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논개는 왜 성이 없나?

논개는 왜 성이 없나?
- 논개라고 부르지 말라
 
* 전에 최구식 의원 홈피에 쓴 글이다. 당시 무슨 일인가 있어서 쓴 것같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논개라니?
그럼 법무장관은 금실인가?
 
조선시대에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게 그 시대 풍습이었다. 그러나 기생 같은 경우는 황진이, 이렇게 이름을 대놓고 불렀다. 그보다 못하면 성은 빼놓고 홍랑, 이럴 수도 있었다. 양반가 여인이라면 당호를 붙여 신 사임당, 허 난설헌, 이렇게 예우삼아 불러주는 것이다. 허초희,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명성왕후 민자영, 이렇게 부르는 게 맞다. 그런데 논개는 어느 유형에 속하는가. 바로 기생 수준이다. 그렇다면 논개란 사람은 기생이었던가?
 
아니다. 조선시대 선조조, 임진왜란 중에 진주에 최경회라는 병마사가 있었다. 진주대첩으로 혼쭐난 일본군은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렸는데, 2차 진주성 공략 때 일본군은 더 준비를 철저히 해서 덤벼들었다. 조정에서는 진주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똘똘 뭉쳐 일본군하고 맞짱을 뜨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가야산 해인사 스님들도 달려오고, 의병들도 모여들어 조정이 인정하지 않는 비공식 전투 즉 민간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진주성 내의 관군들도 도망가지 않고 전투에 참여했는데, 이 전쟁의 지휘관이 바로 최경회였다.
 
진주성 사수의 최고 책임자인 경상우도 병마사가 바로 여러분이 천시하는 논개의 남편이다. 결과는 여러분이 아는대로 진주성이 함락되는 것으로 끝났다. 일본군은 함락 직후 대규모 승전 연회를 열었는데, 이때 최경회의 부인 주논개라는 분이 기생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이 연회에 참석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남편 최경회를 죽였다고 자랑하는 일본군 선봉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찾아 일부러 춤을 춘다고 하여 그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했다.
 
이런 분을 여러분은 기생이라고도 하고, 이름도 성을 빼먹고 논개라고만 부른다. 조선시대 말로 첩이고 소실이지 주논개는 분명 최경회의 부인이었다. 기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기생이라는 건 일본군이 볼 때 그런 것이다. 진주인들이여, 다시는 논개라고 하지 마시라. 제발 주논개라고 성까지 다 불러주시길, 그리고 제발 기생이라고는 하지 말기를.
 

- 덧붙여 춘향이도 이제 성춘향이 되는 세상인데 논개의 성도 찾아주자. 주논개로.

============================================

(다른 글 한 편을 여기 덧붙인다. 주논개 관련이라서 묶는다)

 

이     기 사     끝에    내   주장을   단다.
============================================
진짜 '논개' 얼굴, 4세기 지나 우리 곁에 왔다
논개표준영정 봉안·고유제, 23일 진주성 의기사 거행... 윤여환 교수 제작
윤성효 (cjnews) 기자
  
진주성 의기사에 논개표준영정이 봉안되었다.
ⓒ 윤성효
논개
  
촉석루에서 거행된 논개표준영정 봉안.고유제에는 진주와 장수지역에서 300여명이 참석했다.
ⓒ 윤성효
논개
 
'진짜' 논개(1574-1593) 얼굴이 4세기를 훨씬 지나 우리 곁에 왔다. '왜색'의 영정을 버리고 새 영정이 봉안되었다.
 
1593년 임진왜란 진주성싸움 때 왜장(게야무라 로쿠스케)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했던 논개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논개 표준영정(제79호, 작가 윤여환) 봉안·고유제가 23일 오후 경남 진주 촉석루·의기사에서 열렸다.
 
논개 순국지인 진주 의기사와 출생지인 전북 장수 의암사에는 새 영정이 봉안되었다. 그동안 이곳에서는 친일화가의 붓으로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제 고증을 제대로 거쳐 정부로부터 공식 지정받은 표준영정이 걸렸다.
 
이날 봉안․고유제는 진주와 장수지역 인사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고유제는 촉석루에서 거행되었고, 뒤이어 의기사에 영정 제막식이 열렸다.
 
초헌관은 정영석 진주시장, 아헌관은 리영달 논개제제전위원장, 종헌관은 박둘순 진주시여성단체협의회장, 고유사는 장일영 진주문화예술재단 부이사장 등이 맡았다.
 
