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모삼천(犬母三遷)
개에게도 사람의 인격과 비슷한 견격(犬格)이 있다고 하면 웬 헛소리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를 길러본 사람은 분명 개에게 ‘격’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남편이 개를 사온 것은, 아니 ‘입양’해 온 것은 올림픽이 있던 해인 1988년 가을이었다. 퇴계로 큰길가에 있는 애견센터 앞을 지나다가 잠에서 깨어 입이 찢어져라 하고 하품을 하는 그 녀석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참으로 이상했다. 보통 동물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몇 초를 견디지 못하고 외면을 한다던데, 녀석은 하품을 하고 난 뒤라서인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남편 눈을 한동안 빤히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마치 응석받이 어린아이처럼 “아빠 날 데려가 주세요” 하고 약간 혀 짧은 소리로 말하는 것 같았단다.
남편은 녀석의 마력에 이끌려 애견 센터 안으로 들어섰고, 녀석이 지중해 몰타섬이 고향인 말티스종이란 걸 알았고, 한달치 용돈을 톡톡 털어서 녀석을 ‘입양’했고, 첫아들을 낳으면 붙이려고 했던 ‘도담’이란 이름을 녀석에게 기꺼이 선물하였다.
* 도담: 어린 아이가 야무지고 탐스러운 모습.
한자로 멋스런 뜻을 굳이 붙이자면 道談.
남편보다 더 바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남편이 도담이를 안고 들어오자 똥 오줌 치울 일부터 걱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쌀쌀맞게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 데리고 들어온 자식이니 당신이 맡아서 길러요.”
그러나 녀석은 내 우려가 무색하게,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지 이틀 만에 대소변을 가리는 영특함을 보여 주었다. 대소변 받이로 깔아 놓은 신문지에만 볼일을 보았고, 행여 신문지가 깔려 있지 않으면 방바닥에 놓인 광고지나 책 등 종이 위에만 ‘실례’를 했다. 종이가 너무 작아 공간이 매우 좁을 때에도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정확히 조준해 배설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녀석이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 놓았다는 것이었다. 먹이, 아니 밥도 방바닥에 주면 먹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우리 것과 함께 상 위에 놓아야만 먹었고, 잠을 잘 때면 남편과 내 사이로 파고들어와 머리는 내 팔을 베고 다리는 남편 가슴 위에 척 얹어 놓고 사람처럼 발랑 누워서 네 활개를 치고 잤다. 우리 둘 사이에서 조금만 큰소리가 나도 녀석은 양쪽 눈치를 살피면서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화해를 시키려고 끙끙거렸고, 퇴근 시간이 보통 때보다 늦으면 뾰루퉁해져서 방구석에 처박혀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우리 직장에서 회식이 있어 내가 평소보다 훨씬 늦게 퇴근하던 날은 현관에 버티고 앉아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렸다. 남편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계속 달래도 막무가내 밖으로 나가겠다고 방문을 긁어대었고 그래도 문을 열어 주지 않자 다리를 번쩍 들고는 문에다 냅다 오줌을 내갈기더라는 것이다.
문제는 집 주인이었다. 위층에 사는 집주인은 최근에 부쩍 많이 날아드는 정체 모를 하얀 털의 근원을 찾아 우리 집으로 내려왔고 우리 집에 식구가 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집주인은 털 달린 짐승을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놓고 싫은 소리를 하지는 못했으나 못마땅한 내색까지 감추지는 않았다.
공교롭게도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집주인은 재계약 전세비를 엄청나게 많이 올려 받기를 원했다. 그렇잖아도 도담이가 온 후로 함께 살기가 거북했던 우리는 다른 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집주인이 우리 ‘아들’을 꺼린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해 이사를 결심한 것이다.
우리는 연립 주택을 빌려 이사를 했다. 이것이 첫번째 이사였다. 그러나 단독 세대로 산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을 낮동안 집에 혼자 있게 한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회사에서 근무하면서도 출근 때 현관 앞에서 우리를 빤히 바라보며 헤어지기를 아쉬워하던 녀석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집에 돌아와 보면 녀석은 불도 켜 있지 않은 깜깜한 현관에서 아침에 우릴 배웅하던 모습 그대로 기다리고 있다가 왜 이제야 왔느냐는 듯, 낑낑거리며 꼬리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360도로 뱅뱅 돌리면서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날은 저도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현관에 있는 구두며 슬리퍼 등 제 몸 만한 신발을 몽땅 안방에 물어다 놓고는 그 속에 들어가 잠들어 있기도 했다. 비록 고린내이기는 하지만 주인의 체취가 배어 있는 구두가 그리 좋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더이상 녀석을 혼자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녀석에게 친구를 구해 주기로 했다. 강아지 한 놈을 또 입양해 온 것이다. 둘째 녀석은 잉글리쉬 코카스파니엘 종으로 도담이와 돌림자를 써서 ‘도롱’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두 녀석이 함께 있으니 점심 때 먹으라고 놓고 온 밥을 누가 먹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강아지에게는 과식이 가장 나쁘다고 하여 한 끼분만 챙겨 놓고 출근하는데, 도롱이는 저보다 몇 개월 일찍 태어난 도담이에게 먹이를 빼앗기는지 나날이 비리비리해져 갈 뿐, 도무지 크는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별 수 없이 두번째 이사를 했다. 친정 어머니가 사는 동네의 아파트를 사 두 녀석과 함께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행히 어머니는 우리 마음을 이해하고 점심때마다 녀석들에게 먹이를 챙겨 주었다.
