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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다산 정약용과 포은 정몽주의 무덤을 비교하다

내가 사는 경기도 용인에서는 해마다 거액의 예산을 들여 포은문화제를 개최한다.

난 용인시민들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이 행사를 따져보았다. 만일 정몽주가 용인 출신이라면 이 고장의 대표인물이라고 내세워볼만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경상도 영천 출신으로 출사 이후로는 주로 개성에서 살았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용인과는 인연이 없다. 그 흔한 전설이나 유래도 없다.

 

그래서 날을 잡아 조선시대 광주(지금의 남양주 조안면) 출신 정약용의 무덤과 정몽주의 무덤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내 조상들도 광주(지금의 하남시)에 살다가 임란 직후 청양으로 이주해서 그런지 옛 광주 땅은 언제 보아도 정겹다.

 

먼저 정약용의 무덤을 찾아갔다. 낮은 언덕에 자리잡은 정약용의 무덤은 정몽주의 무덤처럼 호사스럽질 않다. 석물도 기본 뿐이다. 더구나 무덤 앞에는 바로 그의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그가 거닐었을 강변이 훤히 보인다.

무덤이든 생가든 정약용의 체취를 느끼려는 관광객이 줄을 잇고, 인근 기념관이나 다산문화의 거리에도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잇는다. 생가 마루나 여유당 마루에 앉아 정약용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야말로 여유를 가져본다.

인근에는 실학박물관도 있고, 기념관에서는 정약용에 관한 인쇄홍보물도 넉넉히 가져올 수 있었다. 정약용 묘역은 살아  있는 현재형이요, 학습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 집 사람을 세워 놓고 열 컷 넘게 사진을 찍었다.

 

- 부부 합장 묘인데도 모든 게 다 소박하다.

 

- 묘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너머 마을.

 

- 묘지 바로 아래에 생가가 있다. 보이는 곳은 후원.

 

- 이 동상은 관광객들이 꼭 사진을 찍고 가는 필수코스다. 들고 있는 책은 목민심서.

 

- 정약용 생가 전경.

 

- 후문에서 대문을 바라보며 찍었다. 오른쪽이 여유당이다.

 

- 안채.

 

- 여유당 창을 통해 안채마루가 보인다.

 

- 여는 의심이 많은 동물, 유는 겁이 많은 동물이니 독서 등으로 열심히 사실을 파고들고, 매사 조심하라는 의미다.

 

- 인근 연못에 핀 연꽃.

 

발길을 돌려 용인에 있는 정몽주 묘역으로 향했다.

정몽주 묘역은 한 마디로 무덤 하나 뿐이었다. 한옥 건물이 몇 채 보였지만 아무도 살지 않고 제사나 축제 때만 쓰는 듯하다. 넓기로는 정약용 묘역의 수십 배, 아니 백 배는 된다. 무덤도 정약용의 봉분이 소박한데 비해 정몽주의 묘는 거의 왕릉 부럽잖다. 그런데도 정몽주 묘역에서는 자료 하나 얻을 수도 없고,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다. 정약용 생가에 늘 대기 중인 문화유산해설사가 정몽주 묘역에는 한 명도 없고, 나아가 기념관도, 생가도 없다. 심지어 지키는 사람도 없고, 화분도 메말라 일부럼 심은 꽃조차 죽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몽주 묘역에는 컨텐츠가 전혀 없다. 하여가와 까마귀 노는 데 가지 마라는 시조 두 수가 시비로 서 있을 뿐이다. 하긴 첫 무덤이 아니라 이장한 무덤이다. 정몽주의 첫 묘에서 탈골이 되고 남은 마른 뼈를 이곳에 갖다 묻었을 뿐이다. 그러니 정몽주의 어린 시절도, 그의 삶도, 추억도 없는 낯선 남의 동네에 자리가 명당이란 이유로 누워 있을 뿐이다. 하다 못해 부모의 고향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다.

 

용인시가 기를 쓰고 돈을 들여봐야 정몽주 묘에서는 더이상 컨텐츠가 생산될 수가 없다. 기껏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처럼 대형 상여를 끌고다닌다. 그러잖아도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설화를 잘못 해석한 사람들 때문에 용인은 묘지 투성이인데, 그래서 산 자의 도시가 아니라 죽은 자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있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죽거든 오세요!"인가? 용인을 살아 행복한 땅으로 만들어야지 기껏 죽음의 도시로 만들어 뭘 어쩌자는 것인가.

 

남양주에 비해 더 가진 건 돈밖에 없으니 정약용 묘역보다 더 넓게, 정약용 무덤보다 더 화려하게 석물을 늘어놓을 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인가. 이 황량함, 을씨년스러움이 용인이 가진 정몽주 사랑의 한계요 현주소란 말인가.

 

- 정몽주 묘역 입구. 왼쪽에 있는 건물에는 사람이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가 보여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묘역 한 켠에 벌거벗은 사내들이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 왕릉보다 더 넓다. 정약용 묘역이 작은 마당이라면 여긴 골프장 수준이다.

 

- 가물어서 연꽃 한 송이 피지 않았다. 묘역 내에서도 꽃을 볼 수 없었다. 들꽃조차 없다. 화분의 꽃은 관리하는 이가 없어 다 말라 죽어 있다.

 

- 묘지 석물만 봐도 기가 죽는다. 정약용의 소박한 석물에 비하면 초호화판이다.

 

- 왕릉 중에서도 이렇게 넓은 묘역은 그리 흔하지 않다.

 

- 정몽주 묘에서 바라본 증손녀 사위 이석형의 묘. 역시 관리가 안되어 잡초가 무성하다. 이석형도 장원 급제만 세 번한, 조선시대를 빛낸 뛰어난 인물이건만 웬일인지 용인시는 불평등 대우를 한다.

 

- 이석형의 묘를 앞에서 찍었다. 이석형도 무덤만 용인에 썼을 뿐 서울 연지동 사람이다.

 

- 이석형 묘에서 바라본 드넓은 공동 묘역. 목민으로 고민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보시면 쓴웃음 짓고 가시겠다.

 

- 묘역 입구에 석형 후손들인 연안이씨 공적비 등이 비림을 이루고 있다. 웬일인지 영일정씨 비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 메말라 죽어버린 화초들. 모든 화분이 다 이렇게 말라 있었다. 컨텐츠 없는 문화란 결국 이런 모습이다. 5월 20일에 열리는 포은문화제 때 갖다놓고 이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게 틀림없다. 내년이나 돼야 다시 꽃을 이식하고, 다시 말려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