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록의 힘/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길에서 만난 친구 도반

길에서 만난 친구 도반

우리 집 개들 얘기 쓰면서 가장 쓰고 싶었던 얘기가 길에서 만난 친구 도반이 얘기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우리 집 개 역사상 클라이맥스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      *      *      *      *

남편이나 나나 개한테 무척 약하다. 개가 묶여 있는 것만 봐도 마음 아파하고, 뜨거운 햇볕 아래 묶여 있으면 주인한테 그늘이라도 만들어 주라고 할까 어쩔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개밥에 파리가 드글거리는 걸 봐도 안쓰럽고, 목줄이 너무 짧게 매여 있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돌이 걸려 있는 듯 하루종일 가슴이 뻐근하다. 한 번은 안산에서 용인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개 한 마리가 중앙분리대에 웅크리고 앉아서 오도가도 못하고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다. 너무 빨리 달리던 터라 어찌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그때 길을 되돌아가서라도 그 개를 고속도로 밖으로 데려다 줄걸 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회하곤 한다.

한 달쯤 전에는 어떤 사무실을 찾아가느라 전철 신당역에서 내려 걸었다. 골목길을 잘못 찾아 중부 시장 안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그 안에 보신탕 골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가게 바로 앞엔 누런 개들이 좁은 철창에 갇혀 겁먹은 눈초리로 오가는 행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있으면 잡혀서 사람들 고기가 될 그 개들을 보며 지나가자니 역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개에 관한 글을 쓰면서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현을 자주 쓰게 되는데, 불쌍한 개들을 보면 이 말밖에 생각나는 게 없다. 말 그대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다.

그 보신탕 골목을 걸어가면서 눈이 마주친 수많은 개들, 고깃감이 될 날을 예견이라도 한 듯 겁먹고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 얼굴. 그런 세상이 내가 살고 있는 곳 지척에 있다는 걸 진작 알았으면서도 막상 보고 나니 그 광경이 며칠 동안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꿈속에까지 악몽이 되어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능력만 있다면 그 불쌍한 개들을 모두 사와서 함께 기르고 싶었지만, 이런 좋은 일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닌 듯 싶다. 이럴 때면 이런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분을 찾아가 “정말 존경한다”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개에 약한 나와 남편은 개 가운데서도 말티스 종한테는 더욱 마음이 약하다. 우리가 처음으로 기르다가 실패한 개가 말티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길에 말티스를 발견하면 넋을 잃고 쳐다보곤 한다. 그 말티스가 누군가의 집에서 행복하게 자라고 있으면 그런 대로, 대문간에 묶여 있으면 더욱, 목욕도 안한 채 털이 걸레처럼 더러워진 모습을 보면 더더욱 마음이 아프다. 아니, 말티스만 보면 그냥 마음이 아프다. 그런 우리한테 도반이가 나타난 것이다. 

1992년쯤이었다. 우리는 사당동 주택가에 사무실을 두고 원고집필회사 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함께 출근하며 일을 했는데, 주택가인지라 차들이 오가는 골목길에 개들이 두어 마리씩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늘 보는 예사로운 풍경이었다.
어느 비오는 늦여름 저녁, 주룩주룩 내리는 굵은 빗줄기 속을 자동차를 타고 골목길을 내려가는데 어느 집 대문간에 개 한 마리가 비를 흠뻑 맞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털이 북실북실한 말티스였다. 목욕한 지 몇 달이라도 지난 듯 하얀 색이어야 할 털빛이 회색이 되었고, 털을 빗긴 지도 오래 된 듯 잔뜩 뭉쳐 있었다. 녀석은 대문 밑에서 비를 그으며 아주 고독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는 그 집 개려니 하고 지나쳤다. 주인이 대문을 열어 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면서. 그러나, 녀석의 그 고독한 모습이 계속 머리 속에 짜안하게 남았다.

