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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도반이의 과거

도반이의 과거

“과거를 묻지 마세요”란 구슬픈 옛가요가 있다. 얼마나 서글픈 과거였으면, 얼마나 처절한 과겨였길래 묻지 말라고 했을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우리집에서 가장 더러운 개. 다른 개들은 목욕도 자주 하고, 이발도 자주 해서 다들 말끔한데 이 녀석만은 누구도 감히 이발을 시킬 수가 없다. 이발 한 번 끝내려면 대여섯 번은 물려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방치한다. 그러다 보니 빨지 않은 걸레처럼 녀석은 언제나 지저분하다. 아이고, 창피해. 깔끔한 내 성미하고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도반이는 과연 어땠기에 저렇게 ‘문제견’이 되었을까? 이 또한 우리의 궁금사항이었다. 커튼집에서 홀대받으며 산 것까지는 알고, 주인을 여럿 거쳐 왔다는 것은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주인한테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궁금증이 한꺼번에 풀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반이가 우리 집에 온 지 2년이나 3년쯤 되었을 때니까, 1995년이었을 것이다. 도반이는 지금도 요주의 견공이지만, 그때는 더 했다.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을 경계하고, 서투르면 물고, 그러던 때였다.
우리 옆에 추리작가 한 분과, 그 분의 천리안 바둑동호회 친구 한 분, 이렇게 두 분이서 집필실 겸 별장을 함께 짓고 살았다. 작가는 가족이 서울에 있고, 그분만 매일 거기서 기거했고, 함께 지은 동호회 분은 주말에 가족들을 데리고 내려와 놀다 가곤 하였다.
그 옆집 작가의 집에는 서울 손님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음식을 많이 해서 남는 경우가 많아, 남는 음식은 주로 우리 집 개들한테 주었다. 그러니, 옆집에 손님만 오면 우리 개들이 나서서 더 좋아라 했다. 특히, 우리 집은 채식을 위주로 해서 맛난 음식이 별로 없는데, 그분 댁은 끼마다 육식이 빠지지 않으니, 더더욱 좋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식구도 다들 채식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 가끔 고기도 구워 먹고 그러고 싶지만, 실은 이 녀석들 때문에 자주 먹지를 못한다. 옆에서 어떻게나 침을 흘리며 쳐다보는지, 녀석들 쳐다보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차마 목구멍에 고기가 넘어가질 않는다.
“야, 남 뭐 먹는 데 쳐다보는 게 제일 치사한 거라더라.”
이렇게 말해도 소용없었다. 우리가 먹고 있는 양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정 급하면 입 속에 들어간 것까지 꺼내달라는 식으로 입 언저리까지 혀를 낼름거리며 달라고 한다. 그러니, 먹고 있는 우리가 치사한 기분이 들어서 아예 고기 자체를 잘 안먹게 되었다. 어쩌다가 계란 요리를 해도 그렇고, 맛살이나 어묵 등을 먹어도 그런다.

그런, 옆집에 그날도 손님이 왔다. 40대 중반의 미모의 여류작가였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도반이가, 그 고독하고 성질 더러워서 남하고 잘 사귀지도 못하는 도반이가, 그 여류 작가의 품에 떡 하니 안겨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 나는 그 장면을 목격하지는 못했는데, 그 집 주인이 와서 얘기를 해주어서 알았다. 자기가 십년을 감수했다는 것이었다. 도반이가 여류 작가한테 안겨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일 났구나, 했다는 것이었다. 저러다가 물면 어떻게 하나 하고 머리털이 쭈빗 서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여류작가한테, 그 개 무는 개라고 말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해서 놀라서 이상한 행동이라도 하다 보면 긁어 부스럼이라고 오히려 안 물릴 것도 물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참 후, 여류 작가가 도반이를 품에서 내려놓은 다음에야 추리작가는 도반이가 어떤 녀석인지 설명을 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이 우리 집엘 놀러 왔다. 우리 집에서도 도반이는 여전히 여류 작가의 품에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안겼고, 여류 작가는 “물기는요, 얘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하면서 털이 더러운 도반이를 마다하지 않고 안아 주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섬찟한 광경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이 녀석, 내가 기르던 녀석 같아요.”
여류 작가는 도반이를 계속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맞아, 여기 봐. 배에 점이 있잖아요. 우리 강아지도 이랬어요.”
여류작가는 여유 있게 도반이의 배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맞아, 분명해. 바로 그 녀석이야.”
여류 작가는 도반이가 자기가 기르던 말티스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이 녀석을 데려왔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녀석을 사당동 커튼집에서 사 왔는데, 이름은 ‘통키’라고 하더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군요. 저는 우리 강아지를 인천에 있는 친척에게 주었는데, 이름은 달라요.”

