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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전원 이야기

철부지

 
전원 이야기 | 2007/10/17 (수) 11:23
철부지란 철이라는 우리말(節氣의 절을 세게 부르다가 우리말로 된 거지만)에 부지(不知)란 한자어가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철을 모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어도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가리킬 때 주로 쓴다.
 
그런데 이 철부지가 자연계에도 존재한다. 봄 철부지나 여름 철부지는 드물다. 다만 가을 철부지와 겨울 철부지가 있고, 이런 때에 문제가 된다. 가을 철부지가 가장 많은데 요 앞에 '이모작의 즐거움'이란 글에서 보이는 몇몇은 사실상 철부지다. 그래서 거기 언급되어 있는 식물은 빼고 적는다.
 
자연에서는 일년에 한번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진다. 인간 세상에서도 굵직굵직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숙청이 이루어지곤 하는데 별로 다를 게 없다. 육이오전쟁, 광주항쟁, 외환위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를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죽거나, 망하거나 큰 재난을 입는다.
이처럼 자연에서도 그런 사건이 있는데 태풍이나 가뭄, 장마, 전염병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해마다 반드시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숙청 작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가을 서리다. 겨울에는 더 차가운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지만 이미 죽을 거 다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라 별 상관이 없다. 다만 가을 서리는 멀쩡하게 푸릇푸릇 자라던 온갖 식물까지 한 날 한 시에 일제히 죽여버리는 게 특징이다.
 
전날 저녁 때까지 씩씩하게 푸른색을 자랑하며 자라던 것들이 서리가 내린 이튿날 마치 뜨거운 물에 데친 듯, 끓는 물에 삶은 듯 죽어 있는 걸 보면 자연이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 요즈음 우리집 마당과 동네에 출현한 철부지들을 보자.

 


30분 전에 동네를 산책하다가 활짝 핀 매화를 보고 카메라를 가져다가 찍었다. 가을이라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벼를 수확하기 전의 논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런 게 바로 철부지다. 봄과 가을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이렇게 꽃을 피운 것이다. 봄과 가을은 일교차도 비슷하고 낮온도와 밤온도도 비슷해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봄은 온도가 조금씩 상승하는 반면 가을은 온도가 조금씩 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이걸 가릴 줄 알면 철을 아는 것이요, 모르면 철부지가 된다. 다른 집 매화들은 대부분 꽃을 피우지 않았는데 이 집 매화만 미련하게 꽃을 피운 것이다. 봄에 필 때처럼 아름답지도 못하다.
 
가을걷이를 끝낸 밭을 들여다보면 냉이, 꽃다지, 쑥, 질경이, 씀바귀 등 온갖 식물이 다투어 나고 있다. 모두 철부지들이다.
물론 이중에는 교묘하게 짧은 가을을 이용하여 씨앗을 퍼뜨리는 것도 있다.

 

왼쪽 사진은 8월말 경 이른 여름에 피었던 봉숭아가 퍼뜨린 씨앗이 새로 싹을 터 자란 것이고, 오른쪽은 이것들이 오늘 아침에 피어 있는 모습이다. 이녀석들은 머리(세포 속에 생체시계가 다 들어 있으니 그게 머리다.)가 좋은지 더 키를 키우지 않고 재빨리 꽃을 피웠다. 아마 며칠이면 씨앗주머니가 생기고 곧 여물게 된다. 잘하면 서리가 내리기 전에 안전하게 씨앗을 땅에 떨어뜨리고 스스로 시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몇은 서리에 타 죽을 테지만. 봉숭아 뒤에 노랗게 피어 있는 것은 가을꽃 감국이다. 일부러 가을 봉숭아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감국을 배경으로 찍었다. 이 감국은 곧 따서 말려두었다가 겨울에 차로 마실 것이다.