며칠 후, 우리는 또 빗속에서 녀석을 만났다. 녀석은 뒤에 비를 맞으며 골목길을 타달타달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깊이 하는지, 우리 차가 제 녀석 뒤를 바짝 따라가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의식했는지 길 한켠으로 비켜나면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예의, 그 고독한 표정이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관심을 가진 눈길, 누구하고도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외로운 얼굴이었다.
“어딜 그렇게 가니?”
차창을 열고 물어보자, 녀석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빤히 바라보더니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짜식, 거만하네.”
남편의 말대로 거만한 태도였다. 우리한테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분명 눈길이 마주치고 난 뒤였는데도 조금 전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후로도 우리는 사당동 골목길에서 녀석과 간간이 마주쳤다. 녀석은 늘 혼자였다. 다른 개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거나 함께 뒹굴며 놀곤 했는데, 녀석은 혼자서, 고독한 몸짓으로 늘 어딘가를 가고 있거나, 어떤 집의 대문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끔은 쓰레기통을 뒤져 뭔가 찾아먹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녀석의 행동으로 보아서, 처음에 마주쳤던 그 집 개는 아닌 듯싶었다. 그 골목 안 어느 집인가에 적을 두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듯, 항상 꾀죄죄하면서도 고독한 모습이었다. 남편과 나는 다른 집에 갔으면 애완견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했을 말티스가, 거리의 부랑아처럼 돌아다니는 게 마음 아파, 녀석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우리 집에도 개가 많으니 녀석까지 건사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난 어느 날, 퇴근을 하다가 남편과 나는 한동안 녀석을 보지 못한 게 기억이 났다.
“녀석, 어디 가서 굶어 죽은 건 아닐까?”
“골목길에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데 자동차 사고라도 난 건 아닌가 몰라?”
이렇게 상상하기 시작하니, 불쌍한 녀석을 모르는 체 방치해 둔 게 자꾸 후회가 되었다. 길 가면서 마주칠 때마다 보았던 장면 하나하나가 머리 속에 떠오르면서 마음이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우리가 데려다 기를 걸.”
남편과 나는 탄식을 하면서 녀석이 어딘가에 살아있기를 기원했다.

1993년 가을쯤이었다. 사무실에 가느라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문득 녀석이 생각났다. 불쌍한 녀석, 하면서 땅을 보고 걷던 시선을 드는데 바로 앞에서 녀석이 타달타달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반갑던지, 사람한테 인사를 하듯이 말을 건넸다.
“얘, 그 동안 어디 가 있었니? 궁금해서 혼났다.”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제 가던 길을 걸어갔다. 무슨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마침 남편이 있었다. 녀석을 만났다고 하자, 남편은 “그래?” 하면서 반색을 했다. 늘 녀석이 마음에 걸렸던 우리는 쉽게 합의했다. 우리가 키우자고. 더 이상 개의 숫자를 늘리지 말자는 약속을 깨고.

그날 이후 남편과 나는 녀석의 주인이 누군가 찾는 작업부터 했다.
“이 골목에서 배회하는 털이 북실한 하얀개 주인이 누군지 아세요? 왜 있잖아요, 성질 더러워 보이는 녀석 말예요.”
골목 안 구멍가게, 미용실, 약국 등에 물어보니까 녀석을 자주 보긴 봤는데 뉘집 개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미용실에 손님으로 온 사람이 녀석이 커튼집으로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미용실에서 스무 걸음쯤 떨어져 있는 집이었다.
그 집에 가서 녀석에 관해 묻자, “우리 통키요?” 하고 금세 대답했다. 전에는 가게가 넓어서 집안에서 키웠었는데, 가게가 좁아지는 바람에 개털이 날릴까봐 놓아 먹인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녀석-통키가 가게 안으로 쑥 들어왔다. 잿더미에서 뒹굴기라도 한 듯 지저분한 털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커튼을 만드느라 옷감을 잔뜩 늘어놓은 주인이 반길 리 없었다. 그래도 주인은 “이거 먹고 나가 놀라”면서 선반 위에 놓았던 햄을 한 조각 녀석에게 주었다. 녀석은 맛있게 받아먹고는 문가에서 서성거렸다.
“제가 데리고 가 길렀으면 좋겠는데, 파시겠어요?”
“그러시다면 좋지요.”
주인은 대번에 반색했다.
“그렇잖아도 통키한테 잘 해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했는데 잘됐네요.”
나는 녀석의 몸값으로 3만 원을 제시했고, 주인은 좀 섭섭한지 녀석을 싼 값에 파는 대신 녀석이 새끼를 낳게 되면 한 마리만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티스 암컷이 우리한테 있기는 하나, 될 수 있는 대로 새끼를 낳지 않게 하려 한다면서 그 부탁은 들어준다고 장담 못한다고 하였다. 솔직히, 우리 강아지를 데려다 주었다가 지금처럼 떠돌이개로 키우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주인한테서 알아낸 녀석에 대한 정보는 간단했다. 나이는 세 살쯤이고, 친척이 키우다가 준 거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멀리서 봐서도 알아봤듯이 수컷이었다. 녀석의 인도는 남편이 차를 갖고 왔을 때 받기로 했다.
거래에 대해 합의를 보자,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나한테 안길 듯이 달려들었다. 나는 근무 시간이라 옷을 더럽힐 수 없어서 원체 더러운 녀석을 온전히 안지는 못하고, 반쯤 안고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내 모습을 주인은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옷에 뭐가 묻을까봐 저러나?’
이렇게 짐작을 하면서도 이런 정도의 일로 짓는 표정치고는 좀 과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은 내가 커튼집 문을 나서자 저도 따라왔다.
“어디 가니?”
녀석은 이제까지와 달리 별로 경계하지 않고 나를 쭐래쭐래 따라왔다.
“나하고 함께 갈려구?”
그러기라도 하려는 듯 녀석은 내 옆에 바짝 붙어서서 보조를 같이 하며 걸었다.
“네 이름은, 음, 그래. 도반(道伴)이라고 짓자. 도반이가 무슨 뜻인 줄 아니? 함께 길을 가는 친구, 함께 도를 닦는 친구라는 뜻이야. 스님들이 함께 공부하는 스님들을 ‘도반’이라고 부른단다.”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귀를 기울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들어올래?”
현관문을 열며 권하자, 녀석은 자주 와 보기라도 한 곳인 양 서슴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계단을 걸어 사무실 안까지도 거리낌없이 들어왔다. 그러고는 직원들 책상, 하나하나마다 순시하듯 돌아보고 나더니 나가겠다는 듯 문쪽으로 갔다. 그래서 다시 나는 건물 현관까지 데리고 나가 녀석을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이따 저녁 때 데리러 갈 테니까 멀리 가지 말고 집에 가 있어야 한다!”
녀석은 알아들었다는 듯 쳐다보더니 다시 예의, 그  어딘가 중한 약속이라도 있는 듯 진지한 걸음걸이로 골목길을 걸어갔다.

