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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눈물어린 모정

눈물어린 모정

도란이는 말티스 암컷으로 도시 소녀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얀 털에 까만눈의 깔끔한 외모, 도도하고 오만한 자태에 애교를 부리지도 칭얼거리지도 않고 늘 혼자 사색하는 듯한 표정이다.
반면에 코커스파니엘 암컷인 도리는 앞서 <우리집 복도리>에도 썼듯이 시골 아줌마 같은 스타일이다. 껌벅껌벅거리는 큰눈, 퍼머기가 풀린 아줌마 머리마냥 구불구불한 갈색털에 순박하고 정 많아 보이는 두리뭉실한 몸매로 허리를 꼬며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애교도 피우고, 몸을 잔디밭에 굴리거나, 배를 땅바닥에 깐 상태에서 앞발로만 기어가면서 힝힝거리는 등 재롱도 제법 피운다.

둘은 새끼를 낳아서도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도란이는 현대판 미시족처럼 행세하고, 도리는 옛적 우리 어머니들처럼 굴었다. 도란이는 새끼한테 별로 정이 없었다. 젖먹이기, 대소변 핥아먹기 등 제 할 일만 다 하고는 새끼들 곁에서 멀리 떨어져 쉬었다. 누가 새끼를 들여다봐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고, 새끼들이 웬만큼 자라면 잠도 새끼들과 뚝 떨어져서 따로 잤다.
그러나 도리는 달랐다. 누가 지 새끼를 들여다보기라도 하면 먹이를 먹다가도 쏜살같이 달려가 새끼를 품고, 불면 날세라 쥐면 터질세라 새끼들을 보살폈다. 새끼들이 있는 한 절대로 멀리 안가고, 젖 먹이는 시간 외에도 새끼들과 항상 함께 했고, 잠 잘 때에도 새끼들을 꼭 품고 잤다.

도란이는 새끼 젖을 일찍 떼는 편이었다. 그리고 젖 뗄 때가 되면 냉정하게 뗐다. 새끼들이 젖을 먹으려고 배를 파고들면 발로 밀어 떼어놓고 멀찌감치 피했다. 그러면 어린 새끼들이 그때 간신히 일어선 나약한 다리로 벌벌 기어서 에미 있는 곳을 찾아가건만, 도란이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멀찌감치 자리를 옮겨 앉는다.
도리는 물론 젖 떼는 것도 늦고, 밥도 먹게끔 자란 새끼들이 마른젖을 파고들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다정히 품어준다.
개들도 이렇게 에미 노릇 하는 방식이 다르니 우리 인간의 어머니 노릇도 얼마나 천차만별일까 짐작이 간다.
이렇게 쌀쌀맞은 도란이한테도 진한 모정이 있었다. 도란이가 겉으론 차가워 보이지만 속은 다른 개 못지 않게 따뜻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1991년에 도란이가 처음으로 난 새끼 셋을 아는 사람들한테 분양했다. 한 마리는 이웃한테 주었고, 다른 한 마리는 영화감독한테, 나머지 한 마리는 신문사 기자로 일하는 남편 대학 동창한테 주었다.
그런데 남편 동창은 강아지를 데려간 지 기르지 못하겠다며 세 달 만에 도로 가져 왔다. 남편 동창은 딸 둘을 두고 있었는데 유치원에 다니는 이 아이들이 강아지를 너무 못살게 굴어서 강아지가 적응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이 짓궂어서 딸을 둘을 두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강아지를 예뻐한답시고 주무르고 던지고 했던 것이다.

두 달만에 만난 모녀-강아지와 에미 도란이-는 서로 금세 알아보았다. 도란이는 새끼를 재회한 것이 무척이나 기쁜 듯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 방안을 돌아다녔다. 평소의 얌전하던 도란이와 영 딴판이었다. 새끼도 다시 만난 에미를 따라 방안을 빙빙 돌았다. 새끼는 이미 말라버린 에미젖을 파고들었고, 도란이는 그런 새끼를 조용히 품어 주었다. 그러다가는 모녀가 다시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애비인 도조는 자기 딸인지 뭔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도란이와 새끼가 노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따돌림당해 외토리가 된 어린아이같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새끼 이름을 ‘희수’라고 지어 주었다. 남편 동창 집에서는 ‘친친’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름을 부르면 새끼가 스트레스 받을까봐 다른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희수의 ‘희’자는 우리 집 개 2세대의 돌림자였다. 1세대인 ‘도’자 돌림의 부모가 나은 2세대는 모두 ‘희’자로 명명하기로 한 것이다. 그 첫번째 개가 말티스인 도담이와 시골 잡종 바둑이 사이에서 태어난 ‘희동’이고.
희수는 고통스러웠던 지난 세 달을 잊고 에미 도란이와 꿈같이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 도란이 역시 다시 만난 새끼와 놀아주며 하루하루 즐겁게 보냈다.