봉숭아 뒤에 피어 있는 감국이다. 제철 꽃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감국 향기가 진동한다. 대문으로 드나들 때마다 여간 기쁘지 않다. 감국 향기를 맡고 있으면 행복하다. 앞에 매화집에서 토종벌을 일곱 통 기르는데, 이놈들이 낮에는 우리집으로 떼를 지어 달려와 마구 꿀을 따간다. 지금쯤 꽃을 따 말려야 향기와 당도가 좋은 국화차가 되는데, 이 손님들을 생각해서 며칠 기다릴란다. 내가 양보해야지.

이 감국은 서리가 내려도 죽지 않는다. 원래 가을꽃이기 때문에 웬만한 낮은 온도에서도 거뜬히 살아남는다.

 

감국 속에 홀로 피어 있는 다알리아 한 송이를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서리가 내리기 전 마지막 숨을 모아 피어난 것이다. 아마도 우리집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다알리아일 것이다. 서리가 내리면 줄기가 다 죽어버리는데, 그때 얼른 알뿌리를 캐어 따뜻한 곳에 보관해야만 한다. 다알리아 꽃 아래 잎이 넓은 것은 수세미인데, 아직 꽃을 피우고 작은 열매까지 맺고 있다. 노력할 때까지 노력하고, 서리가 내리면 그때 포기할 듯하다. 이미 다 자란 수세미는 제법 크고 길다랗지만 욕심을 그치지 않는다.

 

 봄에 피는 부겐베리아가 가을에 다시 피었다. 오른쪽은 왼쪽 사진 상단좌측부를 확대한 것이다. 봄에 필 때는 잎사귀가 없는 상태에서 꽃이 먼저 피는데, 가을에는 잎이 다 있는 가운데 피어났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방으로 들여와야 한다. 원래 태국이나 필리핀에서는 사철 피는 꽃인데, 어쩌다 이 먼 한국으로 이사 와 저도 고생을 한다.

 

- 이 사진만 봐서는 제주도 어디일 듯할 것이다. 하지만 앞에 매화가 핀 집 마당에 있는 귤나무다. 그대로 두면 이 나무는 철부지가 되지만, 지혜로운 인간은 이 나무를 곧 화분에 옮겨 집안으로 들여놓는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다시 밭에 내다 심는다. 일년 내내 화분에만 심어두면 실과가 이처럼 실하지 못하다. 이와 같은 농법으로 알로에, 석류 등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매실은 나무가 너무 커서 옮길 수가 없다. 지구 온난화가 더 심해지기를 기다려야 하나, 어쩌나.

 
철부지 식물을 감상하면서 인간 철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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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당을 자주 구경하다가 재미있는 관찰 결과를 얻었다.
오래도록 우리나라에서 살아온 토종 식물들은 10월 경이 되면 스스로 알아서 열매를 맺고 줄기를 말리거나 잎을 떨군다. 감나무, 복숭아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깨, 벼, 콩 등이 그러하다. 원래 이 철이 되면 서리가 내려 더 살지는 못하니 씨앗을 안전하게 뿌리고, 잎을 떨궈 생존하자는 본능으로 그렇게 진화한 듯하다.
 
그런데 원래 따뜻한 나라에 살다가 이사온 놈들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지금은 잠깐 춥지만 곧 따뜻해질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놈들은 서리가 내리는 그날까지 열심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야단스럽게 살아움직인다. 토종식물들이 조용히 겨울 준비를 할 때에도 이놈들은 부지런을 떤다. 열대식물인 고추를 보면 요즘에도 하얀 꽃을 피우느라 바쁘다. 수세미도 그렇고, 호박, 가지, 옥수수도 크느라고 바빠 철이 바뀌는 걸 모르는 것같다.
 
이 녀석들이 토종으로 귀화하려면 아마도 몇 백년은 걸릴 것이다. 수백년 전 제주도에 귀화한 손바닥선인장 같은 경우는 비록 열대기후에서 자라온 선인장이지만 제주 기후에 적응하여 웬만큼 낮은 온도에서도 죽지 않는다고 한다. 영하 10도 이하에서도 살아남는다고 하는 걸 보면 사람이나 식물이나 적응하고 변화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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