퇴근길에 커튼집에 가보니 녀석이 안에 있었다. 주인은 녀석이 들어왔기에 다시 나갈까봐 붙잡아 두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내보내도 녀석이 안나갔을 걸요? 나하고 약속했거든요.’ 하면서 웃었다.
남편은 운전을 하고 나는 옷을 버릴 셈치고 녀석을 안고 뒷좌석에 탔다. 우리 차는 그때 새로 산 지 얼마 안돼 무척 깨끗한 상태였는데, 지저분한 녀석을 안고 타니, 커튼집 주인은 퍽이나 민망한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도반이를 목욕탕으로 안고 들어갔다. 더러운 몸부터 깨끗이 씻어주자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물을 끼얹고 비누칠을 하는 순간, 도반이는 허연 이빨을 있는 대로 드러내더니 내 팔뚝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깊이 물었던지, 피부에 커다란 구멍이 나고 거기서는 피가 용솟음치듯 솟아나와 철철 흘러내렸다. 너무도 놀라고 아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보, 나 이 녀석한테 물렸어. 약 좀 바를 테니 당신이 목욕시켜.”
나는 남편한테 도반이를 인계해 주고 약상자를 찾아 물린 부위를 소독했다.
“어이쿠, 이 녀석이?”
얼마 후, 남편도 도반이한테 물려서 피를 흘리며 나타났다.
“원, 세상에. 저 녀석이 무는 개잖아?”
물지 않는 개가 어디 있겠냐만은, 애완견이 별 해코지도 안했는데 주인을 고의적으로 무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전에 도롱이한테 물린 적도 있지만, 그때는 녀석이 싸움중이라 흥분해서 나인지 아닌지 분간을 못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반이는 나인 줄 뻔히 알면서 물은 것이다.
“아, 그래서 커튼집 주인이 그런 눈으로 바라보았구나.”
내가 녀석을 처음 안았을 때, 도반이의 전주인이 짓던 영 불안한 표정의 진의를 그제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반이는 이제까지 친숙했던 것과 다르게 목욕탕 한구석에서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려고만 해도 금세 물 자세를 하고 공포의 허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또 물까봐 접근도 못할 지경이었다.
“큰일이네. 무는 개를 앞으로 어찌 키운담?”
“도로 데려다 줘야 할까봐. 저러다 녀석이 우리 딸까지 무는 거 아냐?”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 만화가 이 선생 집에 떼강도가 들어 이 선생의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 집은 이 선생 댁과 교분이 깊어 집안 사정을 잘 안다. 돌아가신 그 할머니는 참으로 기구하게 사시던 분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작은집의 맏이를 양자로 들여와 키웠고, 그 많은 연세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분이었다. 그런 그분을 칼로 찔러 죽인 강도, 그것도 그 집뿐만 아니라 여러 집에 들어가 돈을 빼앗고 사람을 죽인 그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분노가 치밀었다. 저들도 인간인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강도들이 잡히자, 개그맨 주병진 씨가 그들을 인터뷰하러 갔다.
세상에, 그들도 사람이었다! 그것도 언뜻 보아서는 이웃에서 흔히 만나는, 얼굴선도 곱고 목소리도 변성기를 채 벗어나지 못한 청소년이었다.
그날, 방송에서 나는 그들이 사람이었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에 놀랐고, 또 한 번 놀란 일이 있다. 그들 부모가 자식을 만나고 돌아가면서 한 말이었다.
“그래도, 아빠는 너를 사랑한다.”
그 살인강도 청소년 가운데 한 소년의 아버지는 이렇게 피를 토하듯 말하고 쓸쓸히 돌아섰다. 어린 나이에 사형을 당할지도 모를 자식, 운이 좋더라도 평생 감옥살이를 할 자식,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며 심지어 나 같은 사람의 경우,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생각했든 그 자식을, 그 아빠는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나한테 커다란 충격이었다.