할머니 손에 자라서인지 녀석들은 무럭무럭 씩씩하게 자랐다. 우리가 키울 때는 설사도 잦고 감기에 걸리거나 피부병 때문에 병원 신세를 늘상 지더니 어머니가 돌보아 주기 시작한 후로는 병원과 발길을 끊어도 될 정도로 건강했다. 가끔 예방주사를 맞히고 때 맞추어 구충제만 먹이면 되었다. 낑낑거리기만 할 뿐 통 짖지를 않던 두 녀석이 어느 날 처음으로 ‘컹컹’ 하고 고고성을 질렀을 때 우리 부부는 벙어리가 목청을 튼 것처럼 대견스럽고 신기해했다. 그런데 이것이 또 이사 요인이 되었다.
녀석들은 우리가 퇴근할 때마다 반가워서 듀엣으로 짖어댔고 우유 배달부 신문배달원 등 누가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우렁차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아파트 이웃들로부터 시끄럽다는 항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녀석들이 짖는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꽤 큰돈을 들여 베란다에 유리창을 덧달고 현관문을 이중으로 설치했다. 그러나 건물이 오래 되어 낡은 탓인지 방음 효과가 별로 없었다.
직장 때문에 바빠서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한 반상회에서 연일 우리 집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우리 집 ‘아이’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린 아파트로 이사온 지 몇 달 만에 또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저희가 떠날 수밖에 없겠네요.”
반상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의견을 전해준 이웃집 아주머니한테 이렇게 말하자, 아주머니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개 때문에 이사를 가다니요? 팔아 버려요.”
아주머니는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
팔라니... 우리 아이들 도담이, 도롱이를 팔라니...
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우린 그런 아주머니가 야속하기만 했다.
“정, 팔기 싫으면 성대 수술을 해주세요. 짖어도 소리가 안 난대요.”
아주머니는 다른 방안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부부는 심각하게 의논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 팔거나 남에게 맡겨서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
둘째, 아이들에게 성대 수술을 해주어서 짖지 못하게 하고 함께 사는 것
셋째, 아파트를 팔고 단독 주택을 사서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
첫째 안은 두 번도 생각해 보지 않고 버렸고, 두번째 안을 갖고는 한참동안 고민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개라면 짖자고 태어난 동물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아이들을 어찌 생벙어리로 만들겠는가. 잔인한 짓이라 생각되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란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셋째 방안을 택할 수도 없었다. 20평 짜리 우리 아파트를 팔아서는 단독 주택에 전세로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남편과 나는 고민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세번째 방안을 선택한 것이다. 서울에 있는 단독주택은 값이 엄청나서 살 수 없지만, 지방으로 내려가면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 둘 다 직장을 나가므로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까봐 걱정은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과 헤어지거나 성대 수술을 시키는 것보다는 나을 성싶었다.
우린 집을 알아보러 서울 근교 도시의 주택 시세를 알아 보았다. 수원, 인천, 성남, 의정부, 광명... 그러나 이곳들 역시 서울 못지 않게 비쌌다. 우리 아파트 판 가격으로 단독주택을 구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 멀리 가 보았다. 용인, 이천, 광주 등지였다. 그러나 이런 지역도 사람이 밀집해 사는 곳은 예상대로 집값이 너무 비쌌다.
별 수 없이 우린 농촌 지역의 주택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용인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더 걸리는 시골에서 적당한 집을 발견하였다.
대지 237평. 허름한 옛날집이었지만 터가 넓다는 데 반해서 우린 그 집을 샀다.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 전세를 놓고 그 전세금에 빚을 조금 내서 집값을 마련했다. 넓은 터에서 우리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을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그로부터 두어 달 뒤, 우린 용인 시골로 이사했다. 이것이 세번째 이사였다. 서울 시내 광교 사거리에 있는 내 직장까지 꼬박 두 시간, 대림동에 있는 남편 서재까지도 거의 두 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으로. 아는 이도 하나 없고 연고도 전혀 없는 시골 마을로. 파리와 구더기가 우글대는 재래식 변소에 노천 세면실을 사용해야 하는 다 허물어져 가는 농가로.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 교육을 위해서 이사를 세 번 했다는데(孟母三遷), 도담이와 도롱이의 엄마인 나는 아이들의 생존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
“목청 제거 수술을 한 것보다 백 번 잘한 짓이지?”
주변 사람들은 한낱 짐승인 개한테 웬 정성이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두 시간이나 걸리는 출퇴근길이 어려울 때마다 남편과 나는 이렇게 서로를 위로해 주곤 했다.
“얘네들이 효자야. 이 녀석들 아니면 우리 처지에 어떻게 이렇게 큰 집에서 살 수 있겠어?”
그러고 보니 우리는 녀석들 덕분에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었다. 방 두 칸짜리 전세를 살던 우리가 일 년 남짓 세 번에 걸친 대이동을 하다보니 어느새 집 주인, 그것도 대지가 237평인 ‘대저택’의 주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 도담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라인이 없고 코주변도 매끄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88.
이런 외모로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순전히 도담이의 능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