지금 그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류 작가는 뭔가 이름을 가르쳐 주었었다. 그러면서 도반이인지 아닌지 모를 그 녀석을 어려서부터 아파트에서 길렀는데, 겁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주인인 자기는 잘 따랐는데, 그 작가의 아이들과는 잘 못 사귀어서, 툭하면 물고 그랬단다. 그래서 녀석의 버릇을 고치려고 애견 훈련센터에도 거금을 들여 보냈으나, 거기서도 어찌나 적응을 못하는지, 쫓겨왔다고 한다.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먹혀 들지를 않은 것이었다. 돌아와서는 더욱 성격이 모가 나서 아이들을 자꾸 물고 그래서 이젠 더 이상 기를 수 없다고 생각해 친척한테 보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내놓고 나서도 그분은 녀석이 안됐어서 글로도 여러 번 녀석 얘기를 썼다고 했다.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요. 이 녀석이 그 녀석인지 아닌지. 워낙 커서 정확히 알아볼 수가 없네요.”

여류 작가는 반가워하면서도 최종 확인을 해 봐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녀석이 그 녀석이라면, 자기 냄새를 맡고 알았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향수를 쓰고 또 같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녀석이 냄새로 알아봤을 거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날, 도반이는 우리의 우려가 무색하게 여류 작가의 품에 마치 엄마품처럼 편안하게 안겨 있다가 무사히, 물지 않고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샘이 날 지경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 작가한테서 전화가 왔다.
“맞아요, 도반이가 우리 강아지예요.”
여류 작가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준 인천 친척 댁에서 녀석 이름을 통키라고 지었대요. 그런데, 녀석이 하도 물고 말썽을 부려서 못 키우겠다고 다시 다른 친척 집에 주었대요. 그 집이 바로 사당동 커튼집이래요.”

흐이구, 짐작대로 도반이의 과거는 기구하고 파란만장했다. 그러나, 뿌리를 알고 나니 불쌍한 마음이 더 했다. 오죽했으면 애견 훈련센터에서도 퇴출당했을까... 도반이가 사나워서 문다고 생각하겠지만, 무는 개는 대부분 겁이 많아서라고 한다. 자기 방어 본능에 그러는 것이다. 거기다가 사람으로 치자면 내성적이고, 예민하고, 성격이 까다롭고, 이런 면도 있었을 것이다.
왜 도반이가 그 여류 작가의 집 아이들을 물게 되었는지 자세히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처음에는 뭔가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귀엽다고 정도 이상으로 귀찮게 굴거나, 장난으로 먹는 것을 빼앗거나 하는 일이 여러번 있었으면 그렇게 될 만도 하다.
그 여류 작가는 도반이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게 너무도 행복하다면서 가족들과 함께 도반이를 보러 용인에 자주 놀러오겠다고 하였다. 그 후, 가족들과 함께 오지는 못하고, 여류 작가 혼자서만 한 번 다녀갔다. 어쨌든 그분은, 그렇게도 마음에 걸렸던 도반이가, 우리 집에서 사랑 받으며 살고 있는 걸 보니 이제 마음이 놓인다며 기뻐했다.
우리 역시 도반이의 과거를 이렇게 묘한 우연으로 알게 된 것이 기뻤다. 그리고 도반이가 역시 영물스러운 녀석이라는 생각이 더욱 들면서 아끼는 마음도 더욱 커졌다.

오늘도 외출했다가 돌아오면서 도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되도록 엉덩이를 쭉 빼서 녀석과 거리를 두고 손만 내밀어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면 녀석은 잔뜩 경계하는 태도로 가만히 있다가, 그래도 사랑을 받는다는 게 기분 좋은지 뒷발을 여덟 팔 자로 깡충깡충 뛰어간다.
그러다가 다른 녀석들이 사랑 받겠다고 기어오르고 몸을 비비대고 하는 걸 멀찌감치서 지켜보다가는 저도 그래 봐야 겠다는 듯 슬며시 다가와 앞발을 반짝 들고 귀염을 떨기도 한다. 그러면 역시 나는 조심조심 안아준다. 건드리면 화내실세라, 만지면 물세라, 조심조심.
“아이구, 도반이는 이쁘기도 하다. 도반이가 세상에서 제일 착하지? 엄마가 도반이를 얼마나 사랑한다구. 아이구 착해라.”
오늘도 맘에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면서 도반이의 비위를 맞추었다. 더러운 털을 쓰다듬으면서. 어흐흐 살 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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