도반이를 대하는 우리 마음도 그 살인강도 소년의 아버지의 마음과 비슷했었다. 비록 주인(우린 부모라고 한다)을 무는 개라 할지라도, 성격이 비뚤고 문제가 많다 해도, 도반이도 우리가 데려온 그 순간부터 우리 자식이었던 것이다. 자식이 미운 짓을 한다고 하여 버릴 수 있겠는가? 몸이 어디가 부실하다고 남에게 맡기겠는가? 부족해도 내 자식은 내 자식이고, 과해도 내 자식이고, 비뚤어졌어도 내 자식인 것이다. 자식은 어디까지나 자식인 것이다. 못나면 못난 대로, 잘나면 잘 난 대로 사랑하는 게 부모의 도리인 것이다.
녀석을 도로 주어 버릴까 하는 마음은 잠시뿐이었다. 우리는 녀석을 사랑으로 거두기로 했다. 부모의 마음으로 키우기로 했다.

도반이가 왜 그렇게 사나워졌는가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이해할 수 있었다. 도반이의 삶은 어찌 보면 가정환경이 나빠서 비행청소년이 된 아이들과 비슷했다.
우선, 도반이는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도반이를 사왔던 커튼집 주인 말을 듣자하니, 자기네도 처음부터 기른 것이 아니라, 인천에 사는 친척집에서 데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도반이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도반이는 들개처럼 밖에서 혼자 떠돌며 지내야 했다. 커튼집 주인이 가게 안에 들어오면 털 날리거나 지저분하게 해서 커튼 만들 재료인 원단을 더럽힐까봐 밖으로 내쫓았으니, 우리가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일정한 거처 없이 골목을 쏘다니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먹는 게 일정치 않았던 듯했다. 주인이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듯, 우리는 도반이가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자주 봤다.
이런 사정이니 녀석이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으려도 비뚤어지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게다가 도반이의 성격 특성을 살펴보니 다른 개들보다 겁이 많았다. 도반이는 말티스이긴 하나 순종이 아닌 듯, 잉글리쉬 코카스파니엘만큼 덩치가 큰데, 우리 집 개들 중에서 제일 처진다. 깩깩깩깩 짖는 소리만 요란하지, 싸움이 일어나면 도망가기 일쑤다. 다른 개들이 위협을 하면 꽁지가 빠져라 내뺀다. 저보다 덩치가 훨씬 적은 요크셔테리어하고도 맞서 싸우질 못한다.
그러니까 도반이가 이런 겁쟁이라서 저를 보호하겠다는 방어본능에서 사람을 무는 듯 싶었다.

그리고 도반이는 눈치가 빨랐다.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을 정도로 영리했다. 그러니 저 사람이 나한테 이로운 일을 하려는 것인지 해로운 일을 하려는 것인지를 빤히 안다.
도반이가 무는 때는 주로, 누군가 제 먹이를 건드릴 때, 제 흉볼 때다. 개가 무슨 흉보는 걸 알아듣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녀석은 정말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을 때가 많다. 가령, 녀석이 뉘집 잿더미를 쑤시고 왔는지 얼굴이 지저분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너는 얼굴이 왜 그렇게 지저분하니?” 하고 묻기라도 할라치면, 벌써 윗입술이 위로 치켜올라가면서 허연 이를 드러낸다. 조금만 더 잘못하면 꼼짝없이 물리는 것이다. “쟤는 왜 성질이 저렇게 더러운가 몰라.” 이런 말을 해도 눈을 하얗게 흘기며 쪼려본다. 실제로, 녀석 흉을 보다가 물린 게 내가 한 번, 우리 어머니가 한 번, 그리고 손님으로 온 분 가운데 물릴 뻔했는데 두꺼운 구두를 신어서 무사했던 분이 한 번, 이렇게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세 번이다. 나는 녀석과 어느 정도 친해졌을 때, 녀석의 이빨을 들여다보며, “얜 웬이빨이 이렇게 지저분하지? 스케일링해야겠네.” 하다가 된통 물려서 피를 철철 흘린 적이 있다. 그것도 에버랜드 가다가 자동차 안에서... 엉엉.

