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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이기는 백과사전

사바나의 생존 법칙

초식동물의 생존 법칙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지내던 3년간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동물의 왕국>을 기다렸다가 꼭 보셨다. 일제치하인 1924년에 태어나 2001년 하늘로 가실 때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낸 노인이 왜 하필 <동물의 왕국>에 푹 빠졌을까.


그 이유를 10년이 지난 요즘에야 깨닫는다. 다중 매체, 다채널 시대에 살다보니 언제고 채널이나 인터넷을 뒤적거리면 반드시 사바나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잡힌다. 아마도 아버지는 사바나의 섭리를 지켜보면서 다사다난했던 당신의 인생을 반추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생각이 날 때마다 사바나 프로그램을 접하다 보니 눈에 띄는 게 한 가지 있다. 우선 먹어야 산다는 단순한 진실이다. 뜻밖이자만 사나운 육식동물도 굶어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싱싱한 풀이 자라는 곳에서 맥없이 굶어죽는다. 제 아무리 먹이사슬의 맨 위쪽에 있는 사자라도 도리가 없다. 육식동물은 언제나 먹을거리 걱정없이 마음대로 사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자, 하이에나, 표범, 치타, 재칼 등의 다큐를 보면 육식동물의 삶도 초식동물의 삶만큼이나 위험하고 피곤하다.

또 누, 얼룩말, 들소, 영양, 멧돼지 등 육식동물에게 먹히는 초식동물들은 늘 생명의 위기 속에서 불안하게만 사는 줄 아는데 또한 그렇지 않다. 그 많은 육식동물들이 노리는 사바나에서 초식동물들이 열 살 이상 나이를 먹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싶지만 뜻밖에도 성체들이 굉장히 많고, 나름대로 즐겁게 산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황금 비율은 수만년째 잘 유지되고 있다.


비결은 이렇다. 육식동물의 경우 먹이를 나눠먹지 않는 습성이 있다. 독식을 하기 위해 단독 사냥을 즐긴다. 영역 싸움이 치열하고, 단지 독식을 위해 동족을 죽이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이러다 보니 사냥에 실패하면 도리없이 영역만 배회하다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다른 지역을 넘보면 동종의 육식동물이나 종이 다른 육식동물 무리에 죽을 수도 있다. 다치거나 병에 걸려도 마찬가지다. 무리의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작은 실수도 치명적인 위기로 다가온다. 새끼들이 성체로 자랄 가능성도 그리 높지 않다. 심지어 남의 새끼를 물어죽이기도 한다. 미래의 경쟁자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마치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나 대기업이 권력이나 이권을 나눠주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마치 집권여당을 보는 듯하다.


이에 비해 초식동물들은 집단생활을 선호한다. 약하디 약한 영양 무리도 반드시 집단으로 움직인다. 사자가 노리는 데서도 풀을 뜯는다. 그러다 사자의 공격이 시작되면 무리가 이러저리 방어선을 치며 움직이는데, 이때 겁이 나서 갑자기 무리를 이탈하는 영양은 반드시 사냥감이 되고 만다. 언제든 무리에서 벗어나는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눈에 띄고, 여지없이 죽게 된다.


초식동물도 새끼를 낳는데, 언제나 무리 중심에서 보호를 받는다. 성체들이 늘 지키기 때문에 사자도 마음대로 공격하지 못한다. 물론 무리에서 이탈한 새끼는 육식동물의 먹이가 돼버린다. 다치거나 병든 초식동물은 무리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 역시 육식동물의 먹이가 된다.
이러한 사바나의 질서를 보면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혼자 잘났다고 나서면 사바나의 엄중한 경고를 받아 외톨이가 되거나 죽는다.


그래서 정치인들도 당(黨)을 이룬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을 당은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창회를 만들고 모임을 만들고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같이 나눠쓰자는 뜻이다. 이러한 시스템의 정점이 국가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이 당 저 당 들락거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에게 붙었다가 저 사람에게 붙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사바나는 분명히 말한다.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법칙을 벗어나면 잘난 사람은 잘나서 죽고, 못난 사람은 못나서 죽는다. 잘나도 뭉쳐야 하고, 못나도 뭉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