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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전원 이야기

가을걷이

전원 이야기 | 2007/10/28 (일) 15:59
 
텃밭에 뭘 좀 심어기르는 것도 농사는 농사다. 그러다보니 모든 절차는 대농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네가 트랙터를 쓸 때 난 삽을 쓰고, 그네가 콤바인을 쓸  때 난 낫을 쓸 뿐 하는 일의 내용은 똑같다.
올해 가을걷이 대상은 고구마, 감국, 아주까리, 깨, 수세미, 호박, 가지, 배추, 무, 해바라기 정도다.
 
감국은 이웃집 벌들이 어찌나 맛있게 꿀을 따먹던지 그놈들 구경하다가 실기를 하여 많이 수확하지는 못했다. 뭐, 사실은 감국 향기를 맡고, 그 꽃을 아침마다 감상하느라 차일피일한 내 책임이 크다. 그래도 몇 사람이 겨우내 먹을만큼은 따서 말려두었다.

들깨는 털어보았는데, 워낙 소량이다보니 별 재미가 없다. 한 홉이나 될런지 모르겠다. 들기름에 오메가-3 지방산이 많다 하여 즐겨 먹는 편인데 참 아쉽다. 작년에는 한 되는 수확했는데, 올해에는 날씨가 안좋아 제대로 여물지 못한 탓이다. 또 들깨는 8월에 잎을 따 절이거나, 8월말쯤 순을 잡아 끓는 물에 데쳐 냉동실에 두었다 겨울에 무쳐먹으면 좋은데, 일이 바빠 챙기질 못했다. 지난 겨울에는 고추 순하고 들깨 순을 어찌나 맛있게 먹었던지 내년에 또 만들어 먹자고 다짐했건만, 알면서도 시간이 없어 못했다. 시골에 심은 들깨도 소출이 적어 올해에는 사먹을 수밖에 없다. 오메가-3 지방산을 보충한답시고 어유 캡슐을 몇 달 먹었다가 두 번이나 췌장염을 일으켜 병원 신세를 진 이후 식물성 아마인유나 들기름을 먹고 있는데, 아무래도 중국산 들기름이라도 사먹어야 될까 보다.
 
수세미는 비교적 풍성하게 거두었다. 작은 것은 따로 모아 잘게 썬 다음 설탕에 재워놓았다. 기침이 많이 날 때 먹으면 좋다고 하여 두 병을 만들어 두었는데, 올해 시험해 볼 참이다. 목이 안좋을 때 도라지청을 따끈한 물에 타먹으면 훨씬 나아지는 건 확실한데, 수세미도 좋은지는 아직 모르겠다. 작년에는 수세미 줄기에서 뽑은 수액이 좋다 하여 열 병 정도 만들어 절반은 아는 사람을 주고, 절반은 냉장고에 두고 조금씩 먹었는데, 아무것도 느낀 바가 없다. 집안에 환자가 계셔 이래저래 어수선하여 꾸준히 복용하지 못한 탓도 있으니, 올해 한번 더 시험해볼 참이다. 아직 서리가 온다는 말이 없어 여태 안했는데, 내일이나 모레쯤 줄기를 자르고, 수세미 수액을 받아야겠다.
익은 수세미는 시멘트바닥에 대고 툭툭 치면 섬유질만 남는데, 이걸 모았다가 부엌 수세미로 쓰든지 시골에 보내 된장담글 때 항아리 닦는 도구로 쓴다. 시골에서 생산하는 우리 된장은 '약선장'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내가 연구해서 지난 5년간 실험했다. 독이 약 150개쯤 되는데, 3백 개는 돼야 뭐가 될 것같다. 지금은 누가 팔라고 해도 자동차 기름값이 아까워 다녀오질 못한다.
 