그리고 도반이한테 물리는 다른 경우는 신체 접촉을 잘못했을 때다. 이 녀석은 누군가 제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극도로 공포스러워했다. 정말로, 녀석이 내가 처음에 저를 만나서 안아주었을 때 왜 안물었는지, 왜 그렇게 꼬리를 치며 내게 친근하게 굴었는지 도무지, 도대체, 도시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그때 물렸더라면 우리 식구가 안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보통 애완견들은 사람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고 더 기분 좋으면 두 발을 들면서 반기는데, 이 녀석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가까이 대면, 그 전까지만 해도 옆으로 살랑살랑거리며 왔다갔다 하던 꼬리가 딱 멈춘다. 그러고 온몸이 전투태세라도 갖추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이때 사람이 조금이라도 섣부른 짓을 하면 영락없이 물리는 것이다. 과도하게 쓰다듬거나, 흉을 보거나 하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면 온갖 아부를 다 떤다. 녀석한테는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겉1: 아이구, 도반이 착하지.
속1: 착하긴 뭘 착해. 너같이 성질 더러운 녀석은 첨
    봤다, 임마.

겉2: 도반이는 정말 예쁘게 생겼다.
속2: 으휴, 무서워. 성질 참 드럽게도 생겼네.
     (실제로 도반이는 코와 입매가 말 그대로 성질
     드럽게-더럽게가 아니라- 생겼다.)

겉3: 엄마(또는 아빠)는 도반이가 세상에서 젤 좋아.
속3: 으이구,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개한테까지 비위
     맞추고 살아야 하는 거야, 정말.

우리는 녀석을 ‘상처받은 영혼’이라 생각했다. 그런 녀석한테는 무한한 사랑만이 약이 될 터였다. 그래서 녀석이 아무리 우리를 물어도 사랑하고, 말썽을 부려도 사랑하고, 귀찮아도 사랑하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하기로 해서가 아니라, 도반이 자체가 물어도 말썽을 부려도 귀찮아도 사랑스러웠다. 무는 개지만, 도반인 도반이 나름대로 사랑스러웠다. 독특한 개성이 있기에 다른 개들보다 더 마음이 쓰이고 애틋한 정이 갔다.

이후에도 우리 집 식구는 녀석한테 여러 번 물렸다. 물릴 뻔한 것까지 합치면 더 엄청나다. 하여간, ‘제대로’ 물린 것만 열거를 해도, 나는 첫날 목욕 시키다가 한 번, 에버랜드에 털 미용해주러 가는 길에 이빨 지저분하다고 흉보다가 한 번, 안아주었다가 내려놓을 때 ‘불편하시게’ 했다고 한 번, 잔디에 앉아 있는데 녀석이 접근해서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할 때 밀치다가 한 번 해서 도합 네 번을 물렸다. 네 번 다 피가 철철 나도록 심하게 물린 것이었다. 한 번은 손을 물렸는데, 뼈가 보이도록 깊이 물어서, 상처가 아물고 나서도 그 흔적이 손등에 선명히 남아 있다.
남편도 목욕시키다가, 안아주다가 등등 두세 번 물렸다. 우리와 함께 사시는 친정어머니도 이쁘다고 머리 쓰다듬어주다가, 먹이를 주었다가 그릇 옮기다가 등등 서너 번 물렸다. 어린 우리 딸(지금 일곱 살이니, 네 다섯 살쯤에)까지도 녀석이 뭔가 ‘잡숫고’ 계시는 데 옆에서 신을 벗다가 발목을 물렸다.
“아무렴 인간이 개밥을 뺏어먹을 것 같으냐 임마?”
- 녀석 없을 때 욕 좀 하자.
그 성질 드러운 도반이 녀석이 어린 딸네미까지 물 때엔 증말, 증말 화가 났었다. 그러나 어쩌랴. 녀석도 자식인데.