그러나 우리는 희수를 다른 데로 보내기로 했다. 그때 이미 우리 집엔 도롱이, 도리, 도란이, 도조, 희동이 이렇게 다섯 식구나 있었다. 이 녀석들을 건사하기도 힘든 판에 개가 한 마리 더 는다는 것은, 그것도 방안에서 키워야 하는 개가 늘어난다는 것은 보통 부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아지 키울 사람을 이곳저곳 알아보았더니 마침 내 직장 동료가 데려가 키우겠다고 하였다. 얼마 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홀로 계신 아버지가 적적해 하셔서 강아지라도 키우시라고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희수는 그 집으로 가게 됐다. 반포의 아파트에 사는 그 집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내 직장 동료인 딸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희수를 무척 귀여워해 주었다. 희수를 데려간 동료는 매일 나한테 희수  소식을 전해 주었고,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희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동료가 아버지한테 강아지를 드리면서 “얘 이름이 희수래요.” 하니까, 아버지가 “히쓰-. 히쓰-.” 하고 이름 뒷글자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는 얘기였다. 보통 애견가들이 강아지 이름을 영어로 지어 주니 동료의 아버지도 ‘희수’가 ‘히쓰’인 거로 알아들으신 모양이었다. 물론 희수는 그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희수를 보내고 난 뒤 한 도란이의 행동은 정말 눈물겨웠다. 딸이 없어진 허전함을 달랠 길 없는 듯, 자그만 헝겊인형을 자식처럼 여기며 애지중지 위했다. 어디 갈 때도 그 인형을 입에 물고 다니고, 잠 잘 때는 턱 밑에 받치고 잤다. 인형이 없어지면 헉헉거리며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고, 찾으면 턱 밑에 괴어 놓고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란이의 이런 증상은 두어 달 후 다음 발정기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 이후도 도란이는 여러 번 새끼를 낳았다. 함께 방안에 사는 요크셔테리어 도조의 새끼를 세 번이나 낳은 후 도조한테 불임수술을 시켜 발정기를 무사히 넘긴 적도 여러 번 있지만, 오줌 뉘러 마당에 내보냈다가 실수하여 다른 수컷과 교미를 하게 되는 경우가 몇 번 있어 새끼를 몇 번 더 낳았다.

우리는 도란이가 새끼를 안 갖게 일 년에 두 번씩 있는 발정기마다 무척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집에 수컷개가 많은 우리 집에서 새끼를 안 갖게 단속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도란이는 대소변을 반드시 마당에 나가서만 보는 터라 더욱 어려웠다. 하루 두세 번 마당으로 나가는 데, 그때마다 마당에서 놀고 있던 숫놈들을 개장 안으로 들여보내야 했다. 수컷들이 개장 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안심할 일도 아니었다. 암컷들의 발정기 때면 수컷들도 필사적이어서 개장의 철창을 뚫고 나와 ‘성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 암컷들의 발정기만 되면 우리 집은 몹시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수컷들이 사정사정하는 목소리로 짖어대거나 끙끙거리기 때문이다. 이때는 수컷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시비를 붙고는 사생결단하듯이 물며 싸워댔다. 그래서 사람들까지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도란이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리는 임신이 안되도록 더욱 조심했다. 노산을 하게 되면 산견의 생명도 위태롭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조심을 했는데도 2년 전, 나이가 만 여섯 살이 되어가던 1996년 초여름, 도란이가 또 임신을 했다. 우리는 도란이를 잃을까봐 무척 걱정이 됐다. 그래서 먹이에 신경을 각별히 써서 도란이가 기력을 잃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개의 나이 만 6세면, 노인 축에 끼이는 나이라더니 맞는 듯했다. 도란이는 사산을 하고 말았다. 제 날짜를 채워서 낳는데도, 새끼들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된 채 밖으로 나왔다. 세 마리가 모두 죽은 상태였다.

우리는 산모가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며 죽은 새끼들을 신문지에 싸서 산에다 묻었다. 그런데 도란이가 문제였다. 출산 직후라 피가 뚝뚝 흐르는 몸으로 이 방 저 방, 이 구석 저 구석 새끼를 찾아 헤맸다. 새끼가 어디 숨어 있기라도 한 듯.
“이 바보야, 니 새끼는 이미 다 죽었어. 저기 산에다 묻었단 말이야.”
우리는 이렇게 말하며 도란이를 달랬지만, 도란이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도란이는 한나절을 밥도 안먹고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부리나케 새끼들을 찾아헤매더니, 드디어 새끼를 찾아냈다. 속에 방울이 들어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빨간 색의 작은 고무공이었다.
도란이는 그걸 물고 다니다가, 핥아 주었다가, 품에 품었다가, 턱 밑에 괴었다가 하면서 새끼 잃은 허전함을 달랬다. 침대에서 자다가 잘못 건드려서 공이 굴러 떨어지면 소스라치게 놀라 공을 주우러 갔고, 어떻게 하나 보려고 우리가 일부러 공을 빼앗아 숨겨두면 불안한 눈을 굴리며 정신없이 찾아다녔다. 밥을 먹다가도 공이 별일없이 옆에 있나 확인했고, 마당에서 오줌을 누고 들어오면 공부터 입에 물었다.
새끼 젖을 뗄 무렵이 되어서야 도란이는 빨간 공 새끼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개들의 모정도 무척 깊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깊은속을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 몇 가지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도란이는 그후로도 발정기에 임신을 못하고 넘길 경우에도 한동안 빨간 공을 물고 다녔다. 임신해서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모정이 발동되는 듯했다.
도란이가 임신을 못하고 발정기를 넘길 무렵에 나타나는 특이한 증상이 또 있다. 함께 방안에 사는 도조의 털을 혀로 핧다가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 끊어내는 것이다. 그럴 때면 도조는 도란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누워 있곤 했다. 이런 일은 매번 발정기 때마다 반복되었다.
이후로도 빨간 공은 도란이가 에미가 못돼 허전할 때마다 새끼 노릇을 해주었고, 도란이가 빨간 공을 물고 다니느라 딸랑딸랑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도란이 또 외로운가 보구나” 하면서 마음 아파하곤 했다.
이제 도란이 나이 만 여덟 살. 지난 가을과 올봄엔 멘스도 없이 발정기를 넘겼다. 이젠 도란이 임신 때문에 신경 안써도 되겠구나 하고 안심이 되는 한편, 멘스도 거를 정도로 늙어버린 도란이를 보는 가슴 한 구석이 미어져 온다.*

- 도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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