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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어린 거지 ‘도조’

어린 거지 ‘도조’

도조 얘기를 쓰기 위해 앨범을 뒤져 보니, 도조가 우리 집에 온 게 도담이를 잃은 해인 1991년 5월쯤이었던 거 같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니 아이들이 새로 온 시기까지 가물가물하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길에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 오늘 기가 막힌 일이 있었어.”
남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데?”
남편의 목소리에 설레는 빛이 들어 있는 걸로 보아 나쁜 일은 아닌 성싶었다.
“집에 가서 말해 줄게. 아니, 말 안해도 알 거야. 참, 막내하고 같이 가니까 저녁밥 지어 놓아.”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애매한 말을 할까 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시동생이 함께 온다는 말에 저녁 준비를 서둘렀다.
금세 한 시간이 흘러 어느덧 긴 여름해도 서산으로 넘어갔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남편은 집에 도착했다. 자동차 멈추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남편이 이내 집안으로 들어왔다.
“도련님은?”
함께 온다던 시동생이 뒤따라 들어오지 않아서 묻자 어서 나오라는 손짓부터 했다.
“이리 나와 봐. 보여줄 게 있어.”
남편이 이끄는 대로 나가 보니 시동생이 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시동생의 팔에 강아지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아니!”
그 강아지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도담이, 그랬다. 바로 죽은 도담이의 모습이었다.
“어머나, 도담이하고 똑같이 생겼네!”
“그렇지? 도담이를 똑 닮았지?”
내 반응을 살피던 남편이 물었다.
“응. 어쩜 이렇게 같지?”

그러나 도담이는 아니었다. 우선 종이 달랐다. 도담이는 털이 하얀 말티스였는데 남편이 데려온 녀석은 머리 부분은 금발이고 몸통의 털은 청회색(영어 표현이 더 멋지다. 이런 색깔을 스틸 블루 Steel Blue라고 한다)이었다. 덩치도 도담이에 비해 훨씬 적었다. 그러나 둥그렇고 커다랗고 까만 눈, 까만 코, 단정한 입매 등은 도담이를 그대로 닮았다.
나는 얼른 시동생한테서 녀석을 받아 안았다. 그러자 녀석은 그새라도 자신을 데려온 사람에게 정이 들었는지, 아니면 잠깐이라도 안고 있던 사람이 더 안심이 되는지 시동생한테 도로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가는 이내 체념한 듯 내 품 안에서 다소곳해졌다.
“퇴근하는 길에 애완견 샴푸 사러 진로쇼핑센터(나중에 아크리스 백화점)에 들렀지.”
남편이나 나는 서울 나가는 길이 있으면 진로쇼핑센터에 있는 애완견센터에 들르곤 했다. 애완견 용품이 떨어지면 물론이고 그냥 버릇처럼 애완견 센터에 들러 강아지 구경도 하고 강아지 용품을 이것저것 만져 보다가 한두 개 사는 것도 취미였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특별히 구입할 물건이 없는데도 장난감가게나 어린이 옷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웃거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거기 이 녀석이 있잖아. 이 녀석을 보는 순간, 도담이가 살아온 것 같더라구. 눈앞이 아찔하더군.”
녀석은 작은 개장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팔려 가기 위해 전시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가게에서 키우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녀석은 이미 강아지의 단계를 넘어서서 성견이 다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민 가는 분들이 함께 데려가지 못해 입양시켜달라고 맡긴 녀석입니다. 싸게 해드릴 테니 데려가십시오. ”
주인의 설명을 들어 보니 8개월 된 녀석이었다. 그래서 제 값을 다 받을 순 없으니 7만 원만 내라고 하였다. 아시다시피 애완견은 한 달에서 석 달 사이에나 제 가격을 받을 수 있지 석 달을 넘어서면 이미 값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더구나 8개월이나 된 녀석이니 그럴 만도 했다. 요크셔테리어는 소형견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인기가 높아 다른 종에 비해 값이 퍽 비쌌다. 그때는 요크셔테리어 숫놈은 25만 원, 암놈은 40만 원을 호가하고 있었다.