도반이는 우리 식구뿐만 아니라, 손님도 과감히 물었다. 주로 흉보는 손님, 멋도 모르고 귀엽다고 쓰다듬다가 잘못 건드린 손님, 개라고 개 취급하며 발길질하는 손님이 물렸다. 쓰다듬다가 물린 소년은 그래도 도반이가 귀엽다고 그 이후로도 집에 놀러올 때면 뭔가 먹을 걸 갖다주곤 한다.
문다고 해서 털 하얀 녀석이 맨날 숯검댕이처럼 하고 다니는 꼴을 볼 수가 없어 목욕은 시켜야 했다. 그러니 자연히 녀석을 목욕시키는 일은 전투와 마찬가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물려도 상처는 나지 않게끔 중무장을 하고 녀석을 목욕시켰다. 우선, 한여름에도 두꺼운 파카 점퍼를 입는 것이다. 그리고 목장갑을 두 개나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을 덧낀 다음 목욕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장을 해도, 사실, 도반이의 허연 송곳니가 드러나면 몸이 오싹해졌다. 물리기 좋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이빨이 쑥 들어가지 않아 상처는 나지 않는다 해도 녀석한테 물리면 아프지 않을 리 있겠는가. 하다 못해 멍이라도 남을 것이었다.
따라서 목욕시키는 게 어설플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물을 뿌리고, 온갖 찬사를 퍼부으며 조심조심 등에 비누를 칠한다. 물론 공포의 허연 이가 있는 얼굴 부위는 아무리 세 겹으로 장갑을 끼었더라도 손을 얼씬도 하지 않는다. 대출 비누칠이 되면-물론 비누칠하는 동안도 끊임없이 눈치를 살펴야 한다- 또 멀찌감치서 물을 끼얹는다.

따뜻한 날씨에 이렇게 중무장을 하고 또 언제 물릴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에서 바싹 긴장한 채 목욕을 시키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진다. 그럴 때면 으이휴,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러나, 그래도 사람이 개보다 머리가 낫지 않은가? 해결책이 없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사용했다. 맨 먼저 한 일은 목욕을 하고 나면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건 남편이 목욕탕 안에서 몰래 하는 일이라 뭔지 잘 모르겠다. 하여간, 매번 뭔가 좋은 일을 해주니까, 요즘에는 도반이가 목욕하는 걸 즐거워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참고로, 도반이는 수컷이다.)

이러면서도 물릴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럴 때면 남편은 채찍, 정확히 말해 매를 썼다. 커다란 몽둥이를 갖다 놓고 도반이가 허연 이빨을 드러낼 때마다 호되게 때렸다. 이거야말로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라, 녀석을 위한 사랑의 매였다. 녀석이, 사람을 자꾸 물면, 우리 식구라면 그나마 괜찮은데, 남의 집 식구까지 자꾸 물다 보면 녀석한테 불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남편의 맛난 음식 작전, 뭔가 모를 묘한 방법, 그리고 사랑의 매로 도반이는 이제 목욕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게 되었다. 물론 남편한테만이다. 내가 시킨다면 어떻게 될지 몰라, 나는 아직도 도반이 목욕을 시키겠다고 ‘감히’ 나서지 못한다. 덕분에 도반이 털 깎는 거, 목욕시키는 거, 벼룩 잡아주는 거, 이런 건 모두 남편이 도맡고 있다. 다른 개들도 남편이 주로 손질을 하지만, 도반이는 전적으로 남편 소관이다.

도반이가 우리 집에 온 지 5년 가까이 돼 간다. 전에는 툭 하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물 자세를 취했는데, 지금은 그런 횟수가 무척 많이 줄어들었다. 애교도 많이 피워서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안아달라고 두 발을 들고 반기기도 한다. 그러나, 잘못 안았다가 물릴까봐 무서워서 우리 식구는 아주 조심조심 안아주었다가 얼른 내려놓곤 한다.
그러나 도반이는 여전히 다른 개들과 섞이지를 못한다. 처음 왔을 때, 큰개들과 함께 개장에 넣었는데, 어떻게나 울고불고 짖어대는지 개장에서 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굳이 현관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피워 별 수 없이 녀석의 침실을 현관으로 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주인도 무는 개가 현관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걸 외부 손님들이 알면 얼마나 썰렁할까? 우리 딸도 현관에서 신을 벗다가 밥을 빼앗는 것으로 오해를 사 녀석한테 물린 것이었다.

그 현관에 살면서 벨이 울리면 대문쪽으로 쫓아가 ‘죽어라 하고’ 짖어 대고, 대문밖에 있는 사람이 우리 집 식구면 현관쪽으로 달려와 빨리 나와서 문 열어 주라며 ‘자지러지게’ 짖어댄다. 방에서 사람이 나와 대문을 열어줄 때까지 대문과 현관 사이를 부리나케 뛰어다니며 열심히 짖어댄다.
도반이가 처음 오던 날, 까불었는지 잘난 척을 했는지 어쨌든 점잖은 희동이한테 가볍게 살짝 물렸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도반이는 희동이와 원수처럼 지낸다. 아마 그래서 개장 안에서는 못살겠다고 그렇게 울어대서 현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 같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개장문을 열어주고 녀석들이 넓은 마당에서 뛰어놀게끔 해주는데, 그럴 때마다 도반이는 희동이의 뒤를 쫓아다니며 ‘죽어라 하고’ 짖어댄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시끄럽고 자발스러운지, 방안에서도 전화 통화를 제대로 못할 지경이다. 마음이 너그러운 편이고 덩치도 도반이의 두 배 정도 되는 희동이는 도반이가 그렇게 귀찮게 굴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정 귀찮게 굴면, “왕왕왕” 하면서 쫓아가 무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도반이는 또 자지러지게 짖어대며 도망을 가다가 다시 와서 희동이 뒤를 쫓아다니며 짖어댄다.

