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란 철이라는 우리말(節氣의 절을 세게 부르다가 우리말로 된 거지만)에 부지(不知)란 한자어가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철을 모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어도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가리킬 때 주로 쓴다.
그런데 이 철부지가 자연계에도 존재한다. 봄 철부지나 여름 철부지는 드물다. 다만 가을 철부지와 겨울 철부지가 있고, 이런 때에 문제가 된다. 가을 철부지가 가장 많은데 요 앞에 '이모작의 즐거움'이란 글에서 보이는 몇몇은 사실상 철부지다. 그래서 거기 언급되어 있는 식물은 빼고 적는다.
자연에서는 일년에 한번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진다. 인간 세상에서도 굵직굵직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숙청이 이루어지곤 하는데 별로 다를 게 없다. 육이오전쟁, 광주항쟁, 외환위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를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죽거나, 망하거나 큰 재난을 입는다.
이처럼 자연에서도 그런 사건이 있는데 태풍이나 가뭄, 장마, 전염병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해마다 반드시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숙청 작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가을 서리다. 겨울에는 더 차가운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지만 이미 죽을 거 다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라 별 상관이 없다. 다만 가을 서리는 멀쩡하게 푸릇푸릇 자라던 온갖 식물까지 한 날 한 시에 일제히 죽여버리는 게 특징이다.
전날 저녁 때까지 씩씩하게 푸른색을 자랑하며 자라던 것들이 서리가 내린 이튿날 마치 뜨거운 물에 데친 듯, 끓는 물에 삶은 듯 죽어 있는 걸 보면 자연이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 요즈음 우리집 마당과 동네에 출현한 철부지들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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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전에 동네를 산책하다가 활짝 핀 매화를 보고 카메라를 가져다가 찍었다. 가을이라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벼를 수확하기 전의 논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런 게 바로 철부지다. 봄과 가을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이렇게 꽃을 피운 것이다. 봄과 가을은 일교차도 비슷하고 낮온도와 밤온도도 비슷해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봄은 온도가 조금씩 상승하는 반면 가을은 온도가 조금씩 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이걸 가릴 줄 알면 철을 아는 것이요, 모르면 철부지가 된다. 다른 집 매화들은 대부분 꽃을 피우지 않았는데 이 집 매화만 미련하게 꽃을 피운 것이다. 봄에 필 때처럼 아름답지도 못하다.
가을걷이를 끝낸 밭을 들여다보면 냉이, 꽃다지, 쑥, 질경이, 씀바귀 등 온갖 식물이 다투어 나고 있다. 모두 철부지들이다.
물론 이중에는 교묘하게 짧은 가을을 이용하여 씨앗을 퍼뜨리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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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 8월말 경 이른 여름에 피었던 봉숭아가 퍼뜨린 씨앗이 새로 싹을 터 자란 것이고, 오른쪽은 이것들이 오늘 아침에 피어 있는 모습이다. 이녀석들은 머리(세포 속에 생체시계가 다 들어 있으니 그게 머리다.)가 좋은지 더 키를 키우지 않고 재빨리 꽃을 피웠다. 아마 며칠이면 씨앗주머니가 생기고 곧 여물게 된다. 잘하면 서리가 내리기 전에 안전하게 씨앗을 땅에 떨어뜨리고 스스로 시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몇은 서리에 타 죽을 테지만. 봉숭아 뒤에 노랗게 피어 있는 것은 가을꽃 감국이다. 일부러 가을 봉숭아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감국을 배경으로 찍었다. 이 감국은 곧 따서 말려두었다가 겨울에 차로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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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뒤에 피어 있는 감국이다. 제철 꽃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감국 향기가 진동한다. 대문으로 드나들 때마다 여간 기쁘지 않다. 감국 향기를 맡고 있으면 행복하다. 앞에 매화집에서 토종벌을 일곱 통 기르는데, 이놈들이 낮에는 우리집으로 떼를 지어 달려와 마구 꿀을 따간다. 지금쯤 꽃을 따 말려야 향기와 당도가 좋은 국화차가 되는데, 이 손님들을 생각해서 며칠 기다릴란다. 내가 양보해야지.
이 감국은 서리가 내려도 죽지 않는다. 원래 가을꽃이기 때문에 웬만한 낮은 온도에서도 거뜬히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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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국 속에 홀로 피어 있는 다알리아 한 송이를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서리가 내리기 전 마지막 숨을 모아 피어난 것이다. 아마도 우리집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다알리아일 것이다. 서리가 내리면 줄기가 다 죽어버리는데, 그때 얼른 알뿌리를 캐어 따뜻한 곳에 보관해야만 한다. 다알리아 꽃 아래 잎이 넓은 것은 수세미인데, 아직 꽃을 피우고 작은 열매까지 맺고 있다. 노력할 때까지 노력하고, 서리가 내리면 그때 포기할 듯하다. 이미 다 자란 수세미는 제법 크고 길다랗지만 욕심을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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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피는 부겐베리아가 가을에 다시 피었다. 오른쪽은 왼쪽 사진 상단좌측부를 확대한 것이다. 봄에 필 때는 잎사귀가 없는 상태에서 꽃이 먼저 피는데, 가을에는 잎이 다 있는 가운데 피어났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방으로 들여와야 한다. 원래 태국이나 필리핀에서는 사철 피는 꽃인데, 어쩌다 이 먼 한국으로 이사 와 저도 고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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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진만 봐서는 제주도 어디일 듯할 것이다. 하지만 앞에 매화가 핀 집 마당에 있는 귤나무다. 그대로 두면 이 나무는 철부지가 되지만, 지혜로운 인간은 이 나무를 곧 화분에 옮겨 집안으로 들여놓는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다시 밭에 내다 심는다. 일년 내내 화분에만 심어두면 실과가 이처럼 실하지 못하다. 이와 같은 농법으로 알로에, 석류 등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매실은 나무가 너무 커서 옮길 수가 없다. 지구 온난화가 더 심해지기를 기다려야 하나, 어쩌나.
철부지 식물을 감상하면서 인간 철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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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당을 자주 구경하다가 재미있는 관찰 결과를 얻었다.
오래도록 우리나라에서 살아온 토종 식물들은 10월 경이 되면 스스로 알아서 열매를 맺고 줄기를 말리거나 잎을 떨군다. 감나무, 복숭아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깨, 벼, 콩 등이 그러하다. 원래 이 철이 되면 서리가 내려 더 살지는 못하니 씨앗을 안전하게 뿌리고, 잎을 떨궈 생존하자는 본능으로 그렇게 진화한 듯하다.
그런데 원래 따뜻한 나라에 살다가 이사온 놈들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지금은 잠깐 춥지만 곧 따뜻해질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놈들은 서리가 내리는 그날까지 열심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야단스럽게 살아움직인다. 토종식물들이 조용히 겨울 준비를 할 때에도 이놈들은 부지런을 떤다. 열대식물인 고추를 보면 요즘에도 하얀 꽃을 피우느라 바쁘다. 수세미도 그렇고, 호박, 가지, 옥수수도 크느라고 바빠 철이 바뀌는 걸 모르는 것같다.
이 녀석들이 토종으로 귀화하려면 아마도 몇 백년은 걸릴 것이다. 수백년 전 제주도에 귀화한 손바닥선인장 같은 경우는 비록 열대기후에서 자라온 선인장이지만 제주 기후에 적응하여 웬만큼 낮은 온도에서도 죽지 않는다고 한다. 영하 10도 이하에서도 살아남는다고 하는 걸 보면 사람이나 식물이나 적응하고 변화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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