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아래로 이동
세력의 이동과 재편은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친목을 도모하는 작은 모임에서부터 기업, 각종 사회단체, 정부, 정치권 등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세력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1970년대 초대형 컴퓨터가 중앙 부처에 도입될 때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있었다. 상사에게 브리핑할 때 보고서 작성자의 의도대로 결정이 날 것 같지 않으면 얼른 ‘이것은 컴퓨터에 의해서 계산된 것입니다’라고 하면 꼼짝없이 예견했던 대로 결론지어진 사례가 많았다. 보고자의 생각대로 상관이 움직이지 않으면 ‘컴퓨터에 의한 계산’ 소리만 하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정도였다. 컴퓨터의 처리과정을 잘 모르는 높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식이 드러날까봐 부하의 의사대로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후에 컴퓨터란 단순한 기계일 뿐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의사결정권자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편해지고 선택의 여지가 많아졌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만드는 소프트웨어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컴퓨터 취급자들의 권한이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정보의 분량이 엄청나게 많아지고 여론조사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활동이 강화되면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재량권은 좁아지고, 점차적으로 보좌관들이나 정보제공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보다 높은 관리직일수록 무대 위의 배우처럼 변해가기 쉽다. 이런 경우 실권은 최초의 지식이나 정보 제공자에게로 돌아간다. 그 사람은 말단 직원일 수도 있고, 중간의 정보제공자일 수도 있다.
신문을 보면 은행의 컴퓨터를 조작하여 수억 원의 돈을 빼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실린다. 금고에 있는 돈이 은행장이나 간부들에 의해 이동하지 않고 말단 직원의 컴퓨터 단말기 조작에 의해서 빠져나간다면 실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물론 이것은 정상적으로 인정된 권력이 아니지만 정보와 지식을 취급하는 사람들의 힘이 막강해졌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나은행에서는 신상품 개발에 신입사원을 참여시켜 획기적인 성과를 올림으로써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경험이 풍부한 직원들 가운데 우수한 사람만을 골라 참여시켰던 과거의 관행을 깨고 입행 2년 이하의 신참들을 브레인 스토밍brain storming 팀에 넣어 휴양지나 호텔 등에서 2박3일 간의 자유롭고 열띤 토론을 거쳐 금융 신상품을 다양하게 개발해냈다.
그 은행은 신상품 개발에 만족하지 않고 은행본부의 권한을 산하지점에 대폭 이양하여 ‘모든 업무는 나의 지점이, 내가 스스로 하고 책임진다는 자주, 자율, 진취의 정신’을 심고 독립적인 경영을 시도하였다. 본부와 영업점의 관계를 상·하의 수직에서 수평으로 놓고, 독립적인 하나의 은행으로 보면서 목표 수립, 인사, 영업, 홍보 등을 맡기고 있다.
은행의 중장기 계획수립에 각 지점의 임직원들을 참여시키고, 관료주의 발생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며, 각종 임시 수평팀을 만들어 부단하게 개혁하고 교육 및 연수 프로그램도 늘렸다. 이렇게 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세력재편 시기에 기업이나 조직들이 어떻게 적응해갈 것인가를 보여준 하나의 좋은 사례라고 여겨진다.
요즈음 상품을 판매하는 데 권한이 공장으로부터 도매상으로 그리고 이어서 소매상으로 이동하고 있다. 상품공급이 부족할 때는 생산자부터 세력을 갖지만, 기술의 발달과 과잉경쟁으로 생산공급이 남아돌기 시작하면서 권한은 소비자를 접촉하는 최일선의 소매상에게로 이동한다. 소비자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많은 상품을 파는 사람이 제일 큰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라고 하여 예외일 수 없다. 매스미디어와 정보화시대에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국민들에게 어떻게 부각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유권자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그 해결대안을 제시하는 기법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힘있는 정치인의 말 한마디는 매우 큰 반향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본인들의 이미지에도 결정적일 때가 많다. 따라서 수집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전문 보좌역의 영향력은 막강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전쟁에서도 일선 사령관의 권한보다 레이더나 정보를 다루는 전문기술 직업군인들의 영향력이 더 클 수 있다. 1991년 2월에 일어난 걸프전에서도 전자전쟁이 빛을 발한 바 있다. 컴퓨터나 다양한 전자장비를 다루는 말단군인의 역할은 다른 어떤 장교의 지휘능력보다 더 중요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 회사나 다양한 조직체의 관리직들이 모두 실권이나 세력을 갖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의 기능과 역할을 한다. 그러나 보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려다보면 정보와 지식을 다루는 하위직들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 사회는 점점 복잡 다원화되므로 새로운 변화가 물결처럼 일어나고 있으며, 알아야 될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으로 무장된 단순한 두뇌의 회전만으로는 최선의 의사결정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세력이 이처럼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한다면 조직의 힘을 강화시키는 방법은 비교적 자명해진다. 수평적인 연구팀을 만들어 참여민주주의 방식으로 모든 구성원들의 창의력을 피라미드형으로 모으는 것이다. 10명 내외의 계 단위나 과, 부, 국 단위로 팀워크를 이루어 시간만 나면 자유스럽게 토의하도록 유도하여 좋은 아이디어나 상품을 개발해내면 후한 상과 함께 인간적인 신뢰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일본의 기업들이 이런 유형의 수평적 팀을 통해 많은 성과를 올린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정부 역시 기존의 낙하산식 조직체계를 가지고도 수평적 연구나 작업이 가능해질 수 있다. 필자는 농림수산부 재임기간에 국 단위로 사무관부터 국장까지 모두 수평적 팀을 만들어 매 주말이면 몇 시간이고 주요 정책과제를 놓고 자유스럽게 토의하도록 유도해보았다. 그런 식으로 몇 개월을 거듭해나감에 따라 구성원들의 지식은 현저하게 높아졌고 자신감의 충만과 인화까지 조성되는 등 대단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때로는 외부 전문가나 성공한 농어민들을 초청하여 세미나식 발표까지 들으면서 진지한 토의를 거듭하였다.
