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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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읽고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언론은 '논개영정'을 그린 친일 화가 김은호만 잡아먹으려 할뿐 그를 아직도 '기생'이라고 하고, 왜 주논개가 아니라 논개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안된다. 또 하나의 역사 왜곡에 자신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같다. 역사 앞에서는 절대 겸손이 필요하다.
그의 이름은 주논개이며, 최경회의 부인이다. 아래에 참고가 될만한 글을 덧붙인다. 내가 고증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라서 여기 옮긴다. 어느 블로그에서 따왔는데 주장하는 이의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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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꽃 / 만은 김종원
영국의 어느 수필가는 지구본을 보다가 Corea란 나라를 보면서 많은 의문점이 생기더래요. 도대체 아시아 동쪽 이 작은 나라가 중국이나 러시아나 일본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반만년이나 되는 역사를 보존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 때문에......
그래서 그 수필가는 우리 나라 역사책을 구해 그 해답을 구하려고 미친 듯이 읽어 내려가다가 논개(論介)에 이르러 무릎을 탁 치며 해답을 찾았다고 외치더랍니다.
"외적이 침입했을 때 젊은 여인까지도 적장을 유인하여 죽이고 같이 순국(殉國)할 수 있는 나라 Corea는 영원하리라!"
이렇듯 논개는 반만년 민족사를 설명할 수 있는 민족혼의 상징입니다. 그 겨레얼을 일깨운 논개!
그 번역된 수필가의 고백을 듣고 저도 의암 주논개를 알리고 국가 개념이 희박한 우리 젊은 친구들을 일깨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의암 주논개(義巖 朱論介 : 1574.음 9.3~1593)는 조선 선조 7년(1574) 9월 3일, 즉 갑술년(甲戌年), 갑술월(甲戌月), 갑술일(甲戌日) 갑술시(甲戌時)에 옥동자를 기다리던 서당 훈장댁인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全北 長水郡 長溪面 大谷里 朱村)에서 태어났지요. 딸이었습니다. 나이 쉰이 다 되도록 일점 혈육이 없던 훈장댁의 해산이었으므로 옥동자를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은 실망하여 개띠 해, 개 달, 개 날, 개 시에 딸이 태어났으므로 '개를 놓았네(낳았네)'라고 일컬었는데, 아명에 천명(賤名)을 붙이던 당시의 풍습을 좇아 논개의 아버지 주달문(朱達文)은 외동딸 이름을 '놓은(낳은) 개, 곧 논개를 음역하여 論介라 했다는데, 논개 아버지가 그만 일찍 죽어 호적명을 지어 주지 못하고 논개로 일컫게 되었답니다.
논개 아버지가 죽자 논개의 작은아버지 주달무(朱達武)는 꽃다운 논개를 이웃 마을 김부잣집(金風憲) 불구인 백치 아들에게 논과 곡식을 몰래 받고 민며느리로 팔아넘기려 하여 모녀(논개와 그 어머니 밀양박씨)는 야반도주하였대요.
모녀가 자취를 감추자 김풍헌은 모녀를 사기죄로 장수현에 고소하였고, 포졸을 풀어 최경회(崔慶會) 현감이 논개 모녀를 포박하여 조사해 보니 죄는 논개의 작은아버지(주달무)에게 있고 논개 모녀는 억울한지라 무죄방면했답니다.
그런데 도망다니느라 병을 얻어 논개 어머니 밀양박씨는 곧 죽고 논개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지요.
그 소식을 들은 장수현감 최경회가 불러 자기 부인(나주김씨) 병간호를 하면서 장수현감 관저에 머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논개는 장수현감 관저에 머물면서 현감 부인을 간호했으나 현감의 부인은 간호의 보람도 없이 그만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네요.
슬픔에 겨운 현감과(40대) 열일곱 살의 논개 사이에는 꽃다운 연정이 일어났다지요? 둘은 혼례식도 생략하고 살림을 차렸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경상우병마사(慶尙右兵馬使)로서 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진주로 갑니다. 그러나 열 배가 넘은 적군을 막지 못하고 진주성은 떨어지고 말았지요. 김시민, 김천일, 최경회 장군 등 진주성을 지키던 3장수들은 분함을 못 이겨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절한 뒤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했답니다.