남편은 녀석을 바라보며 살까 말까 망설였다. 우선, 죽은 도담이를 대신하여 도란이에게 짝을 맞추어 주려면 같은 종인 말티스를 사야 했다. 종이 다르면 새끼를 가져도 곤란하고 도란이와 짝을 맞추어 준다는 것에 별 의미도 없다. 또 하나는, 그렇잖아도 집에 개가 도란이와 도롱이 도리, 그리고 도담이 새끼인 희동이까지 네 마리나 있는데 식구를 더 늘린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성싶었다.
그러나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도담이와 너무도 닮은 모습에 도저히 녀석을 좁은 철창 안에 전시된 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남편은 마침내 녀석을 우리 집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 봤더니 현금이 얼마 없었다. 지갑을 차에 두어서 신용카드 역시 차에 있었다. 
“이 녀석 제가 살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차에 가서 지갑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동안 절대 다른 사람한테 파셔서는 안됩니다.”
남편은 가게 주인의 다짐을 받고 나서 후다닥 주차장으로 뛰어 갔다. 그때까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동생이 남편이 달려오는 걸 보고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놀랄 정도로 서둘렀다.

차안에서 지갑을 챙겨든 남편은 다시 7층에 있는 애완견센터로 달려 올라갔다. 그 짧은 동안에도 남편은 녀석이 다른 사람한테 팔렸을까봐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 녀석은 그 자리에 있었고 남편은 무사히 녀석을 7만 원에 ‘입양’해 온 것이다.
우리는 녀석이 덩치가 작으니 도란이와 함께 방안에서 기르기로 하였다.
녀석은 무척 얌전했다. 새 주인(우리 식 표현으로는 ‘부모’)이 낯선 탓인지 기가 팍 죽어서 짧은 꼬리를 축 내리고 귀를 바짝 곤두세운 채 긴장해 있었다. 맛있는 걸 주어도 선뜻 받아먹지 않고 슬슬 피하고, 오라고 하면 재빠르게 달려와 납죽 엎드렸다. 녀석이 새 환경을 너무도 서먹서먹해 하고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자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도란이는 새 짝을 보고 그리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녀석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아 보는 게 전부였다. 도담이한테는 장난도 잘 걸고 투정도 많이 부리더니 녀석에게는 무심하게 대했다.
녀석은 도란이가 다가가기만 해도 몸을 움추리며 경계했다. 몸집은 도란이와 비슷한데도 겁을 잔뜩 집어먹고 떨었다. 성격이 소심한 듯, 밖에서 인기척이 나도 짖지 않고 귀만 쫑긋 세울 뿐이고, 보통 수캐라면 처음 온 곳이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킁킁거리거나 오줌을 싸서 영역 표시를 할 텐데, 녀석은 한자리에 웅크려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용변이 마려우면 깔아놓은 신문지에 볼일을 보고 다시 제 자리로 가 또아리를 틀고 앉았다.
“아니, 무슨 숫놈이 이렇게 얌전해.”
녀석이 어찌나 조용한지 감탄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시키는 대로 용변을 정확히 가리는 게 기특했다. 
“아직 낯설어서 그럴지도 몰라. 며칠 있어야 저도 익숙해겠지.”
우리는 녀석의 이름을 ‘도조’라고 붙였다. 생김새를 보고 붙인 이름이다.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가 지은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 ‘도져’란 인물이 나온다. 이 도져는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런던 뒷골목에 살던 어린 거지로 주인공 소년 올리버를 도와 주고 악당들을 골탕 먹이는 영리하고 의리 있는 어린 거지다.
도조는 얼굴은 도담이를 닮아 고고해 보이는데 얼핏 보면 길면서도 들쭉날쭉 자란 털이 마치 서양 히피족 같다. 영화화된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온 거지소년 도져와 분위기가 흡사했다. 또 자세히 뜯어보면 선량해 보였던 도담이의 눈과 달리 도조의 눈은 양끝이 약간 치켜올라간 게 영리한 맛이 더 풍기고 장난꾸러기다운 면모도 있다. 그래서 영화 속의 도져가 연상된 것이고 도져란 발음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우리 식으로 불러서 ‘도조’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도조가 너무 얌전하기만 해 영악한 날쌘돌이 이미지인 ‘도져’와 달라 좀 덜 어울린다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도조의 본색은 며칠 지나서야 드러났다. 원 세상에. 녀석의 목소리가 그렇게 클 줄이야.
시간이 흘러 우리와 친밀해지자 녀석은 제 성품을 있는 그대로 나타냈다. 우리가 외출했다가 들어오면 앞발 두 개를 반짝 든 채 뒷발 둘로 깡충깡충 뛰며 반겼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깡깡깡 짖어대며 펄쩍펄쩍 뛰다가 열렬히 뽀뽀를 해대며 즐거워했다. 짖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청이 떨어질 정도였다. 그 크지 않은 덩치 어디에서 그렇게 큰 목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게다가 밖에서 조금만 소리가 나도 날쌔게 뛰어나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그야말로 오도방정을 떨며 짖어댔고, 도롱이나 도리, 희동이가 열린 문틈으로 방안을 기웃거리라도 할라치면 밖에 사는 녀석들이 어디 감히 방안을 들여다보느냐며 호통을 치듯 방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큰 목소리로 짖어댔다. 그리고 우리가 이리 움직이면 이리로 저리 움직이면 저리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물론 잠을 잘 때는 반드시 이불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남편이나 내 가랑이 사이에서 잤다.