해바라기는 올해 참 복잡하게 자랐다. 원래 거름을 많이 한 길옆에서 잘 자랐는데, 올해는 그 반대가 되었다. 잘 자라리라고 예상했던 놈들은 어찌나 비가 많이 오는지 절반은 비맞아 죽어버렸다. 무슨 식물이든 밭작물은 물이 잘 빠져야 잘 자라는데, 올해같이 비가 많이 와서 뿌리가 온통 물에 잠긴 시간이 많을 때는 병이 들든지 썩든지 죽어버린다. 해바라기를 스무 포기쯤 심었는데, 열 포기가 이렇게 죽어버리고, 나머지 열 포기가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열매 달린 걸 보니 여간 시원찮은 게 아니다. 거름 아무리 주어도 비 많이 오면 별 수가 없다.
다만 기적같은 일이 대문앞에서 일어났다. 원래 이곳은 석별이라고 하는 굵은 모래땅인데, 거름을 줘도 숭숭 빠져나가 뭘 심어도 잘 자라지 못하는 곳이다. 형식상 퇴비를 한 삽씩 떠다 놓고 남는 해바리가 모종을 버리기 아까워 여기 심었는데, 원래 이놈들은 비실비실 자라다가 키가 1미터쯤 되면 얼른 꽃을 피우고 대충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았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이놈들은 물이 잘 빠지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아무 피해를 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원래 천둥치고 번개치는 날에 내리는 비는 비료를 물에 탄 것처럼 좋은 거름이 되는 법인데, 이놈들이 아질산이 풍부한 이 빗물을 많이 받아먹은 탓에 키가 쑥쑥 자라더니 키가 3미터 넘게 자라고, 얼굴을 올려다보니 세숫대야만큼 크다. 이런 걸 일컬어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하는 것이다. 주인이 아무 신경조차 쓰지 않았건만 저절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버리기 아까워 문밖에 심어두었던 해바라기 네 포기가 어찌나 실하게 열리는지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놈들에 비하면 밭에 자리 잡고 비싼 거름 먹은 놈들 꼴은 정말 꼴같잖다. 그래도 수해와 병마를 이기고 살아남아 꾸역꾸역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걸 보면 대견하긴 하지만 대문밖 놈들이 워낙 미끈하다보니 참 못나 보인다.
 
호박하고 가지는 서리가 내리기 전에 일제히 손을 보아야 한다. 호박잎을 따고, 순을 잡아 끓는 물에 데쳐 두면 이 역시 겨울 식량으로 좋다. 호박이나 가지는 어서 따서 면이 둥글도록 얇게 썰어 햇빛 좋을 때 말려야 한다. 늙은호박은 그냥 따다 구석에 놓으면 잘 썩지 않아서 봄이 될 때까지 버티는데, 때를 보아 고아 먹으면 좋다.
 
아주까리는 아직 절반밖에 익지 않아 더 기다리는 중이다. 연한 잎이나 따서 둘까 싶은데, 아주까리 잎을 먹는 사람이 드물어 여름철에나 조금 먹어볼 뿐 겨울철까지 찾고 싶은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어디 쓸 때가 꼭 있어 심은 건 아니고, 앞에서 말한대로 된장독에 모래구멍이 나서 샐 때 바르려고 심었는데 너무 잘 자랐을 뿐이다. 열 포기쯤 심었는데 한 말은 될 것같다. 용처를 빨리 알아봐야지 아니면 그냥 썩힐지 모르겠다.
 
배추, 무는 열심히 자라는 중이다. 임신한 아줌마처럼 불룩불룩 배를 내밀고 자라는 배추를 보면 언제나 든든하다. 친구네하고 김장하려고 50포기를 심었는데, 동네 할머니가 남은 모종이라고 30포기를 더 갖다주어 또 심었더니 80포기나 된다. 아침에 일어나 이놈들 사열을 할 때마다 참 행복하다. 큰 놈을 줄로 묶을 때는 뚱뚱한 아줌마를 껴안고 씨름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데 무가 좀 실망스럽다. 무는 잘 자라는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열다섯 개밖에 안된다. 원래 무를 많이 심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일이 바빠 서울을 나간다, 손님을 만난다 하여 무씨를 살 기회를 놓쳐 집안에 있던 묵은 씨를 마지막으로 남은 좁은 땅에 아무렇게나 뿌렸는데, 그만 다 나버렸다. 하지만 이미 손바닥만한 틈만 있어도 골파씨를 심어둔 뒤라 무는 솎고 또 솎아 결국 열다섯 개만 기르게 되었다.(무는 심은 그대로 길러야지 옮겨심기가 잘 안된다.) 안성 그 할머니가 골파씨를 잔뜩 안겨주지만 않았어도 무를 50개는 심는 건데, 아쉽다. 뭐, 할머니 덕분에 맛있는 파김치를 물리도록 먹고 있지만 이 인간은 또 욕심이 난다.