그런데,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 게다니무라로 쿠스케(毛谷村六助)는 승전 잔치를 촉석루에서 벌이기로 합니다. 점령군 사령관의 명령은 준엄했지요. 술과 과일 고기와 떡 등 많은 음식과 기생들까지 동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답니다. 그 때 논개가 스무 살이었다니 얼마나 이뻤겠어요.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을 기회는 바로 이 때다."하고 논개는 관리를 시켜 기생의 호적인 기적(妓籍)에 "論介"라고 올리게 하고 '위장 기생'이 되어 승전 잔치에 참여했대요.
적장도 사람 볼 줄은 알았던지 아리따운 논개를 자기 옆으로 오라고 했답니다. 하긴 직업적인 개생들과 몸이 축 나지 않은 위장 기생은 그 탄력적인 몸매에서도 비교나 되었겠어요? 부르지 않았더라도 논개 자신이 의도적으로 접근하려고 했는데 이게 웬 떡이냐 했겠지요.
적장 게다니에게 간 논개는 자꾸 게다니에게 술을 권합니다.
"장군님! 술 드사이다." "조오치! 조선 기생들은 정말 이쁘니이다." "장군님! 저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뭔고?" "저에게 옥가락지(일설에는 금가락지) 열 개만 구해 주셔요."
논개의 요청이 있기가 무섭게 명을 받은 점령군들은 가락지를 백 개나 약탈하여 왔다는군요.
그 가락지를 열 손가락에 낀 논개는 적장에게 취하도록 술을 권합니다. 그리고 매력적인 자태로 적장에게 속삭입니다.
"자앙군니임! 우리 달 구경 가사이다." "조오치!"
둘은 촉석루 아래 의암에 이르렀습니다. 먼저 의암에 올라선 논개는 적장을 유인합니다.
"장군님! 저를 좀 꼬옥, 안아 주세요!"
이거 웬 떡이야. 적장이 의암에 건너가 논개를 덥썩 안자마자 논개는 가락지 낀 열 손가락으로 깍지를 낀 채 힘을 실어 적장을 안고 진주 남강으로 떨어졌지요.
너무도 순간적인 일이라 병사들이 미처 다처할 틈도 없었답니다. 물어 빠진 적장 게다니는
"요년아! 놓아라!"
아무리 팔꿈치로 논개 가슴을 강타해도 열 개의 가락지로 조여진 논개의 팔은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세계 역사에 빛나는 거룩한 죽음은 이렇게 꽃을 피웠습니다. 수주 변영로 시인은 이 순간을 "죽음을 입맞추었네."라고 노래했고, 저는 "영생(永生)으로 날았네"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죽어서 영원을 산 의암 주논개! 뒷날 논개가 마지막 딛은 그 바위를 나라에서는 의로운 바위라 하여 '의암(義巖)'이라 명명하고 논개의 시호도 "의암(義巖)"이라 했으니 성과 함께 "의암 주논개(義巖 朱論介)"라 부른답니다.
해마다 출생지인 장수와 순국의 장소 진주에서는 "의암 주논개제"를 열어 님을 기리는 행사를 빠뜨리지 않는데, 특히 고향 장수군에서는 봄과 가을 두 번씩 주논개제를 연답니다. 특히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에서는 논개 탄신일인 음 9월 3일을 군민의 날로 삼아 매년 충절을 기리고 있답니다. 봄 가을로 주논개제를 여는데 봄에는 5월에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논개생가지에서, 가을에는 10월에 장수읍 의암공원 일원에서 있으니 뜻있는 분들은 한번 찾아봄이 좋겠지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 왔다갈 때는 향긋한 꽃 향기처럼 깊고 은은한 의미와 여운을 남기고 가야겠지요....
(2007. 07. 04. 오전 비 내리는 창가를 보며 晩隱 드림) 200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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