어떤 때는 그렇게 짖다가 희동이 다리를 몰래 물기도 하는데, 그러면 희동이는 도반이가 물었다는 생각은 못하고, 평소 저와 라이벌 관계인,(아참, 이 얘기를 먼저 썼어야 하는데, 깜박 잊고 못썼다. 순서가 좀 바뀌었지만 다음 번에는 ‘도리와 희동이의 불륜’을 써야겠다.) 도롱이가 저를 문 것으로 ‘확신’하고 저만치 떨어져 있는 도롱이한테 냅다 달려가 와락 달겨든다. 그러다 보면 엉뚱하게 도롱이와 희동이 두 녀석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움을 벌이게 되곤 한다. 그 와중에도 도반이는 신나라 하고 짖어대며 틈만 보이면 희동이 다리를 물고, 희동이는 더욱 흥분해서 도롱이를 물고, 도롱이는 영문도 모르고 흥분해서 함께 싸우는 일이 반복된다. 여기에 역시 도롱이와 천적관계인 도조까지 합세하면 볼 만한 싸움거리가 된다. 도조는 도롱이를 싫어해서, 도반이가 희동이 쫓아다니듯 도롱이를 쫓아다니며 짖어대는데, 도조 역시 틈만 보이면 도롱이의 다리도 아닌 꼬리를 문다. 그러면 도롱이는 도조가 물었다는 건 꿈에도 생각 않고, 평소에 밉보였던 희동이가 물었다는 ‘확신’ 아래 희동이한테 달겨들어 싸움을 한다. 덩치 큰 도롱이 희동이가 멋도 모르고 얽혀서 싸우고 있으면, 뒤에서 도반이는 희동이 다리를, 도조는 도롱이 꼬리를 간간히 물면서 마구마구 짖어대 싸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그러다 보면 큰 녀석 둘이는 콧잔 등에, 귓바퀴에 전투의 흔적을 진하게 남길 때까지 치열하게 싸우곤 한다. 따라서 도롱이 희동이가 싸우는 걸 말리려면, 도조, 도반이를 떼어놓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도반이는 또 높은 데 올라가는 걸 좋아한다. 어디에서든 더 높은 곳이 있으면 그 곳에 올라가 앉는다. 우리 집 마당엔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을 놓았는데, 손님이 와서 우리가 그 의자에 빙 둘러 앉아 있으면 도반이는 냉큼 우리 무릎 위에 올라앉거나, 아예 테이블 위까지 펄쩍 뛰어올라가 앉아 있기도 한다.
또 우리 집 베란다엔 나무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는데, 도반이는 너비가 한 뼘밖에 안되는 그 좁은 난간 위에 올라가 엎드려 있는게 취미고, 거기서 자기까지 한다. 좀 키가 높은 화분이 있어 거기에 덩쿨 식물을 심었는데, 하필 그 화분이 베란다에 있는 물건 중 가장 높았다. 그러니 도반이가 좋아할 수밖에. 도반이 녀석이 매일 그 위에 올라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거나 잠을 자서, 그 생명력이 강한 덩쿨 식물이 모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녀석이 높은 곳을 좋아하는 것도 다른 개들보다 두려움, 공포가 많아서 그러리란 생각이 들어,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도반이는 또 특이한 것이 있다. 뛰는 모습이 다른 개들과 다르다. 다른 개들은 뛸 때면 뒷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들며 뛰는데, 도반이는 한 자 여덟 팔(八)자처럼, 두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리며 뛰어간다. 특히 기분 좋을 때면 그런 모습으로 팔짝팔짝 뛰어간다.

우리 집에 와 살아가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도반이의 괴팍하고 드러운 성질도 많이 나아져 가고 있다. 다른 개들하고 사이가 썩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 녀석이 대문 밖에 나갔을 때 문을 닫기라도 할라치면 금세 들어오겠다고 낑낑거리며 운다. 어떤 때는 녀석과 다른 개들이 함께 밖에 나갔다가 녀석이 안 들어온 걸 모르고 문을 잠그고 잔 날이 있는데, 잠을 자던 새벽녘에 남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꿈에 녀석이 대문 밖에서 울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밖에 나가보니 실제로 도반이가 거기에 울면서 서 있었다. 이 일을 겪고 남편은 도반이가 꿈에까지 나타나는 영물스런 녀석이라며 더 아꼈다.

