약국까지 달려가 약을 구해 왔다. 미처 옷 입을 경황도 없이, 아니 자신이 옷을 벗었는지 입었는지조차 잊었다고 한다.
또 언젠가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제 나이도 됐고 하니 장가들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니, 웃으면서 “어머니, 전 아직 장가들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 어머니께서 적적하시면 좋은 분 모시고 오세요. 제가 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라고 답하더라는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언제인가 5월, 어버이날을 즈음한 때에 스님은 이런 설법을 했다.
“제가 젊은 시절 까닭 없이 방황하여 며칠 동안 거리를 쏘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뭔가 제 나름의 갈등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시던 어머니께서 하루는 저를 부르셨어요. ‘네가 그렇게 방황하면 되느냐?’고 염려하셨어요. 전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는 뉘우치고 어머니께 반성하고 사죄했습니다.”
어머니는 몹시 편찮아 마침내 그 명을 다하게 된다. 그때 불철주야 간호를 맡은 아들인 광덕스님은 어머니가 앓던 폐병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그것으로 인해 아들은 범어사로 요양을 떠나야만 했다.
후일 스님은 자신을 부처님께 인도한 분은 어머니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어머니가 폐병을 물려주지 않았으면 범어사에 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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