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을 불교에서 찾다
그가 정확히 언제부터 백혈병을 앓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의 부모도 모르고, 그의 아내도 모른다. 절친한 친구인 수보스님이나 이달춘도 모른다.
다만 그가 페니실린 쇼크로 생사를 넘나들고, 천식으로 고생하고, 백혈병을 끌어안고 살았다는 점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사생관이 독특했던 듯하다.
교회에 나가서도 종종 죽음에 대해 목사들에게 질문하고, 생사의 긴박한 문제에 정면 도전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집안이 복잡해지면서 유마는 집에서 나왔다.
그때 고등학교 동창이던 광명사 수보스님에게 잠시 의탁하여 지냈다.
귀신 소굴이라고 여긴 절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이 더 깊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그는 불교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여전히 개신교 신앙만을 철저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그는 죽마고우 수보스님하고는 더없이 절친한 사이였다.
수보스님 또한 승려 신분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기독교인인 김일수의 부모를
마치 자신의 부모처럼 열심히 받들어 두 사람 사이에 종교가 다르다는 사실이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수보스님을 학교 다닐 때 부르던 그 이름 그대로 방진주로 부르며 광명사 요사채에 머물렀다.
그저 친구네 집에 간 것뿐이고, 친구를 만나러 갔을 뿐이었다. 그래도 친구인 수보스님이 아침예불,
저녁예불 등 수행자로 성실히 생활하는 것을 보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면서 차츰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마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았다. 불교에 대해 경계심을 풀고, 그러면서 호기심을 갖다보니
수보스님을 친구로만 대하지 않고 스님이라는 인식을 점차 갖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인 수보스님에게 볼만한 불교 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쩌면 ‘하나님이 아닌 잡신을 믿는 종교, 우상 숭배하는 미신이라고 치부하던 불교의 소굴’인 절에 머물면서
도대체 불교가 뭐 길래 저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꿇어 빌까 궁금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 진주야, 따분한데 너희 불교 책이나 어디 한 번 읽어보자.
수보스님은 “기왕이면 이 책 한번 읽어보렴?”하고 ‘대승기신론’이란 책을 건넸다.
유마 김일수는 이 책을 받아 읽더니 연속 세 번을 읽었다.
대승기신론은 처음 읽는 불교책으로는 무척 어렵다.
그렇지만 유마는 전생에 닦아온 선근(善根) 때문이었는지, 타고난 지적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용어도 모르고 맥락도 모르는 책을 15일 걸려 세 번이나 읽어냈다.
사실 김일수는 내심으로 불교의 허점을 찾아내고 불합리한 논리를 들추기 위해 책을 읽어보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평소 불교를 무당의 큰집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대승기신론을 읽어 가면서 크나큰 충격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기독교에 대해서 품고 있던 의문이나 문제점에 대한 해결법이 그 책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불교가 허망하고, 미신이라는 증거를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안고 있는 태생적인 문제점마저도 시원하게 풀어주고 있었다.
대승기신론은 유마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책을 다 읽은 김일수는 “더 볼만한 거 없나?”하고 수보스님에게 물었다.
- 진주야,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책 더 있지? 또 줘 봐.
수보스님은 이번에는 ‘여래장 사상’ 계통의 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유식학을 내주었고, 이어서 반야 계통의 책과 화엄과 정토까지 죄다 소개했다.
여래장을 읽고 다시 유식학을 받아 읽기 시작한 김일수는 미신이니 우상 숭배를 넘어
뭔가 심상치 않은 우주와 자신의 비밀이 불교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유마의 불교 공부, 스승의 지도 없는 독학이 본격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보스님은 친구 김일수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진리를 깨달은 이에게나 느낄 수 있는 법열 같은 것이었다.
유마 자신은 그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 나는『대승기신론(이기영 번역․해석)』을 내리 세 번을 읽었다.
눈도 떼지 않고 읽었다. 거기서 받은 큰 충격은, 기신론이 가진 논리의 허구성을,
기독교적인 유일사상으로 무장한 내가 찾아내리라고 무진 애를 썼지만 끝끝내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책을 탁―하고 덮는 순간, 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처참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때의 나의 혼란은 거의 위험 수준에 가까웠다.
나는 분명 악마의 유혹에 빠져든 것이라고 거듭거듭 자성하면서, 하나님을 예수님을 모질게 붙들고 찾았지만,
이미 그 얇은 책자 속의 반듯한 논리는 그런 하나님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지워 버린 후였다.
이러한 그의 느낌은 차라리 종교를 갖지 않았다면 무덤덤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불교 신도들이 대승기신론을 읽지 않고 있으며, 읽더라도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다.