다른 개들도 다 사랑스럽지만, 도반이는 다른 개들과는 또다른 감정을 유발시킨다. 측은함, 아픔, 그런 게 도반이란 이름과 함께 떠오르곤 한다. 요즘도 도반이는 혼자 걸을 때면 우리가 녀석을 처음 봤을 때의 그 모습, 고독한 행보이다. 인간이란 존재도,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친한 벗이 있고,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연인이 있다 하더라도 존재 그 자체는 고독하듯이, 도반이를 보면 개 역시 존재 그 자체는 고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도반이의 걸음걸이를 볼 때면 내 마음에도 ‘원초적’ 고독감이 밀려와 쓸쓸해지기도 한다. 존재 그 자체를 직면하고 서는 기분이 들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내가 작업을 하는 창 바로 앞의 베란다에는 나무로 테이블이 있다. 사방 90센티미터, 높이는 1.2미터 정도되는 작은 테이블인데, 요즘 날씨가 더워서인지, 그 테이블이 베란다에 있는 것 중 가장 높아서인지, 도반이는 요즘 주로 거기서 잠을 잔다. 그러다가 창문 안쪽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거나 공부하고 있는 나를 예의 그 쓸쓸하고 고독한 얼굴로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한다. 입 주변의 털은 늘 뭔가 묻어 지저분하다. 그러면 나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도반아, 뭘 봐? 뭐하는지 궁금해?” 하면 도반이는 짐짓 무표정으로 돌아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엎드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녀석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든가, 뭔가 맛인 거라도 갖고 있다가 주고 싶지만, 창문에 방충망을 해 놓아서 손을 뻗을 수가 없다. 시골이라 날벌레가 어찌나 많은지 방충망을 뜯을 수도 없는 실정이어서 이럴 때면 늘 아쉽다.

도반이도 벌써 아랫니가 빠지기 시작한다. 짐작컨대 녀석의 나이는 일곱 살이나 여덟 살 정도. 녀석한테 호되게 물릴 때면 저 공포의 이빨을 빼버려? 아니면 동물원 호랑이처럼 물려도 살에 구멍은 뚫리지 않게 갈아버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녀석이 나이가 들어서 이빨이 하나둘 빠지는 모습을 보니, 물려도 좋으니 이빨도 건강하게 몸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요즘 전문 카운슬러가 되기 위해서 대학원에서 상담교육을 전공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집단 상담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때 컴퓨터 통신의 아이디처럼 별도의 이름을 짓는다. 이때 나는 도반이란 이름을 쓰려고 한다. 이 단어에 ‘함께 길을 가는 친구’라는 뜻이 있어, 어떤 사람의 인간적 성장을 돕기 위해 도움을 주는 카운슬러라는 직업과 딱 들어맞기도 해서이기도 하지만, 문제아, 비행청소년 같은 우리 아들 도반이를 연상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현세 씨 댁 살인강도의 아버지처럼 못나고 나쁜 자식이라도 사랑하는 그 마음, 그 마음을 되새기기 위해서인 것이다.
주인도 무는 개이지만 그래도 도반이에게는 도반이 고유의 사랑스러움이 있고, 하나의 생명으로서 고귀함을 지니고 있다. 하물며 인간을 그에 댈까? 아무리 못되고 나쁜 짓을 한 인간이라도 하나의 생명으로서, 영혼으로서의 존귀함이 있는 것이다. 카운슬러가 될 사람으로서, 또 인간의 삶, 본성을 추구하고 묘사하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내 길을 제대로 가기 위하여 늘 ‘도반이’를 생각하며 누군가의 ‘도반’이 되자고 다지곤 한다. *

  - 왼쪽 위의 하얀 개가 도반이다. 말티즈 종으로, 이때는 미용한 지 얼마 안돼서 깨끗해 보인다.

얘는 미용하려면 항상 마취를 해야만 한다. 1995년 여름 같다. 이 사진은 여기 등장한 아이들이 모두 간 뒤에 모아놓은 것이다.


'기록의 힘 > 애견일기1 - 도담 도란 도조 도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동이와 도리의 불륜  (0) 2008.12.12
도반이의 과거   (0) 2008.12.12
눈물어린 모정   (0) 2008.12.12
외방울 도스   (0) 2008.12.12
도조는 쌍방울   (0) 2008.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