위에는 배추와 무, 아래는 부분 확대. 바라만 봐도 입맛이 돈다. 배추 잎에 구멍이 난 게 보이는데, 집없는달팽이하고, 집달팽이가 주로 먹은 자국이다.
오, 이제 고구마 이야기를 할 차례다. 올해 농사 중에 가장 성공한 것을 들라면 나는 기꺼이 고구마를 들 것이다. 고구마를 심기 전에 땅을 파고 거름을 넉넉히 낸 다음 비닐을 씌웠다. 그게 5월 초인데, 그 날씨에 열흘쯤 그냥 묵혀두었다. 그러면 거름이 흙속에 잘 배든다. 덜 썩은 놈은 그러면서 푹 썩는다. 그런 다음에 고구마 줄기를 사다가 20센티미터 간격으로 심었다.
작년에는 닭들이 비닐을 다 찢어놓아 농사를 망쳤다고 생각하여 닭장 놀이터와 텃밭 경계에 DMZ같은 철책을 둘렀다. 그러고는 10월말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 사이 고구마 줄기를 가지고 김치도 담그고, 그걸 말려두기도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10월 29일에 캤다. 캐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렸는데, 이 두 시간 동안 참 행복했다. 하늘은 웬일로 이렇게 큰 복을 주시나,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구마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동안 사실 주인인 나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아니, 고구마는 나 따위 도움을 바라지도 않고, 실제 자라는 과정에서 인간의 도움은 필요하지도 않다. 그냥 알아서 자란다. 알아서 햇빛이 나고, 알아서 비가 오고, 땅속에서는 품삯도 받지 않는 일꾼인 지렁이들이 열심히 거름을 생산해주었다. 난 마지막으로 호미를 쳐들었을 뿐이다. 하늘은 내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토록 풍성한 먹을거리를 내려주시는가 모르겠다.
박스를 내어 담으며 하나는 대구에 보내고, 하나는 김해로 보내기로 했다. 우리 식구 먹을 고구마는 두 박스가 남고, 또 시골에 심은 게 한 자루 큰 걸로 있으니 따로 사먹을 필요는 없을 것같다.
- 위에 덮인 흙을 살짝 벗기니 이렇게 멋진 고구마가 보인다. 고구마 캔 날 내 점심 상이다. 아래부터 잡곡밥과 미역국, 위에 머위줄기무침, 김치, 호박국, 맨위에 민들레와 향채 무침, 고구마 줄기 무침이다. 고구마, 향채, 민들레, 호박은 이 날 마당에서 채취한 것이고, 머위줄기는 시골에서 따온 것이고, 밥에 넣은 강낭콩은 내가 기른 것이다.

- 기왕 밥상을 보여줬으니 한 컷 더. 이건 봄에 봄나물로 차린 밥상이다. 나물 말고는 된장찌개 뿐이다. 나물은 일곱가지인데 산과 들에서 채취한 것이다.
 
가을걷이는 밭에 내다 심었던 알로에를 뽑아 화분에 옮겨 집안으로 들이고, 밖에 내놓았던 차나무, 비겐베리아, 귤나무, 선인장 따위를 안으로 옮기는 것으로 대략 끝났다. 아직 거두지 못한 게 있는데, 며칠 더 봐야겠다. 서리가 언제 내리느냐에 따라 거두는 시기가 결정되는 것들이다. 또 상추 몇 포기를 화분에 옮겨 안으로 들이는 것도 서리가 내리기 전 날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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