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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희동이와 도리의 불륜

희동이와 도리의 불륜

이번 글을 쓰기 위해서는 우리 집 개들의 가족 관계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

우리 집에 제일 먼저 온 녀석은 말티스 수컷 ‘도담’. 그 도담이가 혼자 있는 게 외로울 거 같아 입양해 온 동생이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 수컷인 ‘도롱’이다. 우리는 시골로 이사하면서 도담이의 배우자로 말티스 암컷인 ‘도란’이를 데려왔고 도롱이의 짝으로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 암컷인 ‘도리’를 데려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도담이는 민며느리처럼 생후 한 달 만에 들어온 아내 도란이와 신방도 치르지 못한 채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렇다고 대가 끊긴 것은 아니어서, 시골에 놀러 갔다가 우리 시댁에 사는 이름도 없는 잡견 바둑이를 건드린(?) 것이 성공(?)해 바둑이가 도담이의 유복자 셋을 낳았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났다면 유산 문제, 호적 문제, 감정 문제 등이 복잡하게 전개되겠지만, 개들의 세상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미도 새끼들 아비가 누군지 관심 없고, 자식들도 지들 아버지가 누군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편모 슬하에서 사생아로 자라면서도 문제견으로 자랄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둑이가 죽은 도담이의 새끼를 세 마리 낳았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우리는 시골로 내려가 그중에서 어미보다 도담이를 더 많이 닮은 녀석을 데려와 길렀다. 그 녀석이 말티스와 바둑이의 잡종 ‘희동’이다.
희동이는 앞의 글에서도 썼지만, 점잖고 신사다우며 용감하고 관대한 성품이다. 지 어미를 닮아서 털 색깔이 얼룩덜룩한 게 바둑이라서 그렇지, 얼굴이 믿음직스럽게 생기고 덩치도 듬직한 게 우리 나라의 토종견이라는 삽살개를 많이 닮았다.
다시 가족 관계로 돌아가면, 희동이는 도담이와 혼외 처 사이에서 나온 녀석이니, 도담이의 동생인 도롱이한테는 조카다. 즉, 도롱이는 희동이의 작은아버지고, 도롱이의 아내인 도리는 작은어머니인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작은엄마인 도리와 연하의 조카인 희동이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희동이가 성견이 되면서부터 희동이와 도리는 죽고못사는 사이가 되었다. 잠을 잘 때도 남편인 도롱이와 자지 않고, 희동이와 서로 붙어서 자고, 놀 때도 희동이하고만 놀았다. 희동이와 놀 때면 힝힝힝 콧소리를 내가며 그렇게 행복해 할 수가 없다. 작은엄마와 조카의 사랑이라니, 원 쯧쯧. 개들 세상이니 봐주자, 그래 눈 딱 감고 봐주자, 이러면서도 우리는 도리가 제 짝인 도롱이를 좋아했으면 하고 될 수 있으면 둘을 붙여 놓았는데, 도리는 도롱이한테는 영 뜨악해하고 희동이만 좋아했다. 물론 희동이도 도리를 지극정성 좋아했다.

관찰을 해보니 도리가 희동이를 더 좋아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도롱이는 얼굴도 잘 생기고 몸매도 사내다운데 하는 짓은 이기적이다. 먹을 것을 주면 누가 건드릴세라 으르렁거리고 경계하면서 저 혼자 다 차지하고 먹고, 남의 먹이까지 지가 먹으려고 이 그릇 저 그릇 왔다갔다하면서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욕심을 부린다. 아내인 도리의 먹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머리도 나쁘고 겁도 많다.
그러나, 희동이는 잡종이지만 머리도 좋고 용감하고, 양보심도 많다. 절대로 남의 먹이를 넘보지 않고, 먹을 것을 같은 그릇에 주면 도리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으면 먹고 안 남으면 포기하고 그랬다.
그러니 인간인 나라고 하더라도 혈통은 좋지만 욕심 많고 비겁한데다가 아내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도롱이보다, 비록 가문은 별로 안 좋지만 성품 좋고 매너 좋은 희동이를 택할 것 같다. 

그래도 부모 마음은 그게 아니어서, 될 수 있으면 정식 혼인을 맺은 짝끼리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개들의 사랑도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개도 이럴진대, 인간이야 오죽하랴. 지들끼리 좋다는 걸 부모나 친지가 억지로 떼어놓아서 될 일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개의 부모 노릇을 하면서 인간 부모의 역할도 배운 셈이었다.
무릇, 생명 가진 것들은 무한히 선택의 의지를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다 보니, 도리는 첫해에는 도롱이의 새끼를 가져 잉글리시 코카 순종을 낳았는데, 희동이가 성견이 된 다음해에는 그만 희동이 새끼를 낳고 말았다. 이때에 분명 도리가 도롱이와도 교미를 하고, 희동이와도 관계를 가졌는데, 이상하게도 도리가 낳은 새끼는 모두 희동이 새끼였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행위를 했어도 암컷이 사랑하는 수컷의 새끼만 선택적으로 임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일은 그후로도 계속되었으니, 우리의 의문이 생물학적으로 아니면 동물 심리 및 생리적으로 어떤 타당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여간 둘 사이가 얼마나 좋던지, 남편은 소설에 희동이와 도리의 실명을 쓰기도 했다. 양반집 하인과 계집종이 눈이 맞아서 도망가는 장면에서 하인 이름은 희동이로, 계집종 이름은 도리로 썼다.
얼룩덜룩 바둑이 희동이와 누렁이 도리 사이에서 나온 새끼들은 털 색깔이 신기했다. 어떤 녀석은 몸 전체가 새까만 털로 덮여 있고, 어떤 녀석은 하얀 색깔이었다. 그러니까 희동이한테는 섞여 있는 하얀 까만 털이 자식 대에서는 둘 중 한 가지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털의 길이는 아비인 희동이를 닮아 긴 녀석도 있었고, 어미인 도리를 닮아 짧은 녀석도 있었다. 털이 하얀 녀석은 자라면서 어미 털 색깔인 누런색으로 점점 변색되기도 했다.
귀도 아비 닮아 평범한 크기인 녀석도 있었고, 어미를 닮아 길이가 길고 귀털이 퍼머한 것처럼 꼬불꼬불한 녀석도 있었다. 얼굴도 어미와 아비의 특성 가운데 한두 가지씩을 나누어 갖고 태어났다.

