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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이기는 백과사전

7. B29, 장점을 포기하라

7. B29, 장점을 포기하라

 

최초의 전략폭격기 B29는 1942년 9월 21일 첫 비행에 나섰다. 이 무시무시한 폭격기는 고도 9000미터까지 상승하기 때문에 대공포에도 끄떡없을 뿐만 아니라 항속 거리가 굉장히 길었다. 일본까지 폭격하러 나갔다가 거뜬히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1943년 10월 4일, 미육군 소속 항공대 총사령관(공군이 없던 시기로 일종의 공군참모총장격) 헨리 아놀드 중장은 마리아나 제도에 B29 전용 발진 기지를 건설했다. 그러고는 헤이우드 한셀 준장을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한셀은 B29의 장점을 이용, 일본 본토의 항공산업 기지에 대한 고고도 정밀 폭격 작전을 지휘하기로 했다. 고고도 정밀 폭격 작전이야말로 B29를 가진 미군이 펼칠 수 있는 가장 멋진 작전이었다.

 

하지만 B29는 엔진 고장을 자주 일으켜 중간에 돌아오곤 했다. 게다가 일본을 향해 날던 이 폭격 편대들은 상상할 수 없는 기류에 부딪혀 대오를 잃고, 어떤 때는 기류에 밀려 거의 날지 못했다. 8500~9500미터 고도로 토쿄 부근에 접근했을 때 폭격기들은 최고 시속 200㎞의 빠른 기류를 만났다. 나중에 제트기류(jet stream)라고 명명된 강력한 편서풍이다.

이 제트기류에 휘말린 B29 폭격기들은 대형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고, 하필 목표상공에는 두꺼운 구름까지 끼어 정밀 폭격을 할 수가 없었다. 111대가 떠난 이 편대 중 24대가 겨우 목표 지점을 조준하고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폭탄들마저 여기저기 흩어져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떨어지지 못했다.

 

이후에도 작전은 계속되었지만 명중률은 10%에 불과하고, 그 사이 B29를 40대나 잃었다. 이때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다. 세계 최고의 전술폭격기라는 B29는 잦은 고장으로 명중률 10% 밖에 안되는 전력으로 지지부진하던 중 미 해군 소속 함재기들이 무사시노 공장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어른이 못한 걸 아이들이 해낸 셈이었다.

 

결국 미육군 항공대 사령관 아놀드 중장은 한셀 준장을 전투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커티스 르메이 소장을 불러들였다.

1945년 1월 20일 마리아나에 도착한 르메이 소장은 전임 한셀 준장을 불러 실패 이유를 물었다.

한셀이 지적한 문제는 B29의 엔진 부하, 고고도의 제트기류였다. 엔진 부하 문제로 1945년 1월 중순까지 작전에 참가한 B29중 23%가 중도에 귀환, 이를 해결하고자 기체중량을 감소시키려 노력했지만 불가했으며, 고고도에 이르러도 그 지대에 부는 강력한 제트기류로 정밀 폭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르메이는 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르메이는 먼저 엔진 부하를 줄이기 위해 B29의 중량을 줄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연료탱크 한 개를 비워버렸다. 또 방어용 무기인 50구경 기관총 몇 정을 아예 없애버렸다. 그러자 엔진 수명이 200시간에서 750시간으로 증가했다.

승무원들은 방어무기도 걱정이지만, 연료탱크 하나를 떼어낸 바람에 항속거리가 너무 짧다고 불평했다.

 

르메이는 제트기류 문제를 고민하다 아예 고고도 정밀 폭격 전술을 포기했다. 그러고는 해군 함재기들이 무사시노 공장을 초토화시킨 전투기록을 면밀히 검토했다. 무사시노 공장은 대부분 목재로 이루어져 작은 함재기들이 떨어뜨린 작은 폭탄에도 불길이 여기저기 번지는 바람에 그만 잿더미가 돼버린 것이다.

과연 정보 분석 결과 도쿄의 군수 공장들은 대부분 나무로 지어졌고, 게다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는 걸 알아냈다.

“빙고!”

그는 도쿄 군수 공장 밀집 지대에 네이팜탄을 쏘기로 결정했다. 폭탄을 폭파시키는 게 아니라 불을 질러버리는 것이다.

즉 저고도로 야간에 접근하여 네이팜탄을 쏘면 B29의 엔진 성능 문제도 해결되고, 제트기류에 의한 혼란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945년 2월 19일, 마리아나의 모든 B29에서 후미 기관총을 제외한 4개의 방어기관총을 제거했다. 기관총을 떼어내자 사수 3명도 탑승할 필요가 없게 됐다. 기관총 탄약과 장비도 함께 제거되었다. 그대신 폭격기마다 6 ~ 8톤의 네이팜탄을 적재했다.

대공포 공격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승무원들의 안전까지 무시한 이 결정으로 격렬한 반발이 있었으나 르메이는 작전을 강행했다.

 

3월 9일 마침내 B29 302대가 토쿄폭격에 나섰다.

302대 중 279대가 토쿄 상공에 도착했다. 단 석 대만 돌아갔다.

집채만한 B29 279대가 공장 지붕에 닿을 듯 낮게 날아들었다. 선도기가 폭격 지점을 알리는 표시를 해놓자 뒤따르던 B29들은 일제히 네이팜탄을 떨어뜨렸다.

화염이 솟구치자 이 불폭탄을 직접 맞지 않은 인근 공장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이윽고 군수 공장 일대가 잿더미가 되고, 이 한 차례의 공격으로 군수공장 군인, 노동자 등 8만 4천 명이 불에 타버렸다. 거의 핵폭탄에 맞먹는 위력이었다. 이 작전에서 B29는 14대가 대공포 등에 맞아 희생되었다.

하지만 그간 치른 모든 폭격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승리를 단 한번에 이루어냈다. 이후 일주일 동안 계속된 작전으로 일본군과 군수노동자 12만 명이 네이팜탄에 불타 죽었다.

 

6월말까지 르메이는 그 자신이 선정한 일본 6개 도시를 철저히 파괴시켜 버렸다. 커티스 르메이는 나중에 창설된 공군 사령관이 되고, 헨리 아놀드 사령관은 영예의 5성 장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