"하늘을 울린 그 맵고도 숭고한 호국정신을 가까이 하고자 그동안 봉안해 온 영정을 바꾸기로, 만 사람이 더불어 뜻을 모으고 전국 현상공모에 과학적 고증과 국가 동상영정심의위원회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지정된 새 영정을 봉안하면서 맑은 잔과 포과를 올리오니 너그러이 흠향하옵고, 영세토록 편안하소서." (고유문 일부)
 
정영석 진주시장은 "의기 논개영정이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는데, 시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다 같은 마음으로 성스럽게 봉안하게 됐다"며 "앞으로 의기 논개의 충절정신이 더욱 성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 윤여환 교수(충남대)는 "감회가 새롭다, 최고 영정이었던 김은호의 영정을 내리고 표준영정을 봉안하게 되어 뜻깊다"면서 "김은호 영정은 나름대로 작품이 좋았으나 복식 등이 맞지 않았다, 이번에 철저하게 고증해서 새 영정을 봉안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순태 장수논개선양회 이사는 "그동안 진주와 장수의 '논개영정'은 같은 작가가 그렸지만 그림은 조금 달랐다"며 "이번에는 한 작가의 같은 작품을 걸게 되어 다행이다, 논개의 얼굴을 전국에 알릴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의암사에서는 오는 10월 1일(음력 9월 3일, 논개 출생일) '의암제전' 때 새 영정을 봉안할 예정이다. 그때까지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 논개'를 봉안해 놓게 된다.
 
  
정영석 진주시장과 윤여환 교수 등이 의기사에 봉안된 표준논개영정 제막식을 열고 있다.
ⓒ 윤성효
논개
  
논개표준영정 봉안.고유제는 촉석루에서 거행되었다.
ⓒ 윤성효
논개
 
1990년대 초부터 논란 일어... 시민단체 강제 폐출이 계기
 
그동안 의기사에는 김은호(이당)가 1960년대 그린 '미인도 논개' 복사본이 걸려 있었고, 의암사에는 그 뒤에 김은호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논개 표준영정을 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1990년대부터 일어났다. <진주신문>에서 1993년 7월 "의기사 논개영정은 친일화가가 그렸다"는 보도를 한 뒤, "진주성에서 친일을 거둬내야 한다"는 시민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은호는 부왜 여성단체인 애국금차회 회원들이 비녀를 비롯한 금붙이를 뽑아 일본의 전쟁자금으로 바치는 '금차봉납도'를 그리는 등 왜로에 빌붙은 친일행적이 뚜렷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에 그를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또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 논개'는 고증이 엉터리였다. 머리모양과 옷매무새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1800년대 후반이었다. 친일작가가 그린 데다 고증도 잘못되어 새 영정을 모셔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진주지역 시민단체들은 2005년 5월 10일 의기사에 걸려있던 미인도 논개 복사본을 강제로 뜯어냈다. 당시 박노정 친일잔재청산진주시민행동 공동대표 등 시민단체 활동가 4명은 건조물침입 등의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박 공동대표 등은 벌금을 낼 수 없다며 10일간 진주교도소에서 노역장에 유치된 뒤, 시민성금으로 모아진 벌금을 대납하고서야 풀려났다.
 
  
논개표준영정 작가인 윤여환 충남대 교수가 제막식에 앞서 의기사에서 분향하고 있다.
ⓒ 윤성효
논개
  
의기사에서 논개표준영정을 봉안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병찬 진주문화원장, 윤여환 교수, 이갑술 진주시의회 의장, 정영석 진주시장, 리영달 논개제제전위원장, 박둘순 진주시여성단체협의회장.
ⓒ 윤성효
그동안 '출생지' 장수와 '순국지' 진주는 논개 선양사업을 놓고 경쟁하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 복사본'을 강제로 뜯어낸 게 계기가 되어 표준영정을 제작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2005년 7월 진주시․장수군과 지역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논개영정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해 9월부터 표준영정 공모를 위한 협의가 진행되었다.
 
2006년 1월 전국 단위로 현상공모를 하게 되었고, 그해 7월 윤여환 충남대 교수가 표준영정 작가로 선정되었다. 문화관광부 동상영정심의위원회는 2008년 2월 4일 윤여환 교수가 그린 영정을 '논개표준영정'으로 지정(제79호)했다.
 
진주시와 장수군은 논개표준영정의 원본을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하기로 합의했다. 의기사와 의암사에는 논개표준영정 이모본(移模本)을 봉안하기로 했다.
 
