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도 몰랐다. 비야리성의 유마거사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유마가 다녀갔다.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산마루를 넘어갈 때 살짝 이마를 스친 바람 한 점, 새벽길에 옷깃을 적신 이슬 한 방울, 어쩌면 저물어가는 봄날에 가까스로 들어본 소쩍새 울음소리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 시대를 찾아와 같은 뉴스를 들으며 같은 고민을 안고 이웃에 살았다는 사실을 주변에서는 알지 못했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도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고, 외환위기를 겪고, 우리가 보던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월드컵이 열릴 때는 그도 ‘붉은 악마’가 되었다. 벗도 사귀고, 사람들을 사랑하기도 했다. 우리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에게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으며 귀여운 아이들이 있다.
예수도 부처도 오직 사람들 속에 있었듯이 그 역시 우리 속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 유마라고 밝혔다.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유마로 알아보지 못했다.
유마가 언제 적 사람인데? 그는 죽었어. 그냥 인터넷 아이디일 뿐이야.
이런 이치로 우리 주변에 늘 있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을 보지 못하고, 우리 이웃으로 살아가는 보살들을 보지 못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인들을 섬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도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러워 별로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인터넷에 올린 ‘도인들의 이야기’란 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을 소개하는 자신의 면모이리라.
- 도인이 도인과 만나 도를 이야기할 때
오랜만에 만나면 “오랜만이군. 잘 있었는가?”
아플 때 만나면 “몸은 어떤가? 견딜만한가?”
점심 때 만나면 “점심은 먹었는가?”
비즈니스하다가 만나면 “돈벌이는 잘 되어 가는가?”
그리고 시간이 되어 헤어질 때는 “잘 가게. 또 보세”하고 만다.
그렇다. 이처럼 그 역시 그러했다. 함께 노래방에 가 ‘소양강 처녀’나 ‘남행열차’를 부르고, 술집에 가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같은 낯익은 소주를 나눠 마셨다. 돈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기도 하고, 자식이 아플 때는 병원으로 달려가 안달하기도 했다. 그냥 이웃집 아저씨, 잘 아는 선후배,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 군중 속의 한 사람, 다만 그러했다. 그래서들 몰랐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 더 귀띔을 해주었었다.
-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실 때에는 항상 보살의 모습으로 오시고, 보살의 모습으로 오신 뒤에는 항상 부처됨(成佛)을 보이십니다.
아, 물론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도 오십니다. 백정이나 음란한 여인이나 무지렁이나 바람둥이나 거렁뱅이 같은 모습으로 오실 때에는 항상 눈물콧물 범벅이 되게 몸을 떨며 엎어져 우는 중생의 모습입니다. 다른 아무 것도 못하고 오로지 간절히 간절히 염불하는 모습만 겨우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쓸쓸히 추운 겨울 찬 바닥에 거적대기를 깔고 죽어버리면 호적에는 무연고자가 동사(凍死)한 것으로 빨간 두 줄이 그어집니다.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이, 아무런 방광도 없이….
그래서인지 당신이 그를 몰라볼 뿐입니다. 당신에게 염불을 가르치려 당신 곁에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는 운명을 감수하고 계시다는 것을 당신은 까맣게 모릅니다. 아, 무정한 사람!
이 글을 보면 전율이 인다. 그가 그렇게 간절히 말했는데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단지 유마 자신을 두고 한 말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보살들이 있으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이 세상을 다녀가실 때에는 늘 그러했다. 위대한 예술가가 세상을 다녀갈 때도 그러했다. 영광은 후세의 몫이지 당신들은 그 어떤 영광의 불빛도 받지 않는다. 도서관 사서일이나 하다 사라진 노자, 평생 변변한 명예를 얻지 못한 공자, 자살한 고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정신병으로 죽은 이중섭…. 그들을 알아본 건 고사하고 비방이나 일삼았다.