너무 일찍 불교신도가 된 이들은 부처님오신날에 등 하나 공양한 인연만으로도,
법당에 가 절 한 번 한 인연만으로도 불교를 아주 잘 알거나 부처님의 자비를 한몸에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산다.
심지어는 절의 스님들하고 조금 친숙하기만 해도 불교를 잘 안다고 믿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다. 정작 불교신도들조차 유식학을 공부하는 이가 드물고,
대승기신론을 읽고 공부하는 이가 아주 드물다.
그런데 개신교인인 유마 김일수가 이 책을 읽고, 불교 신도들이라면 놓치기 쉬운 것들을 꿰뚫어보고
마침내 붓다를 본 것이다. 불교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실체를 본 것이다.
그는 기독교라는 독특한 사유체계 속에서 거의 반평생을 산 인물이었다.
그가 고백하여 말하기를 “비로소 예수가 보였다. 교회가 보이고, 믿음이 보였다.
기독교 안에서는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보지 못하던, 아니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것들이
불교를 통하니 너무 잘 보였다. 막힘이 없었다. 기독교의 성경이, 기독교의 교리가, 기독교의 믿음이 아무런 막힘없이 줄줄 설명되었고, 흐르는 강물처럼 걸림 없이 이해되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김일수는 본격적으로 불교세계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참선 염불 등 기본수행에 열중했다.
당연히 집안에서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특히 개신교의 열렬한 신자인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다만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주 토론을 가졌다.
그가 나중에 인터넷 카페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에 적은 글 중 상당수가 아버지와 나눈 문답 내용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아버지는 마음이 열려 있는 분이었고, 진리를 탐구하는 지성인이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 중문의 개신교 장로이자 목사였던 아버지와 개신교 열혈 청년이던 아들 유마 김일수가
길고도 길며 위험하고도 위험한 문답을 치열하게 나눈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불교신도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불교를 더 정확하고 깊이 배울 수 있었다.
개신교인이 교회 안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는 것처럼 불교인도 그가 아는 불교 안에서만
깨달음을 구하려 하는 이가 있다.
그래서 유마 김일수도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페니실린 쇼크로 죽음을 맛본 그는 더 실체적인 하나님,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을 원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님, 그런 실체가 아닌 허상으로는 그를 감동시킬 수 없었다.
기독교 신앙은 본디 따지고 묻고 토론하는 종교가 아니다. 믿고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늘 생사의 경계를 밟고 서있던 그는 무조건적인 신앙생활을 견뎌내지 못했다. 의문을 가졌다.
왜 하나님일까?
여기서부터 시작된 그의 의문은 그칠 새 없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답이 없었다. 하나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갇힌 하나님,
일부 목사들에 의해 잘못 규정된 하나님을 의심한 것이다.
그러다가 앞서 말한 대로 우연히 친구인 수보스님을 통해 불교 책인 대승기신론을 접한 이후
그는 활연자각(?)하여 불교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가 뛰어든 곳은 삼보(三寶)가 바르게 자리한 곳이지 갖은 미신을 일삼거나
그것을 잔뜩 움켜쥐고 있는 권력화되고 도식화되어 있는 기성의 불교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의심하고 파고들었다. 일찍이 붓다가 그러하고, 모든 조사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 탐진치(貪瞋癡)를 도려내고, 욕락을 끊어낸 뒤에 거기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진리,
그의 하나님을 보았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도리어 상상도 못하던 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그는 점점 불교의 세계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가 부처님을 온몸으로 맞아들인 시기를 주인공인 유마 김일수는 서른다섯 살 무렵이었다고 회고한다.
- 나는 서른다섯 즈음에 비로소 절엘 가면 남들처럼 절을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신교의 습관이 배어 있어서 절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처음 불상 앞에서 절을 했을 때의 그 망설임과 두근거림이 기억난다.
그때부터 나는 초상집에 가면 망자에게 무릎 꿇어서 큰절을 할 수도 있었다.
비로소 나도 큰절을 할 줄 아는 전통적인 한국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발심이 솟구친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 토론 공간을 열어 종교 토론을 하거나 글을 싣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체계를 잡으면서 <유마와 수자타>란 이름으로 사이트(http://cafe.daum.net/yumawasuzata)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불교이론을 탐구하고, 토론하고, 문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유마는 물론 김일수 자신이고, 수자타는 그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교리를 묻는 네티즌일 수도 있고,
혹은 끈질기게 질문을 해댄 ‘굽 낮은 빨간 구두’를 신은 한 여학생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이제는 책으로 정리되었다.
그는 평소에 반야심경을 반복해 읽기를 좋아했다.
염불을 중시해서 몇 시간이고 집중하는 경우가 잦았다.
집에서 가까운 청계사를 자주 찾아 기도를 했는데, 저녁마다 경전을 읽고 기도와 참선을 잊지 않았다.