박노정 공동대표는 "어쨌거나 새 논개영정을 봉안하는 의미는 울컥하도록 각별하다"면서 "그것은 7만 민관군과 논개 순절의 고귀한 정신이 깃든 진주성에 왜색을 그대로 두고 향을 사를 수 없다는 진주사람들의 최소한 자기확립의 발로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부여했다.
 
"같은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장수군과 견해 차이에도 서로 양보하며 논개영정 공모와 제작에 함께하여 원만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자랑스럽다. 새 논개영정 봉안은 모두의 승리인 것이다. 과거사 정리는 결코 국력낭비가 아니다. 감추고 왜곡하는 것이야말로 국력낭비요 비겁한 행위인 것이다. 논개는 겨레의 넋이요 성처녀로 결코 지울 수 없는 민족의 상징인 것이다."
 
  
윤여환 충남대 교수(오른쪽)와 박노정 친일잔재청산진주시민행동 공동대표.
ⓒ 윤성효
 
제막식.
ⓒ 윤성효
  
의기사에 새 논개표준영정이 봉안되었다. 제막식이 열리기 전 모습.
ⓒ 윤성효
 
 
===========================
이 기사를 읽고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언론은 '논개영정'을 그린 친일 화가 김은호만 잡아먹으려 할뿐 그를 아직도 '기생'이라고 하고, 왜 주논개가 아니라 논개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안된다. 또 하나의 역사 왜곡에 자신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같다. 역사 앞에서는 절대 겸손이 필요하다.
 