녀석은 정도 많고 귀염성도 많았다. 처음에 느꼈던 도담이다운 분위기, 말티스종 고유의 고고하면서도 사색적인 면은 별로 없었다. 요크셔테리어종 특유의 다정다감과 귀여움이 가득 배여 있었다.
우리는 녀석한테 도담이와는 또다른 매력을 느끼며 함뿍 빠져들어갔다. 도담이 못지 않은 애정이 녀석한테로 향했다. 녀석은 점점 없어서는 안될 사랑스러운 우리 식구가 되어 갔다. 
우리는 전에 도담이와 도롱이를 데리고 다녔던 것처럼 여행 갈 때마다 도조와 도란이를 안고 다녔다. 도롱이와 도리, 희동이도 함께 데리고 다니고 싶지만 셋은 차에 태우고 다니기에는 너무 크다. 전에는 사실 도담이는 말티스치고는 너무 큰 편이어서, 그리고 도롱이는 본래 큰 종인 잉글리쉬 코카 스파니엘이라서 데리고 다니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는데, 도란이와 도조는 같은 종의 다른 개들에 비해 좀 무겁긴 한 편이어도 8킬로그램 정도였으니 안고 다닐 만하였다.

도조에 대한 애정이 한창 깊어갈 무렵이었다. 어느날 안성 근처의 목장에 도조와 도란이를 데리고 놀러 갔다. 들어가는 입구에 오래 된 벚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소를 먹이는 초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풍광이 멋진 곳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동반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러 놀러와 있었다. 남편과 나도 도란이 도조와 어울려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었다. 도란이 도조는 특히 넓은 초지를 마음껏 달리며 무척 즐거워했다.
그때, 한 가족이 뛰어노는 도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저 개 잃어버린 우리 토미 아냐?”
“맞아, 토미야.”
그들의 대화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조가 저 사람들 개?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전주인이 이민간다면서 내다판 개라고 하여 사왔는데, 남의 개를 훔쳤거나 주워다 팔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를 어쩌지?’
남편과 나는 얼굴이 하얘져서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개라면 돌려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저 사람들도 퍽 아꼈는가 본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앞이 아찔했다. 저 사랑스런 도조와 이별을 해야 하다니, 이럴 어쩐단 말인가?
도조와 헤어져서 사는 세상은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거운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그래, 통사정을 하자. 우리가 도담이를 잃어서 슬퍼했던 일, 그리고 도조를 얻은 덕분에 도담이 잃은 슬픔을 어느 정도 잊어가고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다 얘기하자. 그리고 값을 몇 배라도 더 쳐 줄 테니 제발 도조를 우리 곁에서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다가왔다.
“저 개, 어디서 나셨어요?”
“백, 백화점에서 샀는데요.”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서 나왔다.
“잃어버린 우리 개하고 똑같네요. 가까이서 자세히 봤으면 좋겠어요.”
그들은 의심스런 눈초리를 남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도조, 이리 와.”
나는 멀리서 놀고 있던 도조를 불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제발, 제발...’ 하고 빌었다.

내 목소리를 듣자 도조는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 잠깐 헤어져 있었던 동안도 내가 무지무지하게 그리웠다는 듯 도조는 열광적으로 뽀뽀를 해댔다.
“우리 토미가 아닌 것도 같은데...?”
그들은 도조를 보고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름을 한 번 불러볼까? 토미! 토미!”
도조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닌가 보구나. 실례했습니다. 저희가 워낙 녀석을 아꼈거든요.”
자기들이 잃어버린 개와 너무도 닮은 탓인지 긴가민가 하던 그들은 아쉬워하며 떠났고 나와 남편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도조를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우리에게 온 도조는 지금도 우리 가족의 중요한 일원이 되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고 있다.
도담이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와 인연을 맺지 못했을 도조다. 그러니까 도담이를 잃었기 때문에 도조는 우리와 이렇게 긴 세월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도조와 깊은 정이 든 뒤에도 남편과 나는 늘 도담이를 그리워한다. 그러면서도 도담이가 있었다면 이 사랑스런 도조를 못 만났겠지 하며 인연의 묘한 고리를 새삼 느끼곤 한다.
도조를 끌어안고 도담이 사진을 바라보노라면 묘한 감정이 일어난다. 세상 참 복잡한 거야.

- 도란이와 도조. 종이 다르지만 엄연한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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