보는 이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의 용맹정진은 유명했다.
그가 한창 불교에 심취해 있던 1997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 적어도 다음 네 분은 이 사바세계에 노니신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비록 선지식이 없는 말법시대이지만 이러한 대성인을 무려 네 분씩이나 모시면서
깨달음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하물며 뒤로 물러섬인가!
친구들은 말한다.
그는 불교 옷을 입었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고.
본인도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찾아 헤맸는데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더니
불교에 들어와 보니 하나님이 뚜렷해지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낳은 어머니는 지옥고 같은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애지중지 교회에 데리고 다니던 아들이 하필 지옥에 갈 미신이나 믿고 있다니 애가 탔다.
어머니는 아들을 볼 때마다 호소하고, 교회에 가 아들을 위해 미친 듯이 기도했다.
귀신 잡귀를 믿는 불교를 어서 버리고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참다운 말씀으로 구원받게 해달라는 간절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그래서 사랑에도 때가 있듯이 그는 아버지를 얻고
어머니를 잃는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개신교 장로이자 목사인 아버지와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래서 더 가까워졌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예수님과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찬송하며, 아멘을 외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한없는 연민을 갖기는 했지만, 잘해드려야 한다고 몸부림쳤지만
개신교와 불교라는 장벽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1995년 7월 18일의 기록이다.
- 어저께 제주도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교회에 나가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기도드린다며 원망스런 말씀이시다.
다음 주부터는 꼬박꼬박 다니겠다고 말씀드렸다.
세상 모든 중생의 모든 소리를 관(觀)하시는 분도 있는데, 자식된 몸으로서
제 어미의 간절한 음성 하나 관해 드리지 못하면서 위로 무엇을 구할 것인가?
비록 종(宗)과 교(敎)가 다르다 해도 그런 것은 자식된 도리를 다함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머니를 위해 찬송가를 불러드리고, 성경을 읽어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승에서는 모자의 정을 잇지 못한다. 김일수는 저승 사람이 되었다.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인도를 가든 미국을 가든 제주에 가든 서울에 있든 죽음이란 화두는
언제나 그의 그림자보다 더 질기게 따라붙었다.
그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자 현재 제주 중문의 광명사 주지인 수보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 어느 날 일수가 그러는 거야.
진주야! 내 속명이 방진주라서 이 녀석은 둘이 있을 때는 수보스님이라고 부르질 않아.
왜, 하고 대답하니, 너 백혈병이란 병 아니? 이렇게 물어.
그래, 그거 연속극에 잘 나오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거 걸리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또 물어.
야 임마, 죽는 거지, 뭐 있어. 그랬지. 그러고 말았어.
내가 이놈하고 제일 친한 친군데, 이놈이 일찍부터 백혈병에 걸렸는데, 나한테까지 말하지 않은 거야.
나한테 말하면 내가 제 어머니한테 말할 게 틀림없으니까 말 안한 거야.
그러니까 일수 부인도 그놈이 어느 날 갑자기 급성백혈병에 걸려 보름만에 죽은 줄 아는 거야.
그토록 오랫동안 병을 안고 산 줄은 모르는 거야.
그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큰 병을 앓았다. 죽기까지 자신을 괴롭힌 병마를 원망하지 않으며
스스로 참회하고 염불하고 공부하며 극복하고자 했을 뿐 어머니, 아내, 자식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는 2002년 12월 13일, 죽음을 약 8일 남겨둔 즈음에 마지막 발원문을 적었다.
발원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 몸은 쓰러지나 마음은 아닐 것이며,
이 마음 잠시 몸 따라 혼란스러우나 끝끝내는 아니오리다.
아, 제행은 무상하다. 이 몸은 반드시 쓰러진다.
제법은 무아이다. 쓰러지는 것은 ‘나’가 아니다.
이것을 모르면 괴로움이다.
나는 이것을 알므로, 몸의 고통은 있을지언정 괴로움은 없으리.
목숨을 마친다 해도 마음은 마치지 않아.
이 목숨 내 것이라 바득바득 우기며 살아온 지난 날, 부처님 아니 만났으면 내 어찌 구제했으랴!
홀로 가는 이 길에 남은 이들 눈물 보니, 차마 발길 떨어지지 않네.
내 반드시 가지가지 신통으로 그대들 곁에 머물러 바람으로 불어 그대들 보리심을 들려줄 것이며,
아지랑이로 피어나며 환화같은 이치를 설해 줄 것이며, 달빛으로 새어나와 그대들 염불을 도우리라.
정진하라. 정진하라. 불자여 정진하라.
모진 병과 죽음이 코앞에서 숨을 헤아리며 기다릴지라도, 불자여 정진하라. 물러서지 않음은 불자의 징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