여기 이 시대를 찾아온 예수와 같은 분, 비야리성의 유마거사와 같은 분, 유마 김일수를 보라. 비록 때늦은 자각이긴 하나 지금이라도 그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그의 이름은 김일수, 1954년 2월 24일 제주 중문에서 태어나, 육이오전쟁 이후 3남6녀가 자라는 대가족에서 이승의 삶을 열었다. 그리 먼 얘기가 아니잖는가. 우리들 자신이거나 형이거나 동생이거나 혹은 아버지 시대가 아닌가.
그는 왜 하필 4대째 개신교를 믿는 집안에 몸을 나투었을까. 그의 아버지는 스물다섯 살부터 장로를 지내고, 목사를 지내고, 어머니는 시골 병원집에서 자란 독실한 개신교 집사였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개신교를 신앙했으며, 외삼촌이 목사이며, 누나들은 목사의 부인이 되기도 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정예배가 일상으로 이루어졌고, 교회에서 잔뼈가 굵을 만큼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감사절, 예배, 기도가 생활이었다.
이런 가풍에 힘입어 그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며 성경을 배우고 익히고 외우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생활에 깊이 젖어들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세상을 지배하고, 나라를 지배하고, 사회를 지배한다고 굳게 믿으며 자랐다. 풀 한 포기 자라는 것도, 열매 한 알 열리는 것도, 비 한 방울 떨어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허락없인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런 개신교 집안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그의 첫아들 아명을 모세라고 짓기도 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장로로서, 목사로서, 불교와 무속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제주에 개신교를 널리 전파한 돈독한 크리스찬이며 지역 유지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서 나온 성경해설서 등을 번역하여 출판할 정도로 개신교 전도에 열을 올렸고 또한 기독교계의 지식인이었다.
그렇다. 성인이 이 세상에 오실 때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보살이 목사의 아들로 올 수 있으며, 천주교 성인들이 불교 집안을 찾아올 수 있으리라. 칭기즈칸이 중국에 태어나고, 이순신이 일본에 태어난다고 이상할 일도 아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와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들이 왜 인간의 작은 틀에 갇히며 그런 사소한 것에 휘둘리겠는가.
생각해보자. 붓다가 왕자로 태어난 사실도 마찬가지다. 부와 권력,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우주를 꿰뚫는 대진리(大眞理)를 탐구할 수 있겠는가. 대개의 사람들이 돈에 휘둘려 인생을 허비하는 것처럼 부와 권력을 탐닉하다가 한 세상 보내기 딱 좋은 자리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과감히 그런 욕망을 떨쳐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떨쳐내고, 불우한 사람이 불행한 그림자를 지워버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그러고 보면 붓다는 붓다로서 가장 낮은 자리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그러니 유마 김일수가 세상에 온 것도 그와 다르지 않고, 또한 우리들 각자의 탄생 인연도 다만 그러하지 않는가.
이렇듯이 유마 같은 성인이 이 세상에 올 때야 왜 편안한 거처에 몸을 두고 일신의 안위를 구하려 했으랴. 어쩌면 그는 한 세상 재미있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천성이 예감(叡感)하고 호방해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다루지 못할 악기가 없이 기타든 피아노든 잡기만 하면 천상(天上)의 음률을 빚어낼 수 있었다. 바둑이든 장기든 포커든 그 무엇이든 잡기라면 못하는 게 없었고 주흥(酒興)도 사뭇 도도했으니 풍류남아였다고 할 것이다. 인터넷 토론방에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었고, 언어감각이 뛰어나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심지어 독일어까지 5개 외국어에 통했으니 이런 재능을 밑천으로 무역업을 열어갔다. 세련된 매너와 준수한 외모, 학구적인 지성미를 풍겨 뭇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버렸다. 부처님이 왕궁을 버리고, 부귀를 버리고, 왕자라는 지위도 버리고, 처자권속도 버렸듯이 하나하나 차례차례 버렸다. 마음에서 버리고 현실에서 버렸다. 그리고 그는 오직 하나 진리만을 받아들여 벗하고 더불어 노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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