그의 이름은 주논개이며, 최경회의 부인이다. 아래에 참고가 될만한 글을 덧붙인다. 내가 고증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라서 여기 옮긴다. 어느 블로그에서 따왔는데 주장하는 이의 이름이 있다.
===========================
시들지 않는 꽃 / 만은 김종원
영국의 어느 수필가는 지구본을 보다가 Corea란 나라를 보면서 많은 의문점이 생기더래요. 도대체 아시아 동쪽 이 작은 나라가 중국이나 러시아나 일본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반만년이나 되는 역사를 보존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 때문에......
그래서 그 수필가는 우리 나라 역사책을 구해 그 해답을 구하려고 미친 듯이 읽어 내려가다가 논개(論介)에 이르러 무릎을 탁 치며 해답을 찾았다고 외치더랍니다.
"외적이 침입했을 때 젊은 여인까지도 적장을 유인하여 죽이고 같이 순국(殉國)할 수 있는 나라 Corea는 영원하리라!"
이렇듯 논개는 반만년 민족사를 설명할 수 있는 민족혼의 상징입니다. 그 겨레얼을 일깨운 논개!
그 번역된 수필가의 고백을 듣고 저도 의암 주논개를 알리고 국가 개념이 희박한 우리 젊은 친구들을 일깨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의암 주논개(義巖 朱論介 : 1574.음 9.3~1593)는 조선 선조 7년(1574) 9월 3일, 즉 갑술년(甲戌年), 갑술월(甲戌月), 갑술일(甲戌日) 갑술시(甲戌時)에 옥동자를 기다리던 서당 훈장댁인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全北 長水郡 長溪面 大谷里 朱村)에서 태어났지요. 딸이었습니다. 나이 쉰이 다 되도록 일점 혈육이 없던 훈장댁의 해산이었으므로 옥동자를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은 실망하여 개띠 해, 개 달, 개 날, 개 시에 딸이 태어났으므로 '개를 놓았네(낳았네)'라고 일컬었는데, 아명에 천명(賤名)을 붙이던 당시의 풍습을 좇아 논개의 아버지 주달문(朱達文)은 외동딸 이름을 '놓은(낳은) 개, 곧 논개를 음역하여 論介라 했다는데, 논개 아버지가 그만 일찍 죽어 호적명을 지어 주지 못하고 논개로 일컫게 되었답니다.
논개 아버지가 죽자 논개의 작은아버지 주달무(朱達武)는 꽃다운 논개를 이웃 마을 김부잣집(金風憲) 불구인 백치 아들에게 논과 곡식을 몰래 받고 민며느리로 팔아넘기려 하여 모녀(논개와 그 어머니 밀양박씨)는 야반도주하였대요.
모녀가 자취를 감추자 김풍헌은 모녀를 사기죄로 장수현에 고소하였고, 포졸을 풀어 최경회(崔慶會) 현감이 논개 모녀를 포박하여 조사해 보니 죄는 논개의 작은아버지(주달무)에게 있고 논개 모녀는 억울한지라 무죄방면했답니다.
그런데 도망다니느라 병을 얻어 논개 어머니 밀양박씨는 곧 죽고 논개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지요.
그 소식을 들은 장수현감 최경회가 불러 자기 부인(나주김씨) 병간호를 하면서 장수현감 관저에 머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논개는 장수현감 관저에 머물면서 현감 부인을 간호했으나 현감의 부인은 간호의 보람도 없이 그만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네요.
슬픔에 겨운 현감과(40대) 열일곱 살의 논개 사이에는 꽃다운 연정이 일어났다지요?
둘은 혼례식도 생략하고 살림을 차렸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경상우병마사(慶尙右兵馬使)로서 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진주로 갑니다.
그러나 열 배가 넘은 적군을 막지 못하고 진주성은 떨어지고 말았지요.
김시민, 김천일, 최경회 장군 등 진주성을 지키던 3장수들은 분함을 못 이겨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절한 뒤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했답니다.
그런데,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 게다니무라로 쿠스케(毛谷村六助)는 승전 잔치를 촉석루에서 벌이기로 합니다.
점령군 사령관의 명령은 준엄했지요. 술과 과일 고기와 떡 등 많은 음식과 기생들까지 동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답니다.
그 때 논개가 스무 살이었다니 얼마나 이뻤겠어요.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을 기회는 바로 이 때다."하고 논개는 관리를 시켜 기생의 호적인 기적(妓籍)에 "論介"라고 올리게 하고 '위장 기생'이 되어 승전 잔치에 참여했대요.
적장도 사람 볼 줄은 알았던지 아리따운 논개를 자기 옆으로 오라고 했답니다. 하긴 직업적인 개생들과 몸이 축 나지 않은 위장 기생은 그 탄력적인 몸매에서도 비교나 되었겠어요?
부르지 않았더라도 논개 자신이 의도적으로 접근하려고 했는데 이게 웬 떡이냐 했겠지요.
적장 게다니에게 간 논개는 자꾸 게다니에게 술을 권합니다.
"장군님!
술 드사이다."
"조오치!
조선 기생들은 정말 이쁘니이다."
"장군님!
저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뭔고?"
"저에게 옥가락지(일설에는 금가락지) 열 개만 구해 주셔요."
논개의 요청이 있기가 무섭게 명을 받은 점령군들은 가락지를 백 개나 약탈하여 왔다는군요.
그 가락지를 열 손가락에 낀 논개는 적장에게 취하도록 술을 권합니다.
그리고 매력적인 자태로 적장에게 속삭입니다.
"자앙군니임!
우리 달 구경 가사이다."
"조오치!"
둘은 촉석루 아래 의암에 이르렀습니다.
먼저 의암에 올라선 논개는 적장을 유인합니다.
"장군님!
저를 좀 꼬옥, 안아 주세요!"
이거 웬 떡이야.
적장이 의암에 건너가 논개를 덥썩 안자마자 논개는 가락지 낀 열 손가락으로 깍지를 낀 채 힘을 실어 적장을 안고 진주 남강으로 떨어졌지요.
너무도 순간적인 일이라 병사들이 미처 다처할 틈도 없었답니다.
물어 빠진 적장 게다니는
"요년아!
놓아라!"
아무리 팔꿈치로 논개 가슴을 강타해도 열 개의 가락지로 조여진 논개의 팔은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세계 역사에 빛나는 거룩한 죽음은 이렇게 꽃을 피웠습니다.
수주 변영로 시인은 이 순간을 "죽음을 입맞추었네."라고 노래했고, 저는 "영생(永生)으로 날았네"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죽어서 영원을 산 의암 주논개!
뒷날 논개가 마지막 딛은 그 바위를 나라에서는 의로운 바위라 하여 '의암(義巖)'이라 명명하고 논개의 시호도 "의암(義巖)"이라 했으니 성과 함께 "의암 주논개(義巖 朱論介)"라 부른답니다.
해마다 출생지인 장수와 순국의 장소 진주에서는 "의암 주논개제"를 열어 님을 기리는 행사를 빠뜨리지 않는데, 특히 고향 장수군에서는 봄과 가을 두 번씩 주논개제를 연답니다.
특히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에서는 논개 탄신일인 음 9월 3일을 군민의 날로 삼아 매년 충절을 기리고 있답니다. 봄 가을로 주논개제를 여는데 봄에는 5월에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논개생가지에서, 가을에는 10월에 장수읍 의암공원 일원에서 있으니 뜻있는 분들은 한번 찾아봄이 좋겠지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 왔다갈 때는 향긋한 꽃 향기처럼 깊고 은은한 의미와 여운을 남기고 가야겠지요....
(2007. 07. 04. 오전 비 내리는 창가를 보며 晩隱 드림)  2007-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