중요한 것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급변하는 전환기에는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포착하도록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의사결정권자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조직이고 집결된 힘을 발휘할 수 없으며 조직 전체가 겉돌기 쉽다. 뒤를 이어 중간 간부들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고정관념이 바뀌지 않고 고철처럼 굳어 있다면 변화에 적응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의사결정권자나 중간관리자들은 직원들의 심리를 이해해줄 줄 알아야 한다. 직원들을 신뢰하고 전폭적인 믿음을 주어야 한다. 경청하고, 칭찬하고, 인정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고 웬만한 일은 일선에 맡기고 권한을 위임하면 그들은 창의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 시행착오적인 실패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용서하고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주면 신바람이 나서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정부도 이런 변화의 물결에 따라 신속하게 적응하지 않으면 국가발전의 주도보다 오히려 저해집단으로 떨어지기 쉽다. 정부가 모든 것을 전부 관할하기 위해 중앙계획경제를 도입하였던 공산권 국가들이 오늘날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자유주의 세계에서도 중앙집권적인 국가보다 지방자치제를 일찍이 도입한 나라들의 균형적인 발전이 앞섰다.
앞으로는 국민들이 지식과 정보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정부의 권력도 점차 중앙에서 지방으로 분산될 수밖에 없고, 최후에는 부분적으로 주민들에게까지 내려갈 것이다. 주민들의 의식이 높아지면 지방의 논리가 중앙의 위력을 제압하고, 지방의 효율이 중앙의 비효율을 포위하며, 지방의 다양성이 중앙의 획일성을 수정하고, 기업형 지방조직이 관료적 중앙조직을 점차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자치제 도입 초기 내지 과도기에는 도약의 가능성을 갖는 반면에 추락의 위험성도 도사리고 있다. 지방화는 성숙의 발판이면서 혼란의 함정이기도 하다. 경영능력의 부족과 재정위기 등으로 파산에 이를 자치단체마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역이기주의로 폐기물 처리를 모두 기피한다든지 또는 다양한 부조리들이 괴질처럼 확산될 위험도 따른다.
그러나 비용 없는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실패나 시행착오들이 값진 경험일 수 있다. ‘내 일은 내가’ ‘우리 것은 우리가’ 한다는 자립정신의 발현 없이는 최소경비로 최대복지를 성취하기 힘들다. 지금의 도보다 작고 시·군보다는 큰 적정규모의 경제단위, 경영·문화·환경·국제화의 기초단위인 지방자치구역을 만들고, 발상의 전환과 함께 다양성과 독창성을 살려서 지방경영의 효율을 극대화시켜 나가는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다.
앞으로 지방화시대가 효율적으로 열리게 되면 멀지 않아 한국에서도 시골 시청을 일본 최고의 지방행정기업으로 부상시킨 이와쿠니 데쓴도 이즈모 시장과 같은 지도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일본 오이타 현의 지사나 독일 노이파른 시장 그리고 캐나다 앨버타 주지사처럼 연중 한 달 이상을 세일즈 출장으로 보내는 열성파 자치단체장들이 속출할 것이다.
영국의 셰필드 시청처럼 적자가 누적되면 공무원들의 봉급을 삭감하고, 스위스의 추미콘 시청처럼 직원들의 업무평가에 따라 성과별 연봉을 주며, 독일의 맨하임 시청처럼 컴퓨터를 통해 직원들의 근무태도를 파악하는 지독한 지방정부가 한국에서도 출현할 것이다.
영국 런던 이알링 구區는 1994년 2월 대민 서비스를 포함한 36가지의 행정업무를 맡고 있는 기술국을 공개입찰을 통해 민간기업에 팔아 넘겨버렸다. 행정입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영국의 동남단에 위치한 캔트 카운티 의회 의원들은 영국 수상의 봉급보다 더 많은 급여를 주고 수석집행관을 스카우트해갔다. 지방을 발전시키는 데 인재투자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절감한 결과였다. 전문경영을 맡는 부기관장의 모집에 195명의 인재가 몰려든 미국 캘리포니아 아고라힐즈 시市에서도 역시 많은 연봉을 제시하였다. 이런 일들이 한국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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