우리는 암컷인 도란이, 도리가 새끼를 낳으면 개를 키우기를 원하는 이웃에게 분양하거나, 분양하다 못하면 애완견 센터에 팔았는데, 잡종을 낳으면 기르려는 사람도 없고, 사려는 사람도 없어 잡종을 생산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잡종을 낳으면 별수 없이 시장에 내다팔아야 하는데, 시장판에서 개를 사는 사람들이란 대부분이 보신탕용으로 기르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니 거기에 내다팔기는 정말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별수 없이 시장판으로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도리가 발정기에 들어서기만 하면 우리는 같은 종이고 정식 부부 사이인 도롱이와 도리를 개장 안에 넣어 놓고 희동이는 마당으로 내보냈다. 그러면 희동이는 발정 기간인 열흘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개장 안을 들여다보며 짖어댔다. 그러다가 도롱이와 도리의 교미가 성공하면, 희동이는 질투로 핏발이 서면서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로 짖어댔다.
가만히 앉아서 짖기만 할 희동이가 아니었다. 또, 가만히 갇혀서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본남편과 발정기를 보낼 도리도 아니었다. 도리는 끊임없이 개장 밖으로 나오려 시도하고, 희동이 또한 끈질기게 개장 안으로 들어가려 용을 쓴다. 급기야 도리나 희동이 중 하나가 개장의 굶은 쇠창살을 끊거나 넓혀서 진입 또는 진출에 성공한다. 그러면 로미오와 쥴리엣이 만나듯,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듯 둘이는 감격스럽게 만나 사랑을 나눈다.

지금 도리가 9세, 희동이가 8세. 성견이 되고 나서 일년에 두 번씩 발정기를 겪었으니, 도합 14번을 지냈다. 그 동안 이 불륜의 연인, 아니 연견(戀犬)과 주인인 우리는 발정기 때마다 온갖 신경전을 벌였다. 잡종 새끼를 갖게 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이유로 이들의 사랑을 막으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사료 줄 때 틈을 타서 나오고 들어가든, 쇠창살을 뚫거나 창살 기둥과 기둥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든 이 두 연견은 거의 매번 사랑을 성사시키고,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 새끼를 생산해 내 이 주인을 괴롭혔다.
그러다가 지지난해부터는 도리가 나이가 들어 임신을 할 경우, 노산으로 목숨까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수의사의 경고로 우리는 필사적으로 두 연견의 사랑을 막고 있다. 그러다가 실패해서 병원에 가서 비싼 낙태 주사를 맞히기도 했다. 교미 후 24시간 이내에 주사를 맞히면 착상 전이라 임신이 안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월경을 시작하고 발정기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또다시 두 연견의 사랑을 막기 위해 무려 보름 가까이 온갖 신경을 다 써야 했다. 으---.

요즘도 희동이와 도리는 서로 무척 좋아한다. 도롱이는 둘 사이에서 꾸어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처지로 지낸다. 게다가 도롱이의 나이가 들어 늙으면서 먹이를 더 잘 건사해 줄 필요가 있어 우리는 도롱이의 거처를 뒤꼍의 개장에서 앞 베란다로 옮겨 주었다. 그래서 도롱이와 도리 부부는 별거를 하게 되었다. 도롱이 도리 둘 다 아무런 미련없이 떠나보내고 떠나왔다.
희동이는 지금도 도리가 산책 나갔다가 안 들어오거나, 대문 밖에 나갔다가 문이 닫혀서 못 들어오면 컹컹 짖으면서 챙기는데, 도롱이는 그런 일에는 전혀 무관심하다. 이걸 보면 천생연분은 따로 있나 싶다.

지금 글을 쓰다가 잠시 밖에 나가서 보니, 희동이와 도리는 더운데도 등을 마주대고 곤히 잠들어 있다. 사이좋게. 도롱이는 현관 발판 위에서 혼자 옆으로 길게 누워 널브러져 자고 있다. 마누라가 정부와 놀아나는데도, 세상 모르고 편안하게.

   - 왼쪽이 잉글리쉬코커스파니엘 도리, 오른쪽이 말티